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심양에서 피어 난 길경갑 회장의 심양 현상

한자 瀋陽에서 피어 난 吉京甲 會長의 瀋陽 現象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요령성 심양시  
시대 현대/현대
심양 현상이란

심양 현상이 나타나면서 한인[조선족] 인구의 도시에로의 대이동과 출국행에 따른 인구 급감, 민족 학교의 폐교, 조선족촌 공동화 등 역사적 진통기를 겪고 있는 전반 한인[조선족] 사회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으면서 강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심양 현상 신드롬의 주역은 이 시기에 설립된 심양시 조선족 기업가 협회와 협회 회장직을 맡은 길경갑 회장이다.

길경갑 회장, 화신그룹회장으로서 개혁에 앞장서서

1986년 10월, 월남 자위 반격전에 참가하고 복원한 길경갑은 고향인 화평 대대(화신그룹 전신)에 돌아와 공청단 서기를 맡았다. 얼마 후 촌영 기업인 심양 액압 물자공사 경리로 임명되어 기업인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대대 지도부에서는 그를 심양시 당학교에 파견, 3년간 당학교 학습을 끝낸 그는 돌아와서 화신 그룹 당총지 부서기로 발탁된다. 이 기간 그는 북릉향 인민 대표, 우홍구 정협 위원으로 당선되고 우홍구 우수 로동자, 우홍구 우수 당원으로 표창받았다.

1999년 4월, 그동안 쌓은 성과로 하여 30대의 젊은 나이에 그는 화신그룹 당총지 서기 겸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동안 화신 그룹은 소농 경제의 농업 생산대로부터 58개의 기업을 소유한 기업 그룹으로 발전했지만 산재한 문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그룹 소유의 농경지가 부당하게 팔려나갔고 촌기업이 많다 하나 촌민 생활에는 질적인 변화가 없었다. 그는 우선 부당하게 팔려나간 농경지의 값을 돌려받는 데로부터 착수해 수백만 원의 자금을 회수한데서 촌영 경제 발전에 기반을 마련했다. 대다수 촌민들은 그에게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대신 일부 사람들한테서 인심을 잃기도 했다. 여태까지 그는 대다수 촌민들의 지지만 있으면 무사태평인줄로 알고 일을 추진했었다. 대가 바르고 재력이 있고 입김이 센 사람들을 묶어세워야 했다. 그는 기업인들을 찾아 나섰다. 자기를 가장 반대하는 기업인부터 찾아가 애로사항을 해결해주면서 진정을 보여주자 기업인들이 하나둘씩 뭉치기 시작했다. 힘있는 지지 세력이 형성되자 사업이 척척 진척되었다. 관할범위 내에 있는 커다란 소택지를 메우고 거기에 그룹 청사를 짓고 촌민들을 위한 아파트 단지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모두들 미친놈의 짓이라고 했지만 결국 성공했다. 또 중국 동북 최대의 폐강재 교역 시장을 건설하고 중국 정부의 지지하에 심양 지역 곳곳에 널려있던 폐강재 시장을 통합했다.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자 촌민들에게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했고 강재 시장에서 나오는 수입을 촌민들의 복리를 해결하는데 돌렸다. 화신 그룹은 그때부터 60세 이상 노인들에게 달마다 경로금을 지급하였는데 당시 전국적으로 이런 노인 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촌은 몇 개에 지나지 않았다.

노인 사업뿐만 아니라 여성 사업, 후대 관심 사업 등 복지 사업이 주거 환경 변화와 함께 줄기차게 진척되었다. 화신 그룹은 더는 이전의 화평 대대가 아닌 명실상부한 기업 그룹으로 성장했다. 처음에 그를 반대하고 불신하던 사람들도 그에게 손을 들어주었다. 그는 촌영 경제 체제 전환에 발맞추어 집체 기업을 사영 기업에로 전환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집체 기업이여서인지 기업이 커질수록 기업주가 살찌는 대신 그룹은 여위고 촌민들에게 돌려지는 이득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집체 기업을 사영기업으로 개편하려 하자 다년간 집체라는 큰 산에 업혀 이득을 챙겨왔던 기업주들은 한결같이 반기를 들었다. 아직 기업 체제 개혁의 진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이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나서서 모범을 보여주어야 했다. 여러 날의 고민끝에 길경갑은 자신이 솔선하기로 했다.

사영 기업가로 새출발

2004년 초, 그는 결연히 사직을 제출했다. 촌민들이 말리고 향정부에서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결심은 단호했다. 마침내 2004년 8월, 그는 화신 그룹 이사장 겸 당총지 서기직을 사직한 뒤 심양굉달(宏達) 무역 회사를 만들고 대외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회사는 눈덩이 굴리듯 커져 불과 반 년 만에 산하에 무역, 건자재, 디지털, 환보, 건축자재, IT, 실리콘 등 계열사를 가진 기원 그룹으로 성장했고 연간 매출액은 650만 달러에 달했다. 그의 성공은 화신그룹 기업인들에게 모범이 되여 불과 2년 내에 그룹 내 50여 개 기업이 전부 사영화로 전환했다. 소속 기업들의 기업성격전환은 화신그룹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켰고 촌민들의 수익도 안정적으로 발전되게 했다. 같은 해 한인[조선족] 기업들의 친목과 화합을 취지로 한 심양시 조선족 기업가협회가 설립되었고 길경갑은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심양시 조선족 기업가 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 그의 사유는 화신 그룹을 넘어 전반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해 고심하는 데로 비약한다.

심양 현상의 탄생

이때부터 그는 더는 한 개 민영 기업의 지배인만은 아니었다.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조직하는 각종 대형 행사들의 자금 문제를 해결해야 했고 여러 한인[조선족] 단체와 조선족 학교들의 경비난에도 고심해야 했다. 한편 한인[조선족] 기업인들이 경영 과정에서 부딪친 애로사항들도 그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업가 협회는 심양시 조선족 연의회에서 조직하는 심양시 조선족 민속절, 6.1 북릉 유원회, 조선족 예술절 등 행사들과 노인 협회, 부녀 협회, 문학회 등 민간 단체들의 행사들, 여러 조선족 학교의 행사에 해마다 근 80여 만원을 후원했는데 그중 약 30여 만 원은 길경갑 자신이 부담했다.

한번은 그의 사무실에 심양시 노인 협회 회원들이 찾아와서 노인활동이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노인들의 사정이야기를 들은 그는 당장에서 1년 활동 경비로 5만원을 내놓을 것을 약속했다. 그 후부터 노인협회에는 해마다 기업가 협회로부터 5만원의 활동경비가 어김없이 지원되고 있다. 매년 교사절에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 교원 1,00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기념 행사를 갖는데 이 역시 기업가협회의 자금 후원으로 이뤄지고 있으며 요령 지역 한인[조선족] 작가와 문학도들로 구성된 심양시 조선족 문학회도 해마다 기업가 협회의 지원으로 여러 가지 행사들을 벌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 기업인들은 길경갑 회장의 인솔하에 심양 현상이라는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기업과 문화, 기업과 사회의 공존을 도모해왔고 또 현지 한인[조선족] 사회와 한국인 사회의 공동 발전을 위한 진로를 모색하면서 그 모범을 보여주었다. 심양 현상의 의의는 단순히 기업인들이 기타 민간 단체나 개인에게 자금적인 원조를 준다는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심양지역 한인[조선족] 사회 각계가 화합과 공생, 공동 발전을 전제로 서로 뭉치고 단결하여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범이고 실천이었다.

모국과의 상생의 장 마련

항중 수교가 이루어지면서 심양 지역에도 많은 한국인들이 상주하고 있다. 그동안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들과 한국인들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단체 교류가 매우 빈약했다. 심양시 조선족 기업가 협회가 설립되고 재심양 한국인회가 비슷한 시기 조직 체계가 정비되면서 기업가 협회는 한인회와 상호 대화의 물꼬를 틔웠으며 이를 계기로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들과 한국인들 간의 교류가 보물 터진 듯 활발하게 이뤄지기 시작했다.

2008년 월드옥타 심양지회 회장직을 맡은 길경갑은 당해 회원사 성원들을 이끌고 글로벌 시장 진출의 행보를 시작했다. 현재 월드옥타 심양지회는 회원수가 80여 명으로 늘어나 서울에서 해마다 갖는 본회의 정기 총회에 참가자가 가장 많은 지회로 되였고 따라서 한인[조선족] 기업인들의 지위와 위상도 날로 부각되고 있다. 월드옥타 심양지회는 2008년 말 심양 한인회와 함께 처음으로 되는 심양 한민족 경제 포럼을 시작으로 제2차 한민족 경제 포럼, 중국 동북 3성 한민족 경제 포럼을 개최했으며 2009년 여름에는 심양 한인회와 공동으로 국내 최초로 되는 한국 KBS 전국 노래 자랑과 2010년 7월의 중국 글로벌 한상 대회 및 한국 KBS 열린 음악회 등 굵직한 행사들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여 지역 사회 홍보는 물론 주류 사회에서 민족 기업인들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당해 7월 글로벌 한상 대회 때 개최한 월드옥타 총회는 심양시를 포함한 요령성을 세계지역의 월드옥타 회원들에게 홍보하였고 중국 동북 3성에 대한 투자 유치 정보를 그들에게 제공함으로써 회원들 간 글로벌 네트워크구축 및 경제 교류 활성화에 기여하였다.

2011년 초 길경갑은 7년간 노심초사하며 키워온 심양시 기업가 협회 회장직과 3년간 수행한 월드옥타 심양지회 회장직을 동시에 사직하고 두 협회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버거운 짐을 벗어버린 그는 홀가분한 몸이었지만 사회에 대한 책임감은 여전했다. 그는 당과 정부가 요구하는 조화로운 사회는 어느 한 집단의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땅히 전 사회의 힘이 동원되어 함께 만들어가는 사회가 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그는 심양시 한인[조선족] 사회 기금을 설립하여 노인, 여성, 청년, 문화 예술인 단체와 학교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정규적인 지원을 해나가야 한다고 호소하고 그 실천에 앞장서고 있다.

‘심양 현상’으로 중국 동포 사회 화합의 상생 모델 개척

“가능하다면 대통령 표창도 한번 받아보고 싶습니다.” 조선족 최초로 한국 국무총리 표창을 받은 길경갑세계 한인 무역 협회 부이사장의 말이다.

길경갑 부이사장은 지난 12년 동안 기업인들과 함께 심양 지역 한인[조선족] 사회를 리드하면서 동포사회 차세대 육성과 경제계, 문화계, 예술계, 교육계 등 각 분야별 사업 지원으로 동포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2009년 KBS 노래 자랑, 2010년 열린 음악회의 심양 지역 유치에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심양 한국인 사회와 한인[조선족] 사회간 화합 분위기를 조성하여 ‘심양 현상’이라는 신드롬 신조어를 탄생시킨 인물로 현지에서 평가되고 있다.

그 뿐 아니다. 모국에서조차 잊혀져가는 항일 독립 역사를 바로세우는 일에도 앞장서, 항일 독립 투사 양세봉 장군 기념 사업도 주관함으로써 한민족 정체성 확립에 크게 기여했다. 이 점을 인정받아 10월 5일 세계 한인의 날에 앞서 국무총리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10월 19일 주심양 한국 총영사관에서 조백상 총영사로부터 국무총리 표창 상장을 건네받은 길경갑 부이사장은 “개인의 영광임에는 틀림없지만 한사람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이루어낼 순 없다. 심양 동포 사회의 발전과 한중 친선에 공헌한 모든 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개인도 욕심이 있기 마련인데 동포 사회에 이 같은 상을 더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다”고 말했다.

길경갑 부이사장은 ‘심양 현상’의 중심이다. 이는 원래 한인[조선족] 사회에서 ‘문기 결합’의 대명사로 알려졌지만 현재는 한인[조선족] 사회와 한국인 사회의 조화로운 결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충분한 준비 없이 중국에 진출, 한인[조선족]을 파트너로 삼았던 한국인 상당수가 사업에 실패한 뒤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면서 생긴 오해와 갈등을 차츰 풀어나가기 위해 길 부이사장을 비롯한 한인[조선족] 기업인들이 한인회를 방문하기 시작하고 한인회가 주최하는 체육 대회 등 행사에 적극 후원하는 등 협력 관계를 구축하는 노력을 해왔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양 협회간 회원들끼리도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며 화합의 계기를 만들어 냈다.

당시 세계 한인 무역 협회 심양 지회장이자 심양시 조선족 기업가 협회 회장이었던 길경갑 부이사장은 한인회의 KBS 노래 자랑 대회 유치를 도와 30만 위안의 등록금을 선뜻 후원했고 글로벌 한상 대회 때에도 기업가 협회에서 내빈 300명을 초대했다. 특히 KBS 노래 자랑은 4만명이 몰려들어 탄생 30년 이래 최대 규모를 자랑했다.

“유치 당시 주위에서 걱정하는 분위기였지만 한인 사회를 꼭 도와주고 싶었다. 큰 일을 하는데 모험이 따라가기 마련이다. 당시 자금을 들여 유치못해도 시도하지 않으면 더 불가능하다는 생각으로 움직였는데 성공적으로 유치했을 뿐 아니라 광고 등 홍보 경로를 활용해 다행히도 손실은 없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심양 동포 사회의 최대 행사를 한인회와 함께 준비하며 심양의 한인 사회에 큰 기여를 한 권유현 전 한인 회장과 의형제를 맺는 데까지 이르렀다.

“나는 털털한 성격이고 권 회장은 세심한 성격이라 많이 달랐지만 상호보완적이어서 일을 추진하는데 이점이 많았다. 예전에 한인[조선족]들이 한국 기업의 덕을 많이 보고 크게 성장한 사례가 많고 심지어 초월하는 기업도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우리도 이제는 한국인 사회를 도울 때가 됐다”고 심경을 전했다.

그가 화신 그룹 회장으로 있을 때 산하 58개 기업 중 한국 기업이 28개나 있었는데 이 점도 그의 말을 입증해주는 사례다.

조선족 사회의 위기, 교육이 희망이다

길경갑 부이사장은 중국 동포 사회의 핵심 사업은 교육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조선족 연의회 회장단 임원의 2/3를 교육 사업자들로 교체했다. 유아 교육부터 고등 교육 전체를 아우르는 교육자를 위한 교육상을 지정하여 조선족 교육 종사자들에게 교사로서 자긍심을 갖도록 동기 부여를 제공하여 교육 종사자들의 교권 회복과 민족 정체성을 살려줄 계획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교사절에 1천명 조선족 교사를 위해 문체 행사를 마련해주고 만찬을 개최하고 있다.

또 2년에 1회 개최되는 민속절을 내년에는 학교 위주로 개최할 예정이다. 예전에는 민속절이라 하면 말그대로 전부 노인들이었지만 앞으로는 학교의 참여도도 제고시킨다는 계획이다.

“많은 분들이 공들여 쉽지 않게 이루어진 심양 현상이니 이를 계승해 나가는 것이 사뭇 중요하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계획적이고 공식적인 발전 기반을 조성해 길경갑이란 사람이 있건 없건 이 사회는 줄곧 그렇게 가야 한다. 물론 어려움이 있겠지만 배려와 공공의 선을 위한 봉사 정신을 살려 힘을 뭉쳐야 한다”고 말했다.

참고문헌
  • 『한인 경제 네트 워크: OKTA-LOUNGE』,(세계 한인 무역 협회, 2013)
  • 「특별 기획-중국 조선족 기업(5)」: 길경갑 회장의 인생 도전」(『흑룡강 신문』 , 2011.7. 28)
  • 인터뷰(길경갑, 심양 기원 그룹 회장, 201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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