| 한자 | 瀋陽 東關 敎會,처음으로 한글 聖經을 飜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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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종교/기독교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요령성 심양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8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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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 | 요령성 심양시 |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가 1876년 중국요령성(遼寧省) 심양(瀋陽)에 세운 교회.
중국요령성 심양에 위치한 동관 교회(東關敎會)는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온 존 로스가 1876년에 세운 교회이다. 존 로스와 뜻을 함께한 한국인들이 동관 교회에서 처음으로 한글 성경을 번역해 한국으로 전했다는데 의의가 크다.
중국요령성의 성도 심양(瀋陽)은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남짓이면 도착하는 곳이다. 심양은 한인[조선족]의 거리인 서탑가(西塔街)가 있을 정도로 한인[조선족]이 대거 거주하는 동북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한국이 아닌 이곳 중국심양에서 첫 한글 성경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어 전해졌다고 하니 누가 그 일을 감당했는지, 어디서 어떻게 어떠한 경로로 국내로 유입되어 전해졌을지 궁금하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서양의 문물과 선교사들이 대거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과 영국의 아편전쟁이 끝나고 남경조약(1842년)이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은 홍콩이 영국령이 되고 중국이 개항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반면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펼치고, 1866년 병인년에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탄압을 가해 프랑스가 조선에 침범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스코틀랜드에서 중국 선교를 목표로 준비해왔던 존 로스는 중국으로 파송되어 들어온다. 존 로스가 중국심양에 세운 교회가 동관 교회이며 이곳에서 첫 한글 성경이 번역되었다. 첫 한글 성경은 선교보다는 성경 제작에만 힘을 쏟는다는 비난을 감수했던 한 선교사와 한글로 된 성경을 제작하겠다는 조선인의 일념 아래 맺어진 결과물이었다.
존 로스는 1842년 스코틀랜드의 낮은 언덕이 있는 작은 농촌 지역에서 태어났다. 로스가 태어나 자란 이 지역은 토착어인 갈릭어를 사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를 배울 수 있었다. 학교에서 언어에 재능이 있다고 인정 받아온 그였던 만큼 후에 중국어와 한국어를 배우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존 로스는 에딘버러(Edinburgh)에 있는 연합 장로 교회 신학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며 본격적으로 사역의 길을 준비했다. 졸업 후 얼마간은 스코틀랜드에서 사역을 했으나 곧 중국에서의 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
존 로스는 부인 스튜어트(M.A.Stewart)와 함께 1872년 가을 중국지푸(芝罘)로 향했다. 그러나 지푸에는 이미 많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는 만주에서의 선교를 사명으로 알고 만주의 영구(營口)로 이동했다. 사명으로 알고 갔지만 중국에서 로스는 환영받지 못했다. 외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적대감으로 인해 집과 예배당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에는 부인과 사별하는 큰 고통까지 겪었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로스의 선교 열정은 지속되었다. 중국어를 배우며 설교 활동을 위해 준비해왔던 로스는 중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국어로 20분간이나 설교를 하는 놀라운 성과를 보인다. 어떠한 고난도 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전 만주의 복음화를 원했던 로스는 봉천(奉天, 지금의 심양)을 가장 중요한 선교지로 보았다. 1875년에는 만주의 수도인 봉천에 선교부를 설립하고자 한다. 그렇게 이듬해 1876년에 창립된 교회가 동관 교회(東關敎會)다. 한글 성경 번역의 본산지 동관 교회가 세워진 것이다.
그후 로스는 매제인 존 매킨타이어(John Macintyre)에게 영구(營口) 지역을 맡기고 자신은 오로지 봉천과 타 지역 선교에 전념하였다. 당시 천주교가 극심한 탄압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관심은 한국 선교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중국 선교뿐만이 아니라 한국 또한 자신의 선교지로 알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토마스(R.J.Thomas)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안내 겸 통역자로 왔다가 순교하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으로 들어오고 싶은 마음은 지속되었지만 엄중한 쇄국정책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 선교를 목적으로 해서는 한국으로 들어가기 힘들다는 것을 인지한 로스는 중국과 한국의 언어와 역사 풍속을 공부해나가며 다음 단계를 준비하였다.
그와 동시에 중국심양을 중심으로 전도를 시작한다. 당시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고려문(高麗門)’이 있었다. 고려문은 봉천 아래 봉황성 근처에 있는 조그만 마을로 이곳에서 한중 양국 상인들의 무역이 이루어졌다. 로스는 이곳 고려문에서 한국인들을 처음 만나 한문 성경책과 양초를 주면서 전도를 하기 시작한다. 늘 마음 한켠에 한국을 전도하기 원하는 간절함을 품고 있던 로스는 자신이 직접 한국어를 배워 한글 성경을 제작하기로 결단했다. 위험한 한국에 직접 들어가 선교하기 보다는 한글 성경을 제작해 문서 선교를 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그는 자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줄 한국어 선생을 찾았다. 그러던 중 그의 바람은 차근차근 실현되어 1876년의 두 번째 고려문 방문 길에 한국인 이응찬(李應贊), 백홍준(白鴻俊), 이성하(李成夏), 김진기(金鎭基) 등을 만나게 되고 한국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들은 기독교 세례를 받아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 신자가 되고, 후에는 한글 성경을 한국에 반입하기 위한 목숨 건 밀행까지 수행한다.
한글 성경을 제작하기 위해 한국 사람을 교사로 삼고 한국말을 배워가던 그는 한국어 초급교재 라고 할 수 있는 『Corean Primer[조선어 첫걸음]』을 쓰기에까지 이른다. 『조선어 첫걸음』은 각 장소별, 상황별에 맞춰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단계적 한국어 초급 교재이다.
LESSON I
LIBRARY.
되션 말 보이고쟈 한다
ne doeshun mal bo-ighojia handa
I Corean words (to) learn want.
네 나를 션 졉 하갓너니
ne narul shiungseng daijup haghannuni
You (for) me teacher engage, will?
졉 히올리
ne daijup ha ori.
I engage, can.
얼나 주갓슴마
ulmena dsooghasumma.
How much give him?
힌 달에 넉냥
han dale nugh niang.
One moon four taels.
이 대화문은 『Corean Primer』 첫 장에 등장하는 예시문이다. 한글을 배우고 싶어하는 한 학생과 선생 간에 오가는 대화로 한 달에 넉냥을 주고 한국어 선생을 모신다는 당시에 쓰이는 대화 형식으로 예시되고 있다. 영어 알파벳으로 음역을 적고, 영어 번역을 달아 놓아 오늘날 회화책의 교수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로스는 『Corean Primer』를 쓰면서 “한글 자모는 아름다운 음성문자로 너무나 간단해서 모든 남녀노소가 읽을 수 있습니다. 소리글자이므로 한글로 인쇄된 어떤 책이든 자모만 배우면 읽을 수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당시 한글 쓰는 것을 천대해왔던 분위기속에서 로스는 한글의 우수성과 매력을 알아보았고, 그에 의해 한글의 위상이 일깨워졌다.
거기에 더해 학문적으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힘썼던 로스는 『한국사』라는 서양 언어로 기록된 최초의 한국 역사서를 쓴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풍속을 지속적으로 공부해나갔던 로스의 열정이 이러한 결과물을 낳았다. 그러나 한국을 가보지 못하고 쓰여진 『한국사』는 그것이 가진 여러 한계로 미흡한 부분을 갖고는 있지만 한국사를 서양인이 적어낸 것은 유례가 없던 일이었다. 처음으로 쓰여 졌기에 한동안 서양에서는 한국사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존 로스의 한국어 교본 『Corean Primer』와 『한국사』는 한국을 사랑한 한 선교사의 뜨거운 열정을 보여준다. 『한국사』는 현재 번역되어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한글을 익힌 로스와 그를 돕던 한국인들은 이후 한글 성경 번역 작업에 본격적으로 박차를 가한다. 헬라어 원문 성경과 영어 성경을 대본으로 삼은 선교사와 한문 성경을 대본으로 한 한국 사람들과의 번역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이응찬, 서상륜, 백홍준 등 6~7명의 한국인이 존 로스와 함께 했다. 이들의 한없는 노력은 1879년에 4복음서와 사도 행전의 번역 초고를 완성한다.
번역은 했으나 보급하기에는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함을 느끼고 로스는 번역된 초고원고를 들고 본국인 영국으로 돌아가 인쇄기 모금 운동을 벌인다. 중국에서는 매제인 매킨타이어가 번역 작업을 지속적으로 이어가면서 한시도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1881년 5월 말에 중국으로 되돌아온 로스는 그해 가을에 인쇄소를 설치한다. 동관 교회 구내에 문광 서원을 설치하고 번역 작업을 마무리해 나간다.
그들은 번역 작업을 하는데 있어서 분명한 원칙을 갖고 있었다. 다섯 가지의 원칙을 갖고 있었는데 첫째는 대중의 언어로 번역한다. 둘째, 한국 고유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셋째, 의미 전달에 주력한다. 넷째, 한글의 사용례를 따라 번역한다. 다섯째, 고유명사의 경우에는 헬라어의 음역을 쓴다는 원칙이었다.
엄격한 원칙에 따라 제작된 한글 성경 번역 작업이 드디어 빛을 보기 시작한다. 1882년 3월에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서』를, 같은 해 5월에는 『예수셩교요안복음젼서』가 출판된다. 최초의 한글 성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누룩금넌날이오니넘너졀양잡넌라예수 피들요안를보여갈으되너의가넘넌졀연셕을예비여우리를먹게라니
-누가복음 22장 7~8절 (로스성경판)
이것을 현재언어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유월절 양을 잡을 무교절날이 이른지라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가서 우리를 위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여 우리로 먹게 하라
-누가복음 22장 7~8절 (개역개정판)
1882년 처음으로 번역된 한글 성경의 일부분이다. 유월절을 ‘누룩을 금하는 날’이라고 칭하고, 외래어는 영어 발음을 그대로 수용했다. 사람이름 베드로(Peter)를 ‘피들’로, 요한(John)을 '요안내'로 번역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는 한글을 사용한다는 것을 수치로 여겼던 양반 사회였다. 한글은 평민과 여자들이나 쓰는 낮게 평가되던 글이었다. 이같이 그 당시엔 평민들이나 쓰는 한글을 파격적이리만치 선교언어로 채택하고 일반적으로 쓰는 용어를 사용해 쉽고 폭넓게 다가가고자 했던 번역 작업의 주축에는 중국요령성 심양동관 교회의 창립자 존 로스 선교사가 있었다.
함께 번역 작업을 하며 믿음이 생기고 세례를 받은 한국인들은 만주에서 인쇄된 최초의 한글 성경을 몰래 숨겨 들여와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은밀히 읽힌다. 이로써 한글 성경은 급속도로 퍼져나간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기독교의 전파뿐만 아니라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에 있었던 한국 사회에 보통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글 성경으로 쉽게 번역되었다는 점이다. 이 성경은 한국의 평민들이 기독교를 쉽게 받아들이고 한국 교회가 시작되는 출발점이자 한글 상용화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2013년 8월의 뜨거운 여름날,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 남짓 걸려 중국심양에 도착했다. 심양은 요령성의 성도로 동북지역 최대의 도시이다. 그리고 청대 초기에 건설된 성경성의 황제가 살던 고궁이 있는 곳이다. 봐도 봐도 끝이 없는 청조고궁에서 나와 동관 교회를 찾아가보기로 했다. 우리나라 성경이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 처음으로 번역 되었다고 하니 찾아가지 않을 수 없다. 길에서 여러 사람에게 교회의 위치를 묻고 한참을 걸어가서야 한글 성경이 처음 번역된 동관 교회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에는 한국에서 보던 교회와 달리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어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칠 뻔했다. 교회의 입구에는 ‘번역조선문성경구지’(飜譯朝鮮文聖經舊址, 조선글성경번역유적지)라고 현판이 붙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생각했던 것보다 규모가 제법 커 보이는 교회 부지가 보였다. 널따란 앞마당을 지나니 첨탑 위에 십자가가 걸린 예배당 건물이 있다. 드디어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와 몇몇의 한국인들이 처음으로 우리나라 말로 성경을 제작한 곳에 도착했다.
예배당으로 들어서니 강대상과 장의자가 있는 여느 교회와 다르지 않았지만, 그 배치의 모양새에서 의아한 점이 생긴다. 왜냐하면 목사가 설교를 하는 강대상과 신도들이 앉는 의자의 위치가 기존에 봐오던 것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예배당의 맨 앞 중앙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강대상이 오른쪽으로 치우쳐져 있는 것이다. 목사가 가운데에서 설교를 하니 강대상이 중앙에 있는 것이 당연한데 오른쪽에 몰아져 있으니 이상할 따름이다.
강대상의 왼편에는 강대상의 오른쪽 측면을 바라보며 놓여진 장의자와 강대상을 바라보고 도열해있는 장의자가 있는, 그러니까 강대상을 가운데 둔 ‘ㄱ’자 모양의 형태인 것이다. ‘ㄱ'의 꼭지점에 강대상이 있고, ㄱ자의 ‘ㅡ’에 'l'에 의자가 놓인 모양새다. 강대상을 가운데 두고 그 앞쪽으로 의자를 배치하는 기본적인 구조를 벗어나 왜 그러한 특이한 형태로 배치했던 걸까. 그것은 남자와 여자를 구분해 앉혀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한 배치였다. 남녀가 자리를 같이 앉지 않았던 당시의 문화가 교회에도 적용되어 강대상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왼편과 오른편으로 나뉘어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영화 ˂조선남녀상열지사˃에도 흰 가림막을 사이에 두고 남녀가 따로 천주교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원래는 애초에 지어지길 ㄱ 자 모양으로만 지어졌는데, 후에 ㄱ 자 안을 의자로 채워 넣었다. 지금은 당연하게도 남녀를 구분하여 앉지 않는다.
이제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본다. 경사진 면이 맞대어진 경사지붕은 하얗게 칠해진 지붕벽 이 나무로 둘러쳐져 있어 서양식 건축 지붕 모양을 하고 있다. 전체 천장을 보면 의자의 배치와 같은 ㄱ 모양의 나무를 덧댄 천장과 덧대지 않은 오직 흰 칠만 되어 있는 가운데 구획을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다. 천장의 모양을 통해서도 옛적과 현재의 배치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강대상 뒷면으로는 두꺼운 휘장에 ‘以馬內利’[임마누엘’;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고 한자로 음역한 붉은 글씨가 크게 적혀 있다. 그 휘장을 젖히면 교회의 창립자인 존 로스 선교사의 비문이 있다.
한글 성경을 번역하며 활발하게 선교활동을 해왔던 존 로스는 중국에서 38년간 선교 활동을 하다가 아픈 몸으로 귀국해 1916년 스코틀랜드 고향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부고를 전해듣고 슬픔에 잠긴 중국 성도들은 비석을 세우고, 그를 기리기 위해 예배당의 본당 강대상 중앙벽 휘장 뒤에 비문을 놓았다. 비문은 높이 1m, 너비 1.6m로 지금도 세워져 있다. 현재는 일반인에게는 개방되지 않아 실물을 확인할 수는 없다.
같은 동관 교회 부지 내에 예배당 건물 옆에는 ‘성경번역유적지’ 라고 적힌 건물이 하나 있다. 이곳에서 존 로스와 한국인들이 번역작업을 진행했다. 지금은 기념관이 되어 당시의 기록과 여러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비문의 모습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심양의 동관 교회는 현재 130여 년의 역사를 갖게 된 동북 지구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이자 국가시급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다. 1997년에는 본당 뒤에 새 예배 건물을 지어 3만 여명이 출석하는 교회가 되었다. 현재 존 로스가 세운 교회는 심양의 동관 교회 말고도 우장진 교회(현 영구시 기독 교회)와 철령 의로 교회가 남아 있다.
심양의 동관 교회에서 번역된 첫 한글 성경은 후에 오역, 평안도 사투리, 칭호, 고유명사의 문제 등이 있어 다시 정리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제대로 번역이 된 우리말 성경을 보기 원했던 한국인 신자들의 뜨거운 열망이 이어져 이후 다른 선교사들이 새롭게 번역하여 오늘에 이른다. 부족했지만 로스판 한글 성경은 최초의 한글 성경으로서 제 역할을 잘 담당했다.
한국은 존 로스의 한글 성경 번역 작업으로 인해 세계교회 역사에 유례가 없는 특별한 역사를 갖게 되었다. 해외선교사가 들어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이미 교회가 세워져 있고 한글 성경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하니 한국은 신자들끼리 예배하면서 선교사가 어서 들어와 정식적으로 세례 주기만을 기다리는, 신자가 이미 생겨난 특이한 나라였던 것이다.
조선어 초급교재와 한국의 역사서를 써 서양에 한국을 알리고, 한글 성경을 처음으로 번역해 한국 교회와 한글 상용화를 시작하게 한 존 로스. 한국에 들어와 보지도 못했지만 한국을 너무나 사랑하고 그리워한 선교사와 그를 도왔던 한국인의 열정이 이루어낸 아름다운 역사를 중국심양의 동관 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