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조선족 마을의 진정한 영웅들, 조선족 공동체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

한자 朝鮮族 마을의 진정한 英雄들, 朝鮮族 共同體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내몽골자치구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4년 9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5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년 말
정의

중국내몽골자치구의 유일한 조선족 자치향, 신발조선족자치향에 대한 이야기.

개설

2007년 8월 15일, 광복절 62주년을 기념하여 부산경남대표방송 KNN(Korea New Network)이 제작한 다큐 「조선의 아이들 대초원에 서다」 제작진의 글을 통해 일제 강점기가 남겨놓은 상처의 한 전형을 망각의 늪에서 건져 올린다. 다큐는 일제 강점기 내몽골자치구에 유랑하였던 한인들의 삶을 다뤘다.

내몽골자치구에 남겨진 일제의 상처

칭기즈칸의 아내 보얼티에가 태어난 후룬베이얼 대초원에 조선족 마을과 자치정부가 있다. 어느 날 인터넷을 검색하다 중국 지역신문사에 실린 글귀에 눈이 멈췄다. '푸른 초원에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 조선 사람들 얘기였다. 그들은 어떻게 그 먼 곳에 가서 정착하고 자치정부까지 세웠을까. 긴 시간 동안 민족의 정체성은 어떻게 지키고 있을까.

중국내몽골자치구 후룬베이얼멍 아영기 신발조선족향(新發朝鮮族鄕)! 중국에서 가장 발전이 더딘 곳이라는 내몽골의 동북쪽 끝에 후룬베이얼 대초원이 있다. 남쪽으로 흑룡강성, 동쪽으로 러시아, 서쪽으로 몽골공화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이다. 조선족 자치정부인 신발조선족향은 후룬베이얼 대초원의 남쪽 끝 작은 도시 아영기(阿榮旗) 시내에 있다.

아영기는 인구가 31만 명이 넘는데, 한국의 웬만한 지방 도시보다도 넓다. 신발조선족향 정부는 1956년에 수립으며 1만 2천 명이 사는 7개 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조선족 마을은 동광촌신발촌 두 곳으로, 한인[조선족]은 향 전체 인구의 10% 정도다.

두 마을의 역사는 193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1년 만주 사변 직후 일본이 만주 일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면서 간도를 중심으로 만주 일대에 살던 한인들은 하나둘씩 북쪽으로 올라갔다. 당시 한인들이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초원과 밭농사가 전부였다.

대부분 농민 출신이던 한인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했기에 아룬강 옆에 정착하였다. 여름철 홍수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그곳을 쉽게 떠나지 못했다. 죽어서라도 조국에 가고 싶다는 소망 때문이었다. 아룬강은 송화강과 만나 다시 흑룡강과 합쳐진 뒤 오호츠크해를 거쳐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한인들은 죽은 뒤 뼛가루를 아룬강에 뿌렸다. 뼛가루로라도 고향에 닫고 싶었을 그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하다.

그곳에서 만난 동포들은 대부분 소박하게 살고 있으며, 취재진을 반갑게 맞아줬다. 특이한 것은 대부분이 경상도 등 지금의 남한 출신이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간도 지역은 북한 땅에서 살던 사람들이 먼저 정착을 한 상태라, 기반이 없던 남쪽 사람들이 대초원 지역으로 흘러 들어갔던 것이다. 만주사변 직후 일제는 러시아와 중국 전역을 노리고 농업개척단 명목으로 한반도의 한인들을 강제 이주시켰다. 동광촌에서 만난 72세 장석철 할아버지가 그런 경우로 그의 고향은 충남 예산이었다.

민족 교육의 어려움과 민족 정체성의 위기

이들은 비록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조선족으로 살아가야 했지만, 민족의 정체성과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곳에 설립된 조선족 마을과 조선족 학교 덕분이었다. 하지만 최근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중국의 급속한 도시화와 한국과의 교류 증대가 그곳 젊은이들이 돈을 벌기 위해 중국 내 도시 혹은 한국으로 떠나면서 마을에는 젊은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 힘들다. 이미 2년 전에 동광촌 소학교와 신발촌 조선학교 모두 폐교됐다. 두 학교는 아영기 시내에 있는 아영기 조선족 학교와 통폐합됐지만, 아영기 조선족 학교도 최근 폐교 위기에 내몰리고 있다.

유치원부터 중학교 과정을 모두 갖추고 있는 아영기 조선족 학교의 학생 수는 고작 42명. 이 가운데 30명은 부모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 어린 학생들은 길게는 5년, 짧게는 2년씩 부모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미 아이들은 이별에 익숙해 보였다. 이후 학생 수는 더욱 줄어 2007년 9월에는 재학생은 37명에 그쳤다. 결국 재정난에 빠진 학교는 한족 학생까지 받아들였다.

동광촌 한인[조선족]들은 취재진을 환대했다. 2007년은 광복 62주년이자 한·중 수교 15주년이 되는 해였다. 우리에게 재미 동포, 재일 동포는 있지만, 재중 동포란 말은 없다. 우리 사회에서 재중 동포는 어느새 조선족이란 호칭이 익숙하다. 지난한 세월 머나먼 타향에서 힘들게 살았던 사람들, 이제 그들은 말한다. "조국은 우리를 조선족이라고 부르지만, 우리에게 한국은 너무도 자랑스러운 조국입니다."

내몽골(內蒙古)의 초원에 민족 문화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

유목민의 고향 내몽골자치구 초원에 한인[조선족] 특유의 문화가 새롭게 전파되고 있다. 현지 한인[조선족] 언론에는 잘 알려진 내몽골 자치 지역 내 조선족 학교들과 조선족향이 새로운 모습으로 민족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 최근에는 조선족 가정식 박물관이 세워져 내몽골 주민들과 관광객들에게 민족 문화를 전파하고 있다.

내몽골 지역에 조선족 마을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 한국에선 생소하다. 흑룡강성 성도인 하얼빈의 서북방에 위치한 치치하얼에서 버스로 2시간 남짓 서북쪽으로 더 가면 후룬바이얼(呼倫貝爾)시 초입에 위치한 아영기(阿榮旗)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한다.

‘아영’은 만주어로 '깨끗하다'는 뜻의 '아룽'이라는 예쁜 이름에 치(旗)라는 몽골식 행정단위[한국의 군/면 단위]가 합쳐진 것이다. 이곳에 1930년대부터 한반도와 만주로부터 한인들이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있는 신발촌[중국명 신파, 新發村]은 내몽골에서는 향(鄕)급으로서는 유일한 조선족 자치 지역이다. 내몽골에서도 간혹 한인[조선족]이 주축이 된 마을은 보이지만, 향급 이상 규모의 조선족 마을로서는 이곳이 거의 유일하다.

신발조선족향 외에도 내몽골자치구 내에는 오란호특시(烏蘭浩特市)의 '삼합촌'이나 통료시(通遼市)의 '선광촌'과 같은 조선족 마을이 있기는 하다. 두 마을은 관광촌 형태를 띠거나 조선족이 주축이 되어 한족과 몽골족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규모나 문화적 특성에서 볼 때, 신발조선족향이 내몽골자치구에서는 가장 큰 조선족 집단촌이다.

신발조선족향의 향장(鄕長)은 윤창길(尹昌吉, 47) 씨다. 한인[조선족] 매체인 『길림 신문』등에 몇 차례 소개된 윤창길 향장의 민족 사업 이야기는 실로 눈물겹다. 그는 9년 전 아영기 법원 판공실 주임(국장급)의 지위를 버리고 민족촌 재건사업에 투신하고자, 향장으로서 눈코 뜰 새 없이 마을을 건설하고 가꾸고 있다. 그는 공직자로서의 전도양양한 앞날보다 시골 마을 향장이 좋아보였던 것일까? 그가 본 미래는 향장인 자신의 미래가 아니라, 바로 한인[조선족]의 삶과 문화의 미래였던 것이다. 한때 3,000명에 이르던 한인[조선족] 인구는 지금 1,236명으로 줄었으나, 아영기에서 가장 면적이 작고 가장 가난하던 신발향은 현재 지역 내 최고 소득의 부촌이 되었다. 윤 향장의 동분서주가 가져온 눈부신 발전의 결과였다.

신발향의 총 인구는 9,000여 명이며, 몽골족, 한족, 다우얼족, 만주족, 시버족 등이 함께 살지만, 조선족들은 수백 여 명씩 따로 집거하고 있다. 우선 윤 향장은 자신부터 민족 향장으로 거듭나기 위해 모국어와 문화를 다시 배우고 생활화했다. 그는 전통가요와 무용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배웠다. 이는 그가 마을을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한 창조적 에너지를 제공한 셈이다.

윤 향장 부임 후 마을은 현대식 별장촌으로 급속하게 변모했다. 또한 2007년에는 조선족 특유의 '경로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45만 위안을 투입, 400㎡ 규모의 초현대적인 아파트식 경로당을 건립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현재 윤 향장은 가뭄 방지와 논 우물 건설, 논길과 다리 건설을 위해 재정자금을 1,000여 만 위안(약 18억 원)을 신청해 놓고 있다.

매년 7월 말 경이면 신발향에서는 조선족 문화 축제가 열린다. 널뛰기와 그네 뛰기 등 민속 놀이는 물론 고유 음식과 함께 효도 문화를 외부인들에게 알리고 있다. 이 외에도 아영기의 생태 관광과 문화 관광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윤 향장은 마을에 민족 문화 박물관도 세웠다. 150㎡ 면적에 조선족 민속품과 민속 공구류, 문화 체육 전통 도구들, 음식 취사 도구류, 생활 거주류, 민족 복장류 등을 전시했다. 전시품들은 모두 윤 향장이 연변 등지에서 수집해 온 것들이다.

신발조선족향에서 승용차로 1시간 남짓한 찰란둔(札蘭屯)에 조선 민족 가정식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비록 20㎡의 작은 박물관이지만, 한인[조선족]의 생활 체험 공간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박물관에는 '조선족 민속 문물', '조선족 가정 생활 습속', '민족의 영예' 등과 시대별로 조선족의 생산 도구, 생활 용구, 장식품과 역사 문화 유물, 사진 등 1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을 만든 주인공은 중국의 전국 10대 우수 공익 자선모범으로 알려진 윤복(48세) 씨다.

네 개의 날개를 달고 경제가 도약

윤창길 향장은 조사, 좌담, 외지 고찰을 하고 신발향의 162.2㎢나 되는 산과 강을 돌며 전 향의 기본 정황을 파악한 뒤 ‘4개 우세를 발휘하여 민족향의 경제를 촉진하자’라는 전략 구상을 제출하였다.

2006년 그는 ‘공업으로 향을 강하게 하고, 목축업으로 부유하게 하며, 과학기술로 진흥하게 하고, 관광으로 활력 있게 하며, 문화로 명성을 날리게 하는 전략’을 제출하였다. 2008년 그는 전 향의 산업 구조를 1원(一园, 공업원구), 1촌(민속촌), 남쪽 촌에서는 남새를 재배하고 북쪽 촌에서는 과일을 재배하며, 아룬하 강변의 촌에서는 벼를 재배하고, 전향 범위 내에서 젖소를 사육하고, 감자를 재배하기로 하는 등 산업 구조를 조절할 것을 제안하였다.

신발향은 아영기에서 제일 큰 벼농사 생산 기지이다. 조선족 또한 벼농사 전통이 유구하다. 녹색 벼농사 기지를 건설할 발전 구상을 제출하였다. 전 향 1.5만 무(畝) 벼 재배 면적을 확보한 기초 위에서 ‘아영기 조선족 녹색 농업 발전 연구회’를 설립해 양질의 녹색 쌀을 발전, 보급시킬 것을 제의하였다.

2007년 그는 향농업 봉사 중심의 사업 일꾼을 인솔하여 흑룡강성 수화시에 가서 벼 재배를 참관하였다. 그는 대비 시험을 통해 생산량이 높고 품질이 좋으며 항병성이 강한 ‘룡갱 15’, ‘사사니’, ‘공육 131’ 등 3개 품종을 선택하여 보급시켰다. 현재 3개 품종의 재배 면적은 1.2만 무에 달하며, 1무당 100㎏ 이상을 수확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그의 노력 하에 ‘아영기 신발 미업 유한 회사’를 설립하여 ‘아룬 신미’라는 양질 녹색쌀 상표를 성공적으로 등록하였다. 이로써 재배 쌀을 공동 브랜드로 가공, 포장, 판매하여 ‘아룬 신미’의 상품 경쟁력을 부단히 확장시켜 나갔다. 이는 멀리 내몽골후룬베르시(해라얼) 등 대중 도시에 판매되어 소비자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용두 기업를 통해서는 낙농업을 크게 발전시키고, 낙농업 발전 우대 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윤창길 향장의 노력으로 근 2년간 신발향에서는 젖소 705마리를 사들였다. 농업과 목축업의 복합 영농 가구가 부단히 늘어나 전 향의 축목과 출란(出卵) 마리 수는 889만 마리, 흰 거위가 112만 마리에 달한다. 젖소는 주로 한족들이 사육하는데, 조선족도 사육 가구가 늘어나는 추세다. 젖소는 농가당 보통 10여 마리를 사육하는데, 한 마리 판매가가 1만여 위안에 달한다.

윤창길 향장은 신발향의 지역 특점에 따라 ‘나이룬(奈倫)’, ‘서설瑞雪)’ 등 점분 용두 기업에 의거하여 적시적으로 ‘강자에 입각하여 향의 경제를 발전시키는 전략’을 제시하였다. 이로써 ‘기업+기지+농업’의 산업 사슬을 형성하여 부단히 심화시켜 나가고 있다.

이와 같은 기반 하에 수년 내 주문 농업 규모를 18만 무(畝)로 확장하고, 누에를 880바(把)나 재배하였다. 또한 잎담배를 1,500만 무(畝) 재배하여 가정마다 1년 수입이 7~8만 위안에 달해 농민들 수입이 연간 1,600여 만 위안으로 증가하였다.

민족 풍정 관광 지구로 선진 향(鄕) 부상

신발향은 ‘노래와 춤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족 또한 찬란한 민속 문화와 독특한 음식 문화로 유명하다. 김창길 향장의 향장의 인솔 하에 조선족 특색의 자원 우세를 충분히 발휘하여 한인[조선족] 문화를 깊이 개발하고 제3 산업을 대대적으로 강화하였다. 이로써 민족 풍정 관광업과 음식 서비스업, 노무 송출업이 급속도로 발전되었다. 동광촌만 하더라도 민족 식당이 이미 9개 업체로 늘어났다. 올해 또 4개 업체가 ‘농가락’ 가정 관광호를 개업하여 연간 관광객 접대 능력이 근 5만 명으로 매출액도 20여 만 위안에 달한다. 동광촌의 명화 조선족 식당은 규모가 크고 한인[조선족] 주택 모양으로 꾸리고 투명 유리로 설계하여 손님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농가락’ 조선족 가정 관광 안내호의 영업 허가증은 아영기 관광국이 발급했다. 안내호의 표지 설계는 윤창길 향장이 민족 특색이 다분한 목제 그림으로 직접 설계했다. 가정 관광호들은 한 가지 경영 수입만 해도 연간 3만 위안에 이른다. 그러나 조선족이 많지 않아 규모를 확장할 수 없다는 점은 안타깝다.

조선족 언어, 문화 및 친척 연고 관계를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노무 송출업을 발전시켜 매년 120여 명이 한국으로 나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그들이 벌어들이는 연간 평균 수입이 1,000여 만 위안에 이른다. 음식업과 노무 송출업은 이미 전 향의 경제 발전을 이끄는 새로운 산업 포인트가 되었다.

이상의 네 가지 산업 측면에서 수년간 꾸준히 노력한 끝에 신발향의 농촌 생산 생활환경은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2008년 말 조선족의 1인당 연간 순수입은 6,200위안에 달하여 빈곤 인구가 상당히 줄어들었다. 촌민들의 생활 수준도 전 향 평균 수준보다 높아 평균 수입 증가율이 가장 빠른 집단으로 되었다. 전 향 농민의 순수입은 이미 아영기의 평균 수준을 초과하였으며, 경제발전 속도는 선진향의 행렬에 들어섰다.

동광촌 조선족 집거구, 새농촌 건설의 기지로

윤창길은 새농촌 건설의 절호의 기회를 잡고 조선족 집거구인 동광촌을 새농촌 건설의 시범촌으로 추천했다. 그는 항목을 도입하고 자금을 받아냈으며, 전 향 간부들을 인솔하여 새농촌 건설의 현장으로 가서 군중들과 함께 길을 닦고 나무와 풀을 심어 환경을 아름답게 꾸몄다. 이외에도 그는 동광촌에 2,050m의 시멘트 도로 포장, 46개 가로등 설치, 302㎡의 촌지도부 종합건물과 1,200㎡의 영빈광장 조성, 부지 면적이 8,000㎡에 이르는 조선족 음식거리 건설, 140㎡의 민속관 건설, 470㎡의 민족 경로원 신축, 50동 초가집 개조 등의 수많은 사업들을 추진하였다.

현재 민속관은 촌급이지만, 내년에는 향급으로 격상될 예정이며, 전시 면적도 350㎡로 확장될 전망이다. 농민 문화 오락실도 조성하여 각종 서적을 비치하고 농업농사 부문의 전문가 초청 강연회를 열어 부농의 비결을 찾도록 했다. 동광촌의 거대한 변화와 건설사업의 성과는 아영기와 후룬베르시, 내몽골자치구 지도 간부들의 호평을 받았다.

아마추어 배우들로 무어진 조선족 민간 가무 예술단

김창길 향장은 민간 문화 예술과 전통 체육 사업을 계승하고 번영시킬 수 있는 방도에 대해서도 골몰해 왔다. 그의 창의와 노력 하에 2005년 초여름, 민족 특색을 갖춘 조선족 민간 가무 예술단이 발족되었다. 이 가무단은 신발향의 농민, 개체 상공호, 기업과 사업 단위의 30여 명의 일반 배우들로 구성되었다.

예술단 배우들은 각자의 본업을 수행하면서 짬짬이 시간을 내어 기량을 연마해 나갔다. 어떤 젊은 여성들은 갓난아기를 걸상에 재워놓고 무용 연습을 하였다. 예산 부족으로 예술단 배우들은 무보수로 공연하였으며, 처음에는 통일적인 복장이 없어 남의 것을 빌려 입고 공연에 나섰다.

김창길 향장은은 배우를 찾고자 전 향의 촌을 돌아다니며 입이 닳도록 설득하면서 조선족 문화 계승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배우들은 민족 사업을 발전시키려는 그의 드높은 열정에 감화되어 너도나도 예술단에 참가하였다. 김창길 향장은 예산을 신청하여 예술단의 복장과 음향 설비, 도구 등 기본 설비들을 구입해 주었다.

예술단은 설립 후 향의 경축행사공연, 단오절공연, 아영기의 행사 공연 등 각종 대형 공연들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동시에 아영기를 대표하여 2006년 후룬베르시 음력설야회와 2009년 나다무 대회에도 참가하였다. 후룬베르시를 대표하여 내몽골자치구에서 주최한 전국 북방 지구 관광 문화 축제에도 참가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예술단은 2006년에 내몽골자치구 10대 농촌 극단으로 선정되며, 사회 각계로부터 큰 호평을 받았다.

초창기와 달리 지금은 사흘만 연습하면 70~80명이 참가하는 공연 한창을 완수할 수 있을 정도로 개인 기량과 팀워크가 향상됐다. 지금은 한족 간부들도 조선족 무용 공연에 동참한다. 처음에 향에 배치받아 온 한족 간부들은 전통 무용 배우기를 꺼리고 거부감을 나타내지만, 2년이 지나면서 일단 적응만 하면 아주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춤도 잘 추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김창길 향장은 민족 전통 체육 사업의 발전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했다. 2005년 전시 소수 민족 그네뛰기 선발 경기를 개최했다. 2007년에는 아영기 조선족 체육 협회를 발족시키고, 3년에 한 번씩 아영기 조선족 운동대회를 신발촌의 조선족 학교 운동장에서 개최하고 있다. 운동회를 통해 여러 민족 상호 간에 이해와 단결을 증강시키고, 전 향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나라의 효자, 백성이 효자, 가정의 효자

김창길 향장은 이와 같은 일들을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그는 신발향에 와서 사업하며 “전에 나는 법원에서 법률이란 천평의 공정을 위해 사업했고, 신발향에 와서는 신발 백성들의 행복을 위해 사업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일하느라 바쁠 때, 그는 하루에 한 끼밖에 먹지 못하고, 사나흘씩이나 잠도 못 잘 때도 있었다. 촌에 내려가 사업할 때는 1주일씩 집에 못 가기도 하였다.

기실 그의 집은 촌에서 10여 리밖에 안 떨어져 있지만, 재해가 들 때면 그는 맨 앞장에 서서 제일 위험한 전선에 나서 간부들을 조직하여 군중들과 함께 재해 구제에 뛰어들었다. 화재가 났을 때, 그는 자기 몸도 아랑곳하지 않고, 용감히 나서 개인의 안전을 마다하지 않고 향 간부들과 함께 불을 끄기도 했다.

김창길 향장은 외상으로 인해 요추간판 돌출과 골질 증생에 걸렸다. 어떤 때 병이 도질 때는 허리가 아파 절뚝거리면서도 사업 일터에 나서곤 했다. 지어촌에 내려가 사업할 때는 군중들 집에 들어가 점적(点滴) 정맥주사를 맞으며 사업에 임했다.

그는 사업을 부지런히 할 뿐만 아니라 집에서는 효자이다. 그는 막내아들이지만, 제대 후 줄곧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 부모가 늙어 병이 잦아지자, 집에서 쉴 때면 옷을 빨아주고 밥을 짓는 등 가정일도 마다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혈압을 재고 경맥 주사를 놓고 안마 호리하는 기술을 배워 부모에게 효성을 다했다.

부친이 여러 달 동안 앓아누워 일어나지 못했을 때는 밥을 먹이고 약을 먹였으며, 대소변도 받아냈다. 부친이 위급할 때도 그는 하루라도 사업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가 세상을 뜰 때 그는 곁에 없었다. 그때 그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의 후사를 다 처리하고 난 뒤에도 온갖 마음을 사업에 바쳤다.

그에게는 남을 감동시킨 일화도 많다. 그는 토요일, 일요일 쉴 날이 없이 하루 3~5시간밖에 취침하지 못하며 부지런히 일했다. 그는 사업에 집중하는 열의로 지도 간부와 동료들을 감동시켰으며, 자기의 언행으로 한 민족 간부와 공산당원의 낙언을 지켰다. 그것은 바로 백성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하고 좋은 일을 하며 어려운 일을 풀어주는 것을 사업의 출발점으로 삼았기 때에 가능했다.

내몽골 우란호트 조선족 소학교

내몽골우란호트시(烏蘭浩特市)에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나란히 2개 있다. 내몽골흥안(興安)맹의 행정 중심도시인 우란호트시의 인구는 약 29만 명이다. 그 중 한인[조선족]이 1만 명 정도인데, 내몽골자치구에 사는 한인[조선족]의 절반이 이 우란호트시에 모여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우란호트 조선족 소학교(烏蘭浩特市朝鮮族小學校)이다.

조선족 소학교 하나쯤은 있을 법도 하지만, 10개의 학급에 270여 명의 조선족 학생들이 한글로 공부한다는 사실은 새롭다. 1957년에 처음 세워진 이 학교는 2명의 교사에 10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되어, 폐교와 병합의 과정을 거친 역사만 보아도 그 우여곡절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2004년도에 부임한 후 지금까지 이 소학교를 이끌어 온 도련화(都蓮花) 교장은 최근 학교 홈페이지(http://wulanchaoxiao.com)도 세련되게 꾸미고, 내몽골자치구에서 한인[조선족] 어린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애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학교 홈페이지가 한국서울의 여느 학교에 비해 손색이 없다는 점이다. 학급 이름도 개미반, 귀염둥이반, 꽃사슴반처럼 중국 소학교에 비하면 예사롭지 않다. 게시글이나 댓글을 둘러보아도 현대 한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놀랍기만 하다.

우란호트 조선족 소학교는 한국의 경상북도 구미시야은 초등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고 홈페이지를 통해 학생과 교사 간의 온라인 우의를 다지고 있어 더욱 눈길을 끈다. 구미야은 초등학교 교사들은 조선족 소학교 학생들에게 전통 놀이나 문화, 개방 학습 교습법 등을 전파하고 있다. 그러나 소학교는 지난 2005년도에 예산 부족으로 폐교 위기까지 봉착했었다. 난방비가 없어 한겨울에도 벌벌 떨면서 수업을 진행했고, 교사들 역시 월급 한 푼 못 받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우란호트 조선족 소학교는 1970년 이전까지 몽골 소학교에 합병되거나 폐교되는 수난을 거쳐 1984년 9월 새로 문을 열었다. 한족 학교로 전환될 위기에서도 내몽골에서 민족 교육의 불씨를 지피려는 도련화 교장의 끈질긴 노력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2005년 폐교 직전에 처한 사실을 호소하는 도련화 교장의 딱한 소식이 『연합 뉴스』를 통해 알려지면서 각지에서 '학교 살리기' 도움의 손길이 전해졌고,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한국의 '재외 동포 재단'이나 만리 장성 동호회와 같은 단체들이 비품 기증 등의 크고 작은 도움들을 주고 있으나, 여전히 지원의 손길이 부족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나 한국 정부 차원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칭기즈칸의 땅이자 유목민들의 터전인 내몽골자치구에 이처럼 한민족의 삶과 문화, 그리고 동심의 꿈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 하나로도 억센 풀뿌리와도 같은 한민족의 강인한 의지가 느껴진다.

오랜 세월 소외되었던 땅 중국 동북부의 경계지역 내몽골! 천혜의 자연 관광 자원을 가진 이곳은 지금 세계 최대의 희소금속 매장 지역이자 양질의 풍력 발전 보고로 급부상하고 있다. 거기에 우리의 민족혼이 타오르고 있다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다.

참고문헌
  • 박명화, 「내몽골 초원에 민족 문화 꽃 피운 신발향」(『길림 신문』, 2009. 12. 2)
  • 巴特尔,「传承和发展阿荣旗朝鲜族文化面临的困难和建议」(『中国乡村发现网』, 2009. 10. 30)
  • 『뉴스 타운』(2010. 5. 21)
  • 우란호트 조선족 소학교(http://wulanchaoxiao.com)
  • 다큐 「조선의 아이들 대초원에 서다」(2007. 8. 15. 방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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