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세계를 구하려고 한 사나이 안중근

한자 世界를 求하려고 한 사나이 安重根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가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9년 9월 2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4년 11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9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4년 7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7년 8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7월경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3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9년 10월 26일
소재지 하얼빈역
장난꾸러기 어린 시절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아버지 안태훈과 어머니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안중근의 집안은 할아버지 안인수가 어업(청어잡이)과 쌀장사로 많은 재물을 모은 황해도에서도 대표적인 부자였다. 독립운동가 박은식과 더불어 황해도 신동으로 불린 안태훈은 과거 시험에 합격하어 진사가 되었다. 또한 박영효가 선발한 일본유학생 70여 명에 뽑혔다. 하지만 갑신정변으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게 됨으로써 안태훈의 일본 유학은 좌절되었다. 이처럼 안태훈은 개화파와 일정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도 안태훈의 영향을 받아 개화에 대해 부정적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안태훈 일가는 일본 유학 좌절과 어업의 실패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안중근 일가가 해주에서 청계동으로 이주한 것도 이러한 정치·경제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안중근은 청계동에서 사냥꾼들과 어울려 자주 산과 들로 사냥을 즐겼다. 서당에서 7, 8년간 한문을 익혔지만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부모님과 훈장, 그리고 친구들이 이를 문제 삼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안중근은 항우와 같은 무장이 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사실 안중근 가문에서는 5대조 할아버지 안기옥로부터 할아버지 안인수에 이르기까지 7명의 무과급제자가 나왔고, 큰 아버지 안태진이 해주부의 군사마라는 무관직에 있었다. 이러한 가문의 전통에서 자란 중근은 자연스럽게 군인이 되려는 꿈을 꾸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은 할아버지 안인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났다. 그의 사망은 안중근에게 큰 충격이었다. 안인수의 안중근에 대한 사랑은 그가 민족과 국가를 넘어 일류를 사랑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중근의 무인기질은 집권세력의 무능으로 일러난 동학농민군과의 충돌에서 발휘 되었다. 1894년 11월 원용일이 이끄는 2만 명의 동학농민군이 해주에 나타나자 해주부사가 안태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안중근도 정예병 70여 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70여 명의 병사로 2만이나 되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모두 포기하고 있을 때 안중근은 무인의 기질을 발휘하여 6명의 정탐 독립대를 이끌고 동학농민군의 지도부를 공격하여 동학을 해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경험은 1908년 의병의 국내진격작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안중근의 동학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그의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는 그의 계급적 한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안중근만의 한계가 아니라 시대적 한계라고 할 수 있다. 안중근과 같은 지식인들의 대체적인 동학관은 부정적이었다. 무엇보다 안태훈이 동학의 접주였던 김구를 보호해주었다는 점에서도 안중근 일가의 동학의 진압을 전적으로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다.

천주교 입교와 민족 의식의 성장

이 무렵 안중근은 친구 사귀기, 술 마시고 춤추기. 사냥하기, 말타기 네 가지를 즐겨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안중근에 일생 일대의 전환점이 된 사건은 천주교 입교였다. 안중근은 점차 민족 문제와 세계 평화 문제에 눈을 뜬 계기가 바로 천주교 입교였던 것이다.

안중근의 1897년 천주교 입교는 단순히 한 개인의 입교 문제를 넘어 한국 천주교의 토착화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안중근 이전의 한국 천주교는 민족문제 즉 외세에 대한 저항과 독립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여전히 한국 천주교는 구복 신앙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천주교사에서 안중근의 활동은 민족·국가와 종교를 일치시키는 토착화의 모범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아버지 안태훈의 영향으로 천주교에 입교하여 빌렘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안중근은 천주교 전교에 온 힘을 다 바쳤다. 안중근 집안의 노력으로 황해도 천주교 신자들은 급속히 늘어났다. 하지만 안태훈의 경우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서양 선교사를 통하여 이루려고 하였다. 그에 따른 부작용도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해서교안이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해서교안은 1903년 11월 해결되었지만 황해도 천주교 신자기 1/2로 급감할 정도로 천주교에 큰 타격을 주었다.

종교적 열정이 뜨거웠던 안중근이었지만 곧 빌렘 신부 등 서양 신부들과 마찰을 겪게 되었다. 그 주된 원인은 서양 신부들의 조선인에 대한 편견과 멸시에 있었다. 당시만 해도 서양 선교사들은 조선을 미개한 선교의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안중근이 이러한 서양 선교사들의 성향을 분명하게 깨달은 계기는 바로 1898년 뮈텔 주교와의 만남이었다. 이 때 안중근은 뮈텔에게 대학 설립을 건의하였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만일 학문이 있게 되면 하느님을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그런 말을 꺼내지마라.”는 황당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이 사건으로 안중근은 서양인의 제국주의 성향을 확실하게 간파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배우고 있던 프랑스어를 그만두면서 “한국이 세계에 위력을 떨치면 세계인이 한국어를 쓸 것”이라는 주체적 언어관을 드러냈다.

이러한 안중근은 김중환이 천주교 신자인 웅진군민의 돈 5천냥을 빼앗은 일과 해주부 지방대 병영 위관 한원교가 천주교 신자이자 친구인 이경주의 부인과 재산을 빼앗은 일을 해결하고자 전력을 다하였다.

학교 설립과 국채 보상 운동

1904년 2월 한국의 운명을 결정지었던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러일전쟁의 결과에 따라 한국이 큰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점과 일본의 침략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던 안중근은 대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논의 한 결과 우선 진남포로 가족을 옮겨 놓고 해외에 독립 기지를 건설할 목적으로 상해 지역으로 가서 정세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상해로 떠나기에 앞서 안중근의 민족 의식을 엿볼 수 있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청국 의사 서가의 안태훈 구타 사건이었다. 이 때 안중근은 “청나라 의사의 행위가 이러할 진대 우리 백성의 생명을 어찌 지킬 도리가 있겠는가.”라고 한국의 현실을 개탄하였다. 또한 1904년 7월 일제의 한국 황무지 침탈에 대항할 목적으로 창립된 보안회를 방문하여 하야시 곤스케를 처단할 것을 협의하였으나 보안회의 거부로 그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현실 인식은 국외에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려는 그의 구상을 낳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상해에서 1905년 6월 경 안중근은 민영익에게 문전박대를 당했고, 상인 서상근과는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상해에서 르각 신부를 만났다. 안중근의 계획을 들은 르각 신부는 한국인 모두가 고국을 떠나면 한국은 텅텅 빌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교육 활동 등 애국계몽운동에 진력하라고 충고하였다.

안중근은 르각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1905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해서 보니 이미 을사늑약이 강제되어 있었고 아버지 안태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이 때 안중근은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 술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이를 끝까지 지켰다.

이후 안중근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던 돈의 학교를 인수하였고 직접 영어 삼흥 학교를 만들었다. 여기에서 영어 삼흥 학교라는 명칭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프랑스어를 그만둔 안중근이 영어를 가르치는 영어 삼흥 학교를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그가 세계 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울러 국채 보상 운동에 온가족과 영어삼흥학교 선생들과 학생들이 적극 참여하였는데 이는 안중근의 영향으로 보인다.

해외 망명과 의병 전쟁

교육 활동과 국채 보상 등 애국 계몽 운동으로 국권을 회복할 수 없다고 확신한 안중근은 간도로 망명을 단행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를 빌렘에게 알렸으나 빌렘은 종교와 교육 활동에 진력하고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 하지만 안중근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종교보다 국가가 앞선다”고 선언하고서 1907년 8월경 간도로 떠나 9월 10일경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간도는 일제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안중근은 10월 말경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안중근은 특별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한인 사회에 적응하기까지 시련이 따랐다. 블리디보스토크 청년회의 임시사찰로 활동하였으나 누군가에게 맞아 귓병을 얻었다. 하지만 안중근은 엄인섭·김기용과 의형제를 맺는 등 한인 사회의 인정을 받았다.

1908년 3월 21일 『해조신문』에 ‘인심 결합론’을 발표하여 담합을 강조하였다. 여기에서 안중근은 독립의 전제 조건으로 단합을 강조하였다. 이는 러시아 한인 사회가 분열되어 있음을 지적한 것이고 단합을 개인·가족·국가의 단합으로 정의하면서 단결만이 살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한인 사회가 본국과 단합해야 한다는 점도 부가되었다.

안중근은 의병을 일으킬 생각으로 이범윤에게 거병이 천명이라고 설득하였으나 이범윤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러한 때 1908년 5월에 이범진이 보낸 1만 루블과 동포들이 모금한 6천 루블 그리고 안중근이 모금한 4천 루블 모두해서 2만 3천여 루블을 바탕으로 성립된 동의회(총장 최재형, 부총장 이범윤, 회장 이위종, 부회장 엄인섭)의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안중근은 드디어 의병을 일으킬 여건이 조성되었음을 직감하였다.

동의회는 곧 의병 조직으로 변신하여 이범윤과 최재형을 중심으로 국내 진격 작전 준비에 착수하였다. 안중근이범윤 세력에서 활동하였으나 이범윤에게 실망하고 나서 최재형 세력으로 거점으로 옮겼다. 드디어 안중근은 1908년 7월경 최재형 부대로 명명할 수 있는 의병 부대에 참여하였다. 이 부대는 도영장 전제익, 참모장 오내범, 참모 장봉한·지운경, 병기부장 김대연, 경리부장 강의관, 좌영장 엄인섭, 우영장 안중근으로 이루어졌다.

안중근은 일본군과 전쟁을 하면서 진격하였으나 다른 의병들과 포로 처리를 놓고 대립하였다. 안중근은 포로를 국제법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며 풀어주었다. 이는 다른 의병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으나 안중근의 국제 공법과 일본 인식을 엿볼 수 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우선 전자의 경우 안중근은 의병 투쟁을 국가 간의 전쟁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그는 국가 간의 전쟁은 반드시 국제법에 근거할 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그가 포로를 풀어준 것은 한일 간의 전쟁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후자의 경우 그는 일본인 전체를 적으로 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는 포로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토 히로부미로 대표되는 일제만을 적으로 간주하였고 보통 일본국민은 함께 가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의병 전쟁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지만 안중근에게는 현실을 직시할 수 있는 기회이자 동시에 자신의 독자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의병 전쟁을 하면서 의병이 얼마나 나약한 조직인지 절감하였다. 무엇보다 의병을 군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 절실하였다. 그는 안중근우덕순 등과 1908년 9월경 공립협회 블리디보스토크 지회에 가입 활동하였고, 1909년 2월 15일 연추 한인 일심회에 참여하면서도 의병을 조직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의병을 지원하였던 최재형 등 한인 사회의 반의병 분위기 속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것이 바로 단지 동맹으로 알려진 정천 동맹(正天同盟)이다. 이는 하늘의 뜻 곧 한국의 독립과 동양 평화를 구체적으로 실현하겠다는 안중근의 의지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그는 1909년 3월 2일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은이들 12명으로 구성된 정천 동맹을 한러 국경 지대인 하리라는 곳에서 조직하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우리들은 함께 손가락을 끊어 맹서를 합시다. 이것을 증거로 마음과 몸을 하나로 묶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기어이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물론 정천 동맹도 조직적으로 활동하지 못하고 곧 사방으로 흩어졌다. 안중근은 1909년 3월 6일 회령에서 일진회 회원을 잡아서 처단하는 등 독립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

안중근은 정천 동맹 이후 각지로 교육과 동포들의 단합에 힘쓰면서 유람을 하였다. 이는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향후 구상과 정세 파악을 위한 것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그는 1909년 8월 진남포에서 알게 된 동생 정대호(1884년 1월 2일 생)의 연락을 받고 만났다. 정대호는 가족을 데려와서 살라고 권유하였고 그도 이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정대호가 그의 처와 두 아들을 의거 다음날인 1909년 10월 27일 하얼빈으로 데리고 왔다.

안중근은 한인 사회의 반의병 분위기 속에서 끼니도 잇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특히 최재형에 밥을 얻어먹던 안중근은 국내로 들어갈 여비와 겨울옷을 제공해달라고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안중근 분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1909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미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로 온다는 소식이 퍼져있었다. 열혈청년들은 이토를 처단할 절호의 기회라고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었다.

안중근은 드디어 을사늑약 이래 숙망이었던 이토 처단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였다. 그는 우선 정확한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10월 20일 대동 공보사를 방문하여 정보를 취합하였다. 김만식이 안중근의 마음을 떠보았으나 이토 처단 계획을 숨기었다. 조사 결과 그는 이토가 만주로 오는 것이 확실하다고 판단하였다. 문제는 의거자금과 거사 동지를 구하는 것이었다.

자금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오기 바로 전에 연추에서 잠시 만난 적이 있던 이석산에게서 얻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석산이 무기구입자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석산을 찾아가 반강제로 100루불을 얻었다. 의거에 동참할 동지는 평소 알고 지내던 우덕순으로 정하였다. 20일 우덕순에게 의거계획을 털어놓았다. 이에 우덕순은 쾌히 승낙을 하여 함께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안중근우덕순은 21일 아침 8시 50분 3등 열차를 타고서 단속을 피하고 여비를 절약할 목적으로 소왕령에서 내려 2등 열차로 갈아탔다. 밤 9시 25분 뽀그라니치야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평소 알고 지낸 유승렬을 만나 가족을 맞이하러 가는 데 유동하를 통역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유승렬이 아들 유동하에게 약을 구하러 하얼빈에 보낼 참이었다며 흔쾌히 허락하자 유동하를 데리고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안중근 일행은 10월 22일 밤 9시 15분 하얼빈에 도착하여 유동하의 친척이자 안면이 있는 김성백의 집에 머물렀다. 23일 안중근우덕순·유동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안중근은 의거를 성공시키기 위해 어린 유동하 대신 다른 통역을 구하는 것과 거사 자금을 좀 더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통역을 조도선으로 결정하고 조도선에게 가족을 맞이하러 가는 데 통역을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조도선은 망설였지만 정대호에게 사업자금을 빌려볼 생각으로 응하였다.

안중근은 의거 자금을 김성백에게 빌려볼 생각으로 유동하에게 요청하였다. 갚을 방법을 강구해달라고 하는 유동하에게 그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유진률이 갚아줄 것이라고 하면서 대동공보사에 의거 사실을 알릴 계획에 따라 일단 편지를 써두었다. 동시에 의거의 의지를 다지는 ‘장부가’를 써두었다. 이때 우덕순도 보구가를 썼다.

하지만 김성백이 거절하여 자금은 마련되지 않았다. 그런데 안중근이 채가구로 내려간 사이 유동하가 돈을 사취할 목적으로 대동 공보사에 그 편지를 보냈다. 이것이 이후 재판에서 대동공보사와 안중근이 의거를 합작하지 않았느냐 하는 일제의 추궁이 따른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일제도 조사 결과 우덕순의 협조를 얻은 안중근 단독의거로 결론을 내렸다.

10월 24일 안중근우덕순, 조도선과 함께 채가구로 향하였다. 이 때 안중근유동하에게 “이토가 오는 것도 보고 싶으니 이토가 오는 날짜를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날 아침 9시 9분 우편 열차를 타고서 채가구에 12시 12분에 도착하였다. 1시경에 유동하에게 “채가구에 도착했다. 일이 있으면 전보를 쳐라.”는 전보를 보냈다. 7시에 “내일 온다.”는 전보가 유동하로부터 왔다. 하지만 이토가 오는 것인지 가족이 오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았다. 또한 채가구에서 이토 처단 가능성을 살펴보았으나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서 거사 자금의 확보와 유동하가 보낸 편지의 뜻을 확인하고 정확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일단 하얼빈으로 돌아갔다.

25일 아침 하얼빈으로 올라오면서 원동보에서 이토가 하얼빈에 온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안중근유동하에게 그 전보의 의미를 추궁하였다. 유동하는 이토의 일이라고 대답하였다.

하여튼 이토가 26일 하얼빈에 온다는 것은 분명해졌다. 안중근은 26일 오전 6시 30분에 일어나 7시쯤 하얼빈에 도착하여 이토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9시 15분 러시아 대장대신 까깝쵸프가 이토의 열차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이토와 함께 기차에서 내렸다. 드디어 9시 30분에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하였다.

일제를 심판한 재판과 동양 평화론

일제는 안중근을 불법적으로 재판에 회부하였다. 안중근은 재판을 제2의 의거로 상정하고 준비하였다. 재판에서 안중근은 일제의 한국 침략을 국제사회에 본격적으로 부각시키려고 하였다. 특히 안중근은 미조부치 검찰관의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해 도덕성 회복이라는 문화론으로 그 허구성을 논박하였다.

재판은 2월 7일부터 14일까지 7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재판의 쟁점은 대동공보사와의 관련성과 안중근이 오해하여 이토를 죽였다는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다. 전자는 일제의 조사 결과 관련성이 없음이 증명되었다. 후자의 경우 안중근은 오해한 것이 아니라 천명인 한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평화의 걸림돌인 이토를 제거한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 결과 1910년 4월 16일자 영국신문 『더 그래픽(The Graphic)』이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다”라고 안중근 의거를 평가하였던 것이다.

안중근의 위대성은 그의 동양 평화론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동양 평화론의 핵심은 일본이 침략정책을 멈추지 않으면 결국 망하고 말 것이고 이는 곧 동양전체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동양의 공멸을 막기 위해 동양이 단결해야하는데 그 방안은 경제적으로 공동의 은행 창설과 공동의 화폐 발행, 군사적으로 공동의 군대 창설, 문화 교육적으로 한중일 삼국의 청년들에게 2개 국어 이상을 가르쳐 상호 이해의 증진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관장하기 위해 평화회의를 열자는 것이었다. 또한 국제적인 공인을 받기 위해 로마 교황의 추인을 받자는 것이다.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은 현재도 유용한 이론이며 인류가 지향해야 할 미래 세계라는 점에서 그 위대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한국이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을 실현할 때 안중근의 염원대로 세계의 중심 국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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