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農業의 先進 일꾼, 벼栽培 專門家 權雲龍과 崔竹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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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오상시 |
| 시대 | 현대/현대 |
| 인물 | 농업 전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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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죽송 선생과 권운룡 선생은 중국 동북 지역 벼농사 재배 보급과 기술 향상에 커다란 공헌을 기여하였으며,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가장 손꼽히는 벼 재배 전문가들이다.
전국 농업 노력 모범이며 저명한 농민 벼재배 전문가인 최죽송은 지난 세기 5, 60년대에 연길시 장백향 신풍촌의 책임자로 있으면서 뛰어난 벼재배 연구 성과로 인하여 중국 북방지역 벼재배 사업에 큰 기여를 했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크게 이름났던 한인[조선족] 출신 전문가이다.
최근 기자는 지난 세기 70년대 연길시 장백향 신풍촌에서 당서기 사업을 하면서 최죽송 선생과 함께 사업한 적이 있는 엄문각 선생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있던 최죽송 선생의 이야기들을 취재했다.
최죽송은 1915년 12월 10일 조선함경북도 무산군의 한 농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최죽송은 어려서 마을의 서당에서 간단하게 소학교 정도의 글을 깨쳤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고 호기심이 많고 사고를 즐겼으며 15세를 넘어서자 각별히 농사에 열중하여 어지간한 일은 막힘이 없었다. 그리고 특별히 진취심이 강하고 일을 시작하면 꼭 끝을 보고야 마는 성미였다.
1940년대 초, 최죽송은 중국에 이주하여 전전하다가 1943년경에 연길시 신풍촌에 정착하게 되었다. 신풍촌에 정착한 후 자그마한 밭뙈기를 사서 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신풍촌의 벌판에는 사시사철 물이 고여 있고 냉기가 많아 벼농사에는 적합하지 않아 식량 부족이 심각했다. 그때부터 냉기가 많은 신풍벌에서 어떻게 하면 벼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최죽송의 고민이었다.
1948년 신풍촌에서도 토지개혁이 진행되어 최죽송 일가도 땅을 분배받게 되였다. 땅을 분배받은 기쁨을 안고 최죽송은 5호의 열사 유가족과 가난한 농가들을 묶어 '호조조'를 설립하고 벼농사를 위한 습지 개량을 시작했다. 우선 배수구를 빼서 땅의 냉기를 제거하고 석탄재와 자갈, 썩혀서 발효시킨 잡초를 밭에 내면서 농토개량에 들어갔다. 최죽송은 여러 세대 농가를 모아 '보량조'를 만들고 작은 실험 농지에서 먼저 벼 재배 기술을 실험하는 한편, 성공적인 경험은 널리 보급하는 방법으로 부단히 북방 실정에 맞는 벼 재배 기술을 모색했다. 이와 함께 최죽송의 '호조조'는 연길벌에서 제일 처음으로 벼 유지 온상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량을 처음으로 높였다.
1950년대 초 최죽송은 북한의 “신발모 농법”이 벼 생산량을 높일 수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자진하여 과감히 “신발모 농법”을 받아들였다. 그해 최죽송은 새발모 농법을 도입하여 매 ㏊당 8,000㎏의 높은 수확량을 거두었다. 당시 생산 조건이 악렬한 농업 환경에서 높은 소출을 올린다는 것은 진정 기적이 아닐 수 없었다. 소문은 연변은 물론 전국에까지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1952년 3월 중앙 인민 정부 농업부에서는 최죽송을 “전국풍산모범”으로 표창하고 그의 “신발모 농법”을 전국에 보급하고 책으로 출판하기도 하였다.
“신발모농법”은 최죽송에게 벼농사에 대한 자신심과 용기, 그리고 야망을 키워주었고 과학 탐구의 길로 이끌었다. 마침 50년대 농촌 토지 경영은 각 가정을 단위로 하던 방식에서 호조조, 초급 합작사, 고급 합작사, 인민공사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었다. 토지 집단 경영 방식은 한번 크게 해보려는 최죽송에게 보다 넓은 활동 무대를 제공했다.
당시의 역사적 환경에서 최죽송이 벼 재배에 고심했던 것은 단지 알곡 생산량을 높여 국가에 한 알의 알곡이라도 더 많이 바쳐 국가 건설을 지원하겠다는 소박하지만 고상한 염원뿐이었다고 엄문각 선생은 감회에 젖어 말했다.
당시 최죽송은 마을의 노동력을 동원하여 해마다 크고 작은 배수구 2,700여m나 팠다. 또 연길시의 석탄재는 거의 전담하다시피 등짐으로 지고와 밭에 냈고 마을 청년들을 동원해 연길시로 가서 오줌과 인분을 받아와 밭에 내기도 했다. 여러 가지 조치를 대여 밭의 냉기를 빼주고 과학적인 영농법을 도입하니 농사가 잘되기 시작했다. 최죽송은 토지 개량과 함께 수전 원전화 작업에 있어서 늪지대와 구덩이를 메꾸고 둔덕은 허물면서 신풍촌의 80%나 되는 면적의 밭을 원전화로 만드느라 숱한 고생을 했다. 촌민들도 항상 자기를 잊고 집체와 국가 이익부터 생각하는 최죽송의 영향을 받아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건설 사업에 잘 호응해 나섰다.
최죽송은 매사에 깐지고 세심하였다. 그는 실천 가운데서 50년대 말기에 벌써 벼생산량을 예측하는 계산 방법을 탐색해 내였다. 벼 한 이삭에 달리는 벼 알을 훑어 밥상에 놓고 한 알 한 알씩 세여 한 이삭에 열리는 알 수를 계산하고 벼 한 포기가 분얼하는 대수를 계산하여 한 포기당 생산량을 계산하고, 나아가 한 평방미터의 포기 수와 매 ㏊의 벼 포기 수를 계산하여 1㏊의 생산량을 계산하는 자기만의 독특한 계산법을 내놓았다. 이 계산법에 따르면, 벼 1㏊에 1.5만㎏의 수확량이 나오고 논두렁 면적과 기타 가능성 손실을 제하면 ㏊ 당 1만㎏의 생산량을 낼 수 있다는 근거가 나왔다.
종자의 순도와 성능을 보장하기 위하여 최죽송은 한개 벼 품종을 실험 전에서 3년 이상의 실험과 배육을 거친 후에야 대전에 보급하였다. 수년간의 끈질긴 탐구와 실천을 통해 지방에 맞는 20여 가지 벼 품종을 배육하고 인입하여 전 촌에 우량종화를 실현하였다. 최죽송은 종자 순도를 95% 이상 높이어 국가에 백여만 근에 달하는 우량종을 바쳤다.
최죽송은 몇 년간의 과학 연구와 실천을 통해 벼 재배에서의 토양, 농가 비료, 조기 벼 모내기, 합리적인 밀식, 말리기, 심수, 온수 등 관개법에 대한 경험을 종합했다. 1948년부터 벼 재배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1951년에는 무당 벼 수확고 350㎏을 넘어서 길림성 정부로부터 “특등 록례 모범”으로, 중앙 정부로부터 “전국 농업 록례 모범” 칭호를 수여 받았다. 1955년에는 무당 벼 소출량을 400㎏로 늘리고 1960년에는 무당 소출을 513㎏까지 높였다. 1963년에는 무당 450㎏ 벼 고산충 재배 기술과 경험을 종합하였으며, 1970년부터 북방 벼 재배 지역에서 저온 냉해를 전승하여 벼의 안정된 생산을 위한 기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1973년에는 소주에서 열린 전국 벼 재배 회의에서 처음으로 냉해 전승에 관한 문제를 제기하여 회의 참가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상기한 벼 재배 기술과 경험이 북방의 13개 성, 시에 보급되도록 이끌었다.
1956년 인민일보는 북방에서 누가 벼를 재배할 수 없다 했는가라는 제목의 사론을 발표하고 최죽송의 벼재배 증산 기술과 경험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이때로부터 최죽송의 벼재배 기술과 경험은 북방 벼 재배 체계로 되였으며 북방 벼 재배 지구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게 되었다.
1962년 중앙에서는 최죽송의 벼재배에서의 돌출한 기여와 성과로 그에게 '국가 과학연구 2등상'을 수여하였다. 그리고 중앙농업부에서는 그를 중국농업과학원 특약연구원, 중국길림성농업과학 특약연구원으로 초빙하고 『중국 벼재배』 잡지 편집사업에 참가시켰다.
1964년도에 있은 전국농업회의에서 당시 국무원 총리 주은래는 “중국의 남방에는 벼재배 전문가 진영강이 있고 북방에는 벼재배 전문가 최죽송이 있다”고 높이 평가한 적이 있다. 이때로부터 중국에는 벼재배 전문가를 평함에 있어서 “남진북최(南陳北崔)”라는 말이 생겨났으며 최죽송은 중국 한인[조선족]의 자랑과 긍지로 남아 있다.
엄문각 서기의 회고에 근거하면 당시 최죽송의 벼재배 기술과 경험은 중국 북방의 13개 성, 시에 널리 보급되였을 뿐만 아니라 당지기후와 비슷한 일본의 홋카이도에도 알려져 일본의 농업고찰대표단도 수차 신풍촌에 와서 경험을 학습해 갔다.
1965년 10월 20일, 북경에서 전국 공업, 농업 노력모범대표대회가 열렸다. 최죽송은 전국 노력모범 일원으로 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 주은래, 주덕 등 최고 지도자들의 접견을 받는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최죽송은 과학연구와 사업에서 수많은 영광과 영예를 따냈지만 언제나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였으며 사리를 따지지 않고 대공무사(大公無私)하였다. 당시 최죽송의 슬하에는 여러명의 자식들이 있어 가정형편도 넉넉하지 못하였다. 그의 살림집은 두 세간집이 한집처럼 연접된 40여 ㎡에 달하는 작은 초가집이어서 여섯 식구가 비좁게 생활하였다. 최죽송은 촌의 원전화의 수요로 농가를 이주시키게 되자 자기 집의 절반을 촌민에게 주어 들게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주은래 총리가 1962년도에 신풍촌에 와서 최죽송을 찾았을 때 최죽송은 부득불 마을의 다른 집에서 주은래 총리를 영접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해 중앙에서는 최죽송 개인에게 6천원의 상금을 포상하였다. 하지만 그는 상금 6,000원을 한푼도 다치지 않고 신풍촌 소학교 교사를 짓는데 썼다. 또 한 번은 상금을 받은 후 북경에서 여러 가지 악기를 사서 촌 문화실을 꾸림으로써 마을청년들의 문예활동이 활발히 진행되게 하였다. 그 덕에 신풍촌 문예선전대는 주시급 문예경연에서 번마다 우승을 차지하였다.
60년대 초 신풍촌에 생활 체험하러 내려왔던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은 신풍촌 청년들이 군악대를 무어 정률성의 작품을 연주하는 것을 보고 크게 감탄하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당시 신풍촌은 전국적으로도 소문난 전형적인 농촌선진마을로 국내의 유명한 문화인들은 물론 일본, 미국 등 허다한 해외손님들도 참관하러 찾아오곤 했다.
1966년 전례 없는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신풍촌의 최죽송도 무사할 리 없었다. 그는 “주자파”에 “가짜 노력모범”이라는 감투를 쓰고 억울하게 비판을 받았으며 자동차에 실려 시내를 돌며 조리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살림집 유리창문이 부서져 온 식솔이 헌 천조각과 비닐주머니로 얼어붙는 찬바람을 막고 겨울을 보내기도 했다. 그 억울한 나날에 최죽송은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극도로 지쳤지만, 실험 전의 일만은 시종 손을 떠나지 않았다.
1972년 5월 2일, 그날도 최죽송은 아침 일찍 소를 몰아 모판의 번지를 치다 갑자기 신경성 고혈압으로 인한 뇌출혈로 일하던 그대로 논판에 쓰러졌다. 촌에서는 다급히 최죽송을 의료시설이 좋은 지방 부대 병원으로 호송하였다. 부대 병원에서 1년 넘게 치료를 받고 사선에서 헤매던 최죽송은 1973년 10월 3일 장춘병원에 옮겨졌다가 사흘 만에 58세의 아까운 나이로 너무도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
그로부터 40여 년 세월은 빨리도 흘렀다. 상전벽해라고 할까? 그동안 중국의 농업과학기술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오늘날 연변의 벼농사는 초보적으로 현대화를 실현하였고 벼 ha 수확고도 1만㎏을 넘기고 있다. 이 같은 성과는 최죽송과 같은 농업선구자들의 어제 날의 피타는 노력탐구와 갈라놓을 수 없다.
뛰어난 벼재배 성과로 전국에 널리 소문 높던 최죽송과 그가 평생의 심혈과 정성을 기울였던 연길시 신풍촌의 문전옥답들도 이젠 도시화의 거세찬 물결 속에서 온데 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엄문각 서기는 세월이 흘러 사람과 마을은 사라질 수 있지만 최죽송 선생이 남겨놓은 자랑찬 민족의 역사를 결코 망각하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로 최죽송과 같은 민족의 걸출한 인물들의 향상 발전하는 우수한 민족정신과 분투의 발자취들은 영원히 민족의 자랑과 긍지로 후세들을 고무 격려하는 기념비로 남겨져야 하기 때문이다.
권운룡 선생은 1944년 흑룡강성 오상현에 태어났으며, 길림성연변농학원을 졸업한 후, 지금까지 벼 재배 기술 개발, 시험 및 보급 등을 연구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중국 동북지역 벼재배 기술 향상에 대하여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982-1985년 사이에 흑룡강성오상시정부, 흑룡강성 송화강지구 과학기술위원회, 흑룡강성 농축목업청, 중국임업과학연구원은 권운룡 선생에게 벼 신기술 보급 2등상, 과학기술 보급 3등상, 기술진보 3등상 및 2등상, "벼 종합 생산확대 기술 풍작상"" 2등상, ABT보급 2등상, 선진사업일군, 노동모범, 대공 등 27차의 영예 및 칭호를 수여받았다.
권운룡선생은 오상시의 평범한 기술직원이지만, 그가 농업기술의 연구에 남다른 집착을 갖고 있다. 흑룡강성 오상시 민락향의 작은 벼농사재배역사전시관에 민락향농민들의 수전과 관련한 모든 물품을 집결하여 한폭의 민락향수전역사풍경화를 그려 놓았다.
전시관의 한 귀퉁이에 수십권의 황색노트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노트를 살펴보니, 기상일기를 적은 노트였다. 기온, 수온, 토양온도, 파종시간, 해충작업 등 관련 기록들이 빼곡이 적혀있었다. 노트의 가운데 농업기술관련 신문자료들이 붙여져 있고, 그 아래에 날자도 적혀있었다.
수십권의 노트를 이렇게 열심히 적자면 수십년간 꾸준히 노력한 피와 땀의 흔적들이 보일 수 있다. 누가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노트를 적었는가 궁굼하였는데, 마침 옆에 있는 민락향 발전촉진위원회 회장은 이 노트의 주인이 바로 유명한 권병운선생님이라고 소개하였다.
이 노트는 1977-2007년까지 30여 년간 민락향의 수전사가 기록되어 있기에 존경심이 스스로 부풀어 올랐다. 최근에 민락향 향사를 편찬하고 있는데 여전히 이 가운데 주요 집필진과 자료는 권운룡선생이 한몫하고 있다.
작년 여름에 만났을 때 이미 72세 고령이었지만, 매우 건강하였고 중국술 반병쯤은 그냥 마실 수 있었다. 흰 적삼에 회색바지를 입고 나오셨고, 백발은 성성하였다. 키는 매우 훤칠하고 중국어도 유창하였다. 권선생한테서 민락향수전발전사란 미출판 복사물을 받았는데 중국어로 작성되었다.
민락향 수전발전사를 받아서 그날 저녁에 단숨에 읽어보았다. 토양, 기후, 벼의 종류, 파종기간 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민락향의 인구구성, 남녀비례, 노동력이동, 등 민족학연구에 필요한 데이터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것만 보아도 권룡운 선생의 지식구조와 향촌발전사 작성방식은 남달랐고, 과학적인 조사 자료에 근거하여 하나하나 도출하는 매우 엄격하고 치밀하게 일하는 분이라는 것을 판단할 수 있었다.
이튿날에 다시 민락향에 찾아 뵙는데, 마침 민락향조선족크라켓 시합이 있었다. 대부분 노인들이 참석하였고, 제일 젊은 성년이 45세였다. 민락향의 대부분 청장년은 한국과 중국의 연해도시로 떠났고, 마을을 지키는 사람은 권선생님과 같은 노인분들이 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서 경기팀들의 성적을 접고 합산하는데, 모두 회계에 익숙한 권선생을 모시고 시합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경기를 보면서, 한편으로 저한테 민락향의 발전사를 들려줬다.
지금 민락향은 한인[조선족]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지만, 15년 전만 하여도 민락향의 한인[조선족]들은 전국에서 유명한 ‘민락쌀’로 그 위풍을 전국에 알리였고, 한인[조선족]의 위상을 높였는데, 지금은 한족들이 농사짓고 있고, 가공과 유통이 한족기업들이 하니, 이윤의 높은 부분은 한족기업가들이 가져가고 있다.
우리가 몇 십년간 개발하고 만들어 놓은 터전인데, 지금 젊은 친구들이 일시적인 돈벌이로 한국, 연해도시로 떠났는데, 많이 아쉽고 서운함의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권룡운선생은 1977년에 민락향 농업기술전파기술자로 파견되었는데, 그때만 하여도 말은 농업기술자였지, 농사도 잘 지을 줄 몰랐다고 하였다. 2.3년간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농업생산량을 높이는데 한계가 있자, 그는 큰 결심을 내리고 1983년에 연변농학원 야간반에서 5년간 공부를 하면서 학사학위를 받았다.
이 5년 동안 여러 종류의 벼종자, 여러 지역의 토양, 기온에 대하여 비교를 할 수 있었고, 수전에 중요한 모의 재배, 물의 온도와 양, 모의 간격과 포기수 등등을 열심히 연구하면서 전문가로 거듭나게 되었다.
하지만, 제일 자연환경에 의하여 하늘에 의거한 원초적인 산업인 농업의 생산량 제고는 쉽지만 않았다. 그는 여러 가지 선진기술을 접목하였지만, 몇 번이나 패배로 끝났다. 그는 그의 형, 가족,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서 몇 년간 실험 전에서 각종 실험을 한 끝에 병충해를 이겨내면서 생산량이 높은 재배 기술을 발명하였다.
그는 특별한 영양액을 발명하였는데, 수전에 영양액을 넣어서 고르게 배분하면 자라난 벼들은 신기하게 병충해를 받지 않고, 입쌀의 맛이 훨씬 좋아지고, 생산량도 증산되었다. 이런 발명은 그의 꾸준히 노력하고 포기할 줄 모르는 과학 정신을 갖고 노력한 결과이다.
다른 분들은 권선생님 대단하십니다. 하고 칭찬을 하지만, 권선생은 매우 겸손하게 사실 이는 내가 처음으로 발명한 것이 아니고, 몇 년 전에 외국 전문가가 와서 강의를 하였고, 이런 여양액의 효험이 있다는 데서 힌트를 받아서 제가 실천한 것뿐 이라고 얘기하였다.
권룡운선생은 민락향에서 제1기술자이지만, 항상 겸손하였고, 현지 농민들의 이익을 생각하시고, 좋은 기술이 있으면 혼자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2002년에는 영농과학기술협회를 만들어서 자신이 쌓은 경험과 노하우를 열심히 보급하면서 농업의 증산과 농민들이 더 잘 살 수 있는 공동부유의 길로 인도하는 기술 지도자로 손색이 없는 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