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丹東에서 만나보는 韓民族들-北韓 사람, 北韓 華僑, 朝鮮族, 그리고 韓國 사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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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요령성 단동시 |
| 시대 | 현대/현대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0년 무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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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3년 12월 |
요령성 단동시에 거주하는 한민족들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
중국요령성 단동시에는1990년대부터 변화가 일기 시작하였다. 1992년 한·중 수교 이전에는 홍콩을 통해서 대북 사업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단동을 찾았다.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단동을 방문하거나 이주하였다. 당시 한국인 외에도 북한 사람, 북한 화교 그리고 대다수의 한인[조선족]도 단동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2010년 전후 이들 네 집단이 단동에서 사회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중 수교 전후로 이들 가운데 어느 한 집단을 빼고서는 단동 국경지역의 변화상을 설명할 수 없다.
2000년대 이래 단동에서 네 집단의 규모는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가 2천 명 이상, 한인[조선족] 8천 명 이상, 한국 사람이 2천 명 전후로 추산되고 있다. 한인[조선족]이 꾸준히 증가하는 것 이외에는 약 10여 년 동안 이러한 상황은 큰 변동이 없었다.
그러나 2010년 전후로 네 집단 가운데 북한 사람의 규모가 변화하고 있다. 북한사람들이 단동의 봉제 공장에 대규모로 취업하면서다. 2013년 12월 기준 그들의 규모만 15,0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3,000명 정도이던 단동 거주 한인[조선족]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 이 무렵 단순 방문 목적이 아니라 단동에서 생활을 이어나가는 북한사람, 북한 화교, 한국인이 본격적으로 늘어났다. 1980년대 북한 사람과 한인[조선족]의 만남은 주로 국경 너머 신의주의 국경 지역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1990년대부터 단동의 국경 지역에서 활발한 교류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는 한·중 수교, 북한과 중국의 경제적 차이의 역전으로 인한 북한 화교의 단동 이주, 한·중 간 운행되는 단동 페리의 등장, 북한 식당과 외화 벌이로 대변되는 북한 사람의 경제 활동, 국경 무역을 염두에 둔 다른 지역의 한인[조선족]과 한국인의 이주 등이 집단 간 만남의 계기가 되었다. 1990년대에 네 집단이 단동으로 이주한 동기는 각자가 북한과 중국·북한 국경을 사이에 두고 취업, 무역 등 생계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단동에 네 집단이 모여드는 배경에는 경제와 관련하여 ‘북한’이라는 단어는 빠지지 않는다. 단동에 거주하는 북한 사람은 북한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자 하는 세 집단에 북한을 연결해 주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다. 북한 골동품의 예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북한 물건을 가지고 국경을 넘어 단동으로 가지고 올 수 있는 북한 화교는 단동에서 북한 상품의 가치를 극대화하곤 하였다. 기존의 단동 토박이 한인[조선족]과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의 한인[조선족]은 한국과는 달리, 노동보다는 북한에 거주하는 친인척 인맥을 활용하여 장사를 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북한 사람을 만날 기회와 지역이 제한적인 한국인에게 북한과 연접하고 있는 단동은 북한과 관련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지역이 되었다.
1992년 한·중 수교는 단동에서 한국인이 북한 또는 북한과 관련된 세 집단을 만날 수 있는 장이 본격적으로 마련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북한은 1995년에 홍수 재해를 입고 그 이후부터 기근을 경험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는 단동에서 북한으로 가지고 갈 중국과 한국 물건을 구입하려고 했다. 반대로 한국인은 중국 물건보다는 북한과 관련된 사업을 모색하고자 단동을 찾기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본격적인 대외 개방을 시작한 시기와 맞물리면서 한국 혹은 한국 사람이 많이 사는 중국의 대도시로 이주를 선택하지 않은 한인[조선족]들이 단동에서 북한과 관련된 일을 찾기 시작하였다.
공식적인 교류에 제한이 있는 북한 사람과 한국인이 만나기 위해서는 북한 화교와 한인[조선족]이 필요했다. 단동 국경 무역과 남북 무역의 특징은 북한 화교와 한인[조선족]에게 의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단동의 한인[조선족]은 다른 지역의 한국인과 한인[조선족]이 맡아왔던 역할 분담을 북한 화교와 경쟁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네 집단의 만남을 이어주는 요소 중 하나가 단동의 국경 지역에 축적되었다.
남북 무역의 경우 한국인이 북한의 거래선을 확보하는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북한 진출 경험이 있는 한국 업체를 활용하기, 둘째, 대한 무역 투자 진흥 공사(KOTRA)를 통해 북한의 민족 경제 협력 연합회 혹은 중개상을 알선받기, 셋째, 북한의 민족 경제 협력 연합회을 직접 접촉하기, 넷째, 제3국의 중개상 등을 통하기 등이다. 이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곳이 바로 단동이다. 한국 업체와 민족 경제 협력 연합회가 있고, 제3국의 중개상으로 지칭되는 중국의 한인[조선족]과 북한 화교가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북한과 관련된 네 집단의 관계 외에 중국·북한 국경과 한국·중국 국경은 네 집단이 단동으로 이주하는 데 중요한 배경 가운데 한 축을 차지한다. 중·조 국경은 한국인에게 넘을 수 없는 국경이지만, 단동에는 한국인 대신에 중·조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세 집단이 있다. 이들을 통해서 북한 농산물과 제품이 한국에 넘어간다. 역으로 한국·중국 국경을 넘어온 물건들은 단동을 통해 북한으로 들어간다. 이러한 상황은 1990년대부터 단동의 국경 지역 문화를 ‘중국·북한 관계’라는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1990년대에 다른 지역에서 단동으로 이주한 한인[조선족]이 기존의 한인[조선족] 보다 많다. 이 때문에 1990년대부터 시작된 네 집단 간의 만남은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들은 좁게는 1990년대 이전 신의주와 단동의 국경 지역 사람들[북한 사람, 북한 화교, 단동이 고향인 조선족]이 만들어놓은 국경 지역 문화가 형성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이들의 만남은 한 집단이 먼저 터전을 잡은 곳에 다른 집단이 들어와 섞이는 형태는 아니다. 이전에 이곳에 네 집단과 관련한 문화와 3국이 연결되는 고리가 없었다는 점에서, 네 집단은 그들의 출생국 혹은 고향이 아닌 단동이라는 국경 지역에서 함께 국경 문화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000년대 이래 네 집단의 이주에서 눈여겨볼 지점은 앞서 언급한 네 집단의 이주 배경이다. 중조 국경 혹은 한중 국경의 넘나드는 네 집단이 최종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밝히는 것이 필요하다. 사실 네 집단은 중국인들과의 관계를 맺기 위해서 단동으로 이주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오히려 그들은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단동의 국경 지역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려 했다.
한국인은 중국 생활을 하기 위해 단동을 찾는 것은 아니다. 간혹 중국 생활만 생각하고 왔던 이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압록강 너머 기회의 땅 북한으로 눈을 돌리곤 한다. 그들은 단동에서 북한 물건과 사람들을 소개해줄 인맥, 즉 북한 화교와 한인[조선족]을 사귀게 된다. 얼마 뒤 그들은 북한 사람과 만나 사업을 논의할 수 있는 방식들을 알아간다. 이런 가운데 북한과 한국을 연결하는 남북 무역이나 3국 무역 방식을 실전에서 배운다.
북한 화교도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북한에서 단동으로 오는 것은 아니다. 단동은 그들에게 북한과의 관계 혹은 연결 고리를 통해 부를 얻을 조건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단동에 자리 잡기 시작한 그들 중 일부는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을 대상으로 한 사업 동반자로서의 관계를 구축한다. 그들은 남북 무역과 3국 무역 거래의 중간자 역할 혹은 북한 진출의 안내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국 체류 경험이 있는 다른 지역의 한인[조선족]은 흔히 중국 동북 3성 가운데 가장 한국 날씨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단동으로 이주하려 한다. 그들은 중국에서 중국인으로 살아가지만, 그들의 직업을 들여다보면 대부분 북한 사람 혹은 한국 사람과 연을 맺으며 살아간다.
북한사람 또한 북한 파트너를 필요로 하는 나머지 세 집단과의 교류 모색이 단동 거주의 주된 이유이다. 북한 사람은 세 집단의 너머에 한국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이처럼 네 집단은 중국 국경 지역이라는 기반을 통해서 북한과 한국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가며 단동에서 살아간다.
네 집단은 단동에서의 생활 방식에만 적응할 수 없는 형편이다. 특히 북한 사람과 한국인은 각자가 속한 국가의 상황과 정책에 따라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도 한다. 북한 사람은 집단적으로 귀국을 하거나 한국인은 대북 사업이 일시적으로 중단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북한사람과 한국인은 단동에서의 만남과 언행들에 조심하면서 귀국 후 문제가 될 소지를 가급적 줄이려 노력한다.
남북 관계의 변화가 피부에 바로 와 닿는 곳인 단동에서 그들은 살아가고 있다. 한국의 IMF 사태 때, 단동은 북한 농산물의 수입 감소로 경기 불황을 겪었다. 북한의 용천 사건 당시, 단동은 북한으로 들어가는 구호물자의 통행로였다. 각 집단은 위성 방송과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과 북한 소식을 접하며, 그들의 생활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촉각을 세운다.
단동 사람은 2001년 전후부터 핸드폰 사용이 활성화되었다고 기억한다. 단동에서 실질적으로 대북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북한에서 사용되고 있는 중국 핸드폰의 연락처 확보는 필수이다. 이러한 통신 수단의 존재는 한국인이 포함된 한국어를 공유하는 네 집단이 국경 넘나들기 행위에 직간접적으로 동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인이 실질적인 사장인 단동의 무역 회사에는 북한 화교가 대북 사업의 일부분을 담당하지만, 한인[조선족]이 연결한 북한 사람과 국경 무역을 추진하고 있다.
비공식적인 교류에 압록강 배와 핸드폰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압록강이라는 큰 하천이 단동 시내와 신의주를 가로지르고 있지만, 단동사람과 신의주 사람들이 서로 국경을 사이에 두고 육성 대화와 교류를 할 수 있는 곳도 산재해 있다. 압록강의 지리적 특성과 중국·북한 국경 조약의 특수성 때문에 도심 외곽으로 나가면 압록강의 본류가 아닌 실내천[지류]이 흐르는 지역을 사람들은 만남과 교류에 활용한다.
이 같은 예들은 비자와 여권만으로 북한과 중국 국경을 통관하는 사람들의 왕래를 파악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통계에 잡히지 않는 국경 넘나들기 행위에는 네 집단의 상호작용과 만남의 역사가 있음을 놓쳐서는 안 된다. 단동 국경지역은 중·조 국경이라는 경계를 넘나들며 사람들이 소통하고, 경제 활동이 전개되는 하나의 장이다.
단동에서 네 집단의 만남 유형들 가운데 한국인이 북한사람을 만나기 위해서는 공식적으로 한국의 통일부 산하 남북 교류 협력 센터에 ‘북한 주민 접촉서’를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단동에서는 무역 종사자 외에 한국인과 북한 사람의 만남은 일상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거리를 걸어가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가게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같은 고객인 그들은 자연스럽게 간단히 첫인사를 나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네 집단 가운데 한 집단만이 갈 수 있는 곳은 공식적으로 국민 정체성이 드러나는 여권 검사를 해야 되는 ‘단동시 한국인 기독교 임시 활동 장소’라는 명칭도 가지고 있는 한국인 교회뿐이다. 오히려 북한 식당은 한국인이 많이 이용하고,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북한 사람도 많이 간다고 말할 수 있는 정도이다.
중국어학원에서는 북한 학생과 한국 학생들이 같은 반에서 중국어를 배우는 모습과 이들이 친해지면 중국어 선생과 함께 햄버거 가게에도 같이 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외에는 북한 사람과 한국인 그리고 네 집단의 만남에서 제한이 있는 공간은 없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과 한국의 국민 정체성으로 인한 만남의 한계와 제한 국가의 감시 혹은 자체 검열이 엄밀하게 적용되지 않는 곳이 단동이다.
한편 단동시 정부가 주최하는 관광절 행사나 조선족 축제에 북한과 한국의 개인 혹은 단체가 함께 참석한다. 그러나 개인적인 만남이 아닌 북한과 한국인 집단 혹은 단체 사이의 교류는 없는 것이 단동의 또 하나의 현실이다.
단동 한국인(상)회가 주최한 ‘2011 한국인 송년회의 밤’ 행사에 약 700명의 북한 화교, 한인[조선족], 약 400명의 한국인 그리고 중국 사람이 모임을 가졌지만, 북한 사람은 개인이나 단체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은 하나의 예이다. 일반적으로 경제 교류를 하는 네 집단 가운데 개인적으로 북한 사람과 한국인이 거리에서 만나 긴 시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단동을 방문한 한국인은 북한사람이 운영하는 가게나 식당에서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한다. 이 과정에서 북한 사람과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본 한국인은 단동에 존재하는 북한 사람의 실체를 몸소 체험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단동에서는 북한 사람과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사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날 저녁 단동에 사는 한국 사람의 소개로 북한 화교가 운영하는 다방에서 조선족을 만나 술 한 잔을 나누면서 대북 사업의 경험담과 북한 사람을 상대하는 방식을 듣고 배운다. 그 다음날부터 통역으로 고용한 북한 화교 혹은 한인[조선족]과 함께 국경 무역의 현장이라는 삼마로, 단동 해관, 신류, 대형마트를 돌아다닌다. 며칠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배에서도 대북 사업가를 우연히 만나 단동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접한 한국인은 단동에서 대북 사업을 시작할 것을 결심한다.
이 과정에서 어떤 한국인은 한국의 교육 문제 해결 등을 고려하면서 온 가족의 단동 이주를 결심하곤 한다. 이로 인해 단동의 중국 학교의 교실에는 네 집단의 아이들이 함께 수업을 들으면서 같은 반 친구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인(조선족)과 한국인이 결혼한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까지 고려한다면, 중국 학교에서 중국어를 배우면서 한국어를 정체성의 기반으로 하는 학생들 사이의 만남의 유형들은 더 복잡해진다.
한국인은 처음에는 민박집에 단동의 거처를 잡곤 한다. 한국 사람이 이용하는 민박집은 주로 한인[조선족] 또는 한국인이 운영한다. 관광객도 숙박을 하지만, 단동에서 국경 무역을 하는 한국인이 몇 개월씩 장기간 투숙하는 경우가 주를 이룬다. 투숙객들은 국경 무역을 겸하고 있는 민박집 주인 혹은 함께 묵고 있는 사람들의 만남을 통해서 국경 무역의 노하우와 인맥을 전수 받곤 한다.
단동의 국경 무역에는 중국·북한 무역뿐만 아니라 남·북 무역 나아가 3국 무역이 녹아있음을 알아가게 된다. 단동에서 발행되는 잡지의 민박집 광고란에 ‘(조선) 무역’ 상담 가능은 단골 메뉴이다. 이와 같이 단동의 민박들은 단순히 숙박의 역할만 하는 곳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단동의 국경지역에서 국경을 활용한 국경 무역의 방식과 정보가 민박집과 관련된 사람들을 통해서 교환된다.
일반적으로 민박집은 소규모라는 인식과는 달리, 단동의 민박집은 한국 위성 방송 시설을 갖춘 원룸 형식의 객실이 10개가 넘는 곳들이 성업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주인 대신에 단동에서 한인[조선족]보다 임금이 싼 북한사람 또는 북한 화교가 음식 및 청소를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틈틈이 투숙객들과 대화를 나눈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민박집에는 국경 무역과 관련된 만남들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인이 북한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들의 삶과 생각들을 알아가는 기회도 있다.
단동에 살기 시작한 한국 사람은 13층의 민박집 거실에서 응시하였던 압록강 너머 신의주와 단동에 가로놓인 중국·북한 국경의 성격이 한국인을 제외한 세 집단이 오고가는 국경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국인의 뇌리에는 중국·북한 국경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형성되고 있는 네 집단의 관계맺음의 지형도가 자리를 잡아간다.
한편 북한사람은 국경 너머 살고 있던 한인[조선족] 친척이라는 끈, 먼저 살고 있는 주재원들의 인맥 등을 통해서 단동에서 만남의 방식을 배워나간다. 그리고 단동의 회사와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세 집단의 사람들과 교류를 가진다. 예를 들어 단동에 처음 온 북한사람도 북한의 지인을 통해서 소개 받은 한국인이 운영하는 회사를 방문한다. 단동에 있는 북한사람이 연결을 해 준 한국인과 단동에 방문한 적이 없는 북한 사람은 몇 년째 전화 통화만으로 사업 거래를 유지하기도 한다.
북한 화교는 국경 반대편 북한에 있는 북한사람과 친척들의 연줄을 무기로 한인[조선족]과 한국인의 만남 기회를 만들어 나간다. 나머지 세 집단보다 중국에 기존 관계망이 있는 한인[조선족]은 두 개의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장점을 활용해서 북한 사람 혹은 한국인 가운데 한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관계망을 넓히곤 한다. 이러한 네 집단의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가운데, 바쁘게 살다보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던 사람들도 “기차역과 해관[세관] 앞에 가면 만날 수 있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곳 주변에는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사람들에게 줄 선물 세트를 파는 가게들이 밀집해 있다. 이러한 관례를 단동사람은 ‘상감을 준비한다’고 말한다. 50위안, 100위안, 500위안 짜리 등으로 주문을 하면, 즉석에서 포장되는 종이박스에 과일, 과자, 술, 음료수, 사탕 등이 채워진다.
수고비만 주면 북한의 평양에 물건을 전달하는 일이 기차역과 세관에서 처음 만나는 사이에서도 가능한 곳이 단동이다. 따라서 기차역과 세관 앞에는 중국·북한 국경을 넘나드는 물건을 주고받기 위해서 네 집단의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 공간들은 중국으로 들어오는 북한사람과 그들을 마중하고 배웅하는 한국인, 북한과 중국을 왕래하는 북한 화교와 조선족들이 만나서 교류하는 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곳에서 만난 네 집단은 식당, 다방, 회사, 사무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겨 두 개의 국경을 넘나드는 삼국 무역에서 각자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