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北中 貿易과 朝鮮族 國境 貿易의 메카, 丹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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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지리/인문 지리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요령성 단동시 |
| 시대 | 현대/현대 |
2011년 북한과 중국의 경제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사회의 관심 대상이다. 한국 정부가 내세운 대북 봉쇄 조치에 대한 실효성의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 북한 경제의 변화에 대한 분석 도구로도 쓰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0년대 전후의 중·조 관계를 설명할 때, 한국 연구자들은 대표적으로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발생한 무역 수지 통계를 인용하고는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중·조 무역 금액의 변동과 수출입 품목만이 있는 자료를 분석하거나 설명한다. 여기에서 무역 주체는 북한과 중국이다. 통계 내역과 내용에 대한 설명 등을 읽어보면, 북한과 중국의 경제 관계 이외에는 해석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동에서 실천되는 국경 무역의 상황과 현실을 고려할 때, 통계 자료에서 잡히지 않는 부분과 주체들이 있다.
1990년대 초부터 형성된 3국 만남의 무대이자 단동의 국경 지역 문화를 현장 그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조 우의교(中朝友誼橋)를 통해 중국에서 북한으로 향하는 트럭에만 주목하지 말고, 이 다리를 등진 채 단동 국경 지역의 변화상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단동 내 상점이라는 공간에서 누가 팔고 있고, 누가 구매를 하는지 그리고 그 물건들은 어떻게 그곳에 오고, 어디로 팔려가는지 파악하는 일은 삼국의 연결점이 되는 단동 국경 지역의 변화를 이해하는 단초다.
단동에는 중국과 한국 제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북한 무역회사들이 주축이 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출입 상품 전람회’가 열리곤 한다. 단동의 국경 지역은 다양한 3국의 물건이 모이고, 다시 3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곳이다. 이런 유통의 흐름을 따라가는 출발점은 3국을 대표하는 국기들이다.
단동 거리에서 3국 국기의 역할은 판매되는 물품과 판매자의 전략을 상징한다. 다양한 가게의 진열대 앞 또는 상점 간판에 북한, 중국, 한국의 국기가 함께 꽂혀 있는 경우가 있거나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 가게의 물건들이 삼국의 고객을 모두 상대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가게에 진열된 물건은 삼국의 물건 가운데 북한 농수산물, 중국 옥제품, 한국 식료품 등이 대표적이다. 삼국 국기는 식당 내부 장식으로도 쓰인다. 이때 단동 사람은 메뉴판에 삼국을 대표하는 요리들이 있으며, 식당 사장이 삼국의 손님을 주 고객으로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기뿐 아니라 3국의 도시 명칭 사용은 삼국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대변한다.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택배 회사 유리창에는 삼국 국기 혹은 지명이 삼각형으로 배치되어 있다. 이것은 단동-평양-서울 즉 3국 간의 택배가 가능함을 직설적으로 말한다. 이외에도 택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북한과 중국 또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보따리 장사꾼, 북·중 간 국제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비롯해, 중·조 국경 무역을 담당하고 있는 버스와 트럭 운전수들이 소량의 물건, 서류, 편지를 평양에서 단동을 경유해 서울이나 그 반대로 한국에서 북한으로 전달하는 일에 동참한다. 이처럼 단동은 삼국을 연결하는 인편이 발달해 있다.
중조우의교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만을 연결하고 양 국가만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려면 이 다리가 어디와 이어져 있는지를 보면 된다. 이 다리는 북한 쪽으로는 신의주와 평양, 중국 쪽으로는 대련(324㎞), 심양(240㎞)이 고속도로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대련(1시간 거리)과 심양(1시간 40분 거리)은 한국의 인천공항과 연결되어 있다. 2010년대 중반까지는 단동과 대련·심양 사이에 고속철도가 완공 예정이다. 2012년 단동 공항은 국제 공항으로 변모하기 위해 확장중이다.
또 이 다리는 단동 시에 속한 중국의 국제 항구인 단동항까지 차(약 40㎞)로 40분이면 충분하다. 2011년 초 기공식을 한 압록강 대교는 동항까지 차(약 25㎞)로 25분이면 도착을 할 수 있는 곳에 건설중이다. 이 항구와 한국의 인천항은 오후 다섯 시에 배를 타면, 중국과 한국에서 각각 아침을 맞이할 수 있는 노선(245해리)이 존재한다. 1998년부터 매주 두세 번씩 왕복하면서 최대인원 600명과 화물 110톤을 실어 나르던 단동 페리는 2011년 약 800명이 넘는 사람들이 탈 수 있는 배로 바뀌었다(매주 3회 출항, 월·수·금 한국 출항, 화·목·일 중국 출항 코스다).
이 배를 운항하는 회사는 매달 10일 간격으로 단동-신의주 혹은 남포를 오가면서, 주로 과경(중조 국경을 넘나드는) 운송을 담당하는 선박 노선도 영업중이다. 2012년 단동에서 남포로 가는 화물선에는 약 100만 달러 가치의 비료, 굴삭기, 가전제품 등이 실린다. 2011년에 단동과 남포 사이를 오고간 이 회사의 항해 수는 약 30번이다.
단동항은 한국에서 북한으로 보내는 구호물자를 실은 배, 단동-인천을 주 2회 왕복하는 화물선(컨테이너 선박), 단동-평택항을 부정기적으로 오가는 화물선도 정박한다. 그리고 북한 국적의 배들이 단동 페리 바로 옆에서 하역(荷役) 작업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1992년 한·중 수교 전후, 단동은 한국 사람이 꾸준히 찾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단동과 한국의 실질적인 교류는 인천-단동 간을 운항하는 단동페리가 출항한 1998년도가 출발점이라 볼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을 오고가는 여객선의 경우, 한국 사회는 주로 한·중 무역 가운데 보따리 장사꾼들과 그들이 가지고 오는 중국 농수산물에 주목한다. 그러나 이중 여객화물선인 단동 페리의 경우는 삼국 간 무역과 관련된 방법 그리고 배편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단동에서 소비되는 것과 더불어 물건의 다음 행선지인 북한을 염두에 두고 단동페리에 싣는다. 대표적으로 단동에 있는 북한사람도 좋아하는 한국산 전기밥솥은 그들의 손에 하나씩 있다. 2004년도 전후로 활발했던 일명 효도 관광으로 알려진 한국 관광객은 단동에서 관광 안내자인 한인[조선족]과 북한 화교의 인솔 하에 국경 관광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여행사에서 모집한 그들 역시 단동 페리의 보따리 장사꾼들이 행하는 삼국 무역의 연결고리에 도움을 주었다.
한국의 보따리 장사꾼들은 대부분 중국동강과 단동에 직접 무역상회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단동페리를 통해 들여온 한국에서 가지고 오는 물품들은 무역상회를 경유해 단동 시내 식료품점과 가전제품 상점 그리고 옷가게에 전시된다. 여기까지는 한·중 무역에 해당된다. 그러나 판매자 대부분은 북한 화교와 한인[조선족]이고 이 물건을 구입하는 주 고객 가운데 하나는 북한사람이다.
소매가 아닌 도매로 팔린 물건들은 단동보다는 중조 우의교를 통과, 즉 중·조 국경을 넘어 북한에서 소비된다. 이때 한국 사람이 개입하고 한국 물건임에도 외형적으로는 중·조 무역으로만 보이고 무역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다. 반대로 단동에서 구입한 북한 물건들은 다시 그들에 의해 한국으로 들어간다. 또한 의류 등과 관련된 원재료 등은 바로 기차와 트럭을 통해 국경 너머 신의주로 넘어간다. 가끔은 공식적인 단동-북한을 운항하는 선박에 의해 운송된다.
북한에서 완성된 의류들은 다시 그들과 컨테이너를 활용해 단동 페리가 한국으로 운송을 한다. 때로 단동에서 판매되는 한국 물건은 북한으로 들어가면 더 이상 한국산이 아닌 중국산으로 팔리는 경우도 있다. 또 중·조 국경을 넘을 때만 중국산이 되었다가, 북한에서 판매될 때는 한국산으로 팔리기도 한다. 반대로 단동에서 판매되거나 경유한 북한 물건은 한국에서 북한산이나 중국산으로 유통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불법보다는 국경 무역의 특징과 편법을 활용한 것이 일반적이다. 이 조건 때문에 중국 내 다른 지역과 달리 보따리 장사꾼들이 한국으로 가지고 오는 물건은 중국 및 북한 농수산물과 제품들이 공존한다. 북한과 한국의 관계 변화나 한국 소비시장의 상황[북한산에 대한 선호도 변화, 북한산보다 중국산의 가격 형성이 좋을 경우]에 따라 한국에서는 주로 중국산으로 유통되기도 한다.
2007년도 북한 핵 사태 전후에도 단동 페리에 실리는 물건의 금액은 한 항차에 약 15억 정도였다. 단동 페리 관계자는 “2011년 단동항의 항만 물동량은 7,637만 톤이다. 1998년부터 15년간 단동 페리를 통한 인적 교류를 살펴보면, 약 150만 명이 단동과 인천 두 도시를 오갔다. 정확한 수치를 잡을 수 없는 보따리 장사의 물적 교류를 제외하고, 이 배를 통해서 15년간 750만 개의 컨테이너가 오고 갔다. 한 컨테이너가 발생하는 자금 이동을 최저 1만 달러로 계산하면 총 750만 달러의 자금 이동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이는 단순히 한·중 간의 자금 이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한국과 북한의 무역과 자금 이동도 포함되어 있다. 또 이 금액은 물건의 단가며, 3국에서 판매되는 단가는 또 다른 계산이 필요하다.
2011년 북한과 중국의 경제 관계를 나타내는 지표는 한국 사회의 관심 대상이다. 한국 정부가 내세운 대북 봉쇄 조치에 대한 실효성의 판단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또 북한 경제의 변화에 대한 분석 도구로도 쓰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0년대 전후의 중·조 관계를 설명할 때, 한국 연구자들은 대표적으로 중국과 북한 사이에서 발생한 무역 수지 통계를 인용하곤 한다. 예를 들어, 그들은 중·조 무역 금액의 변동과 수출입 품목만이 있는 자료를 분석하거나 설명한다. 여기에서 무역 주체는 북한과 중국이다. 통계 내역과 내용에 대한 설명 등을 읽어보면, 북한과 중국의 경제 관계 이외에는 해석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단동에서 실천되는 국경 무역의 상황과 현실을 고려할 때, 통계 자료에서 잡히지 않는 부분과 주체들이 있다. 우선 연구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는 중·조 국경 무역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는 회색지대 혹은 비공식 영역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보따리 무역은 중·조 무역의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보통 인민폐로 2,000~3,000원 이하 혹은 최대 6,000원인 경우에는 통계에서 제외된다. 이를 두고 단동사람은 “개미떼 이사”라는 표현을 쓴다. 말 그대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나들면서 물건을 운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한 번에 운반하는 양은 한계가 있지만, 가격에는 한계가 없다”고 말하면서, 보따리 무역의 한도와는 상관없이, 그들이 담당하는 무역액의 규모를 우회적으로 지적한다. 실제로 북한사람이 한국 사람에게 직접 구입해서 북한으로 가지고 가는 한국산 소형 노트북, 혹은 동대문 표 18k 액세서리만 놓고 보아도, 이 말의 의미와 통계치의 한계를 대략 알 수 있다. 중국의 식량 수출업자들은 자신들이 확보한 쿼터보다 실제 선적시 통상적으로 30~50퍼센트 더 많은 양을 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통계에는 쿼터만 잡힌다.
여기에 동참하는 것은 중·조 국경을 오가는 사람들과 압록강의 배들이다. 매일 중·조 국경을 넘나들고 있는 화물 트럭과 버스 기사들(한족)뿐만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북한에 갈 수 있는 한인[조선족], 정기적으로 중·조 국경을 왕래하는 북한사람과 북한 화교의 인적 규모 그리고 그들이 운반하는 물동량과 가치를 생각한다면, 무역 통계의 빈틈은 커진다.
이와 더불어, 북한에서 단동으로 나오는 소규모의 물건들도 있다. 이 가운데 북한에서 제작된 수예품[수예 작품, 이불과 한복 자수]들은 부피가 작다. 때문에 이 품목은 통계에 잡히지 않는 중·조 국경을 오가는 국제 열차의 인편으로도 받을 수 있다. 단동 무역업자들 사이에서는 “북한은 손기술과 관련된 제품을 만드는 데 있어서 가격 대비 최고이기 때문에 한국 사람이 선호한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이 담고 있는 것은 즉 이러한 물건들이 단동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 소비자에게도 판매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해상 무역선 이외에도 압록강변에는 무역과 관련된 국경 허물기가 가능한 수많은 배가 정박하고 있다. 이들은 단동 사람에게 국경 세관을 통과해야 되는 중조 우의교 이외에, 국경 세관을 통과하지 않는 수많은 중조 무역 통로의 역할을 제공한다.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무역량은 통계 수치 영역 밖이다. 하지만 통계 수치 외에도 연구자들이 놓치는 내용이 있다. 통계 수치에는 중조 국경 무역의 주체 가운데 한국 사람의 경제 활동은 잡히지 않는다.
즉 중조 무역의 수치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북한 사람과 함께 북한 화교와 조선족(중국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동에서 중조 무역에 동참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주체는 한국 사람이다. 그들이 포함될 때에만, 실질적으로 거래되는 중·조 무역의 품목과 현황이 정확히 파악될 수 있다. 가령 이들은 단동 페리로 운반되는 물건과 삼마로에서 판매되고 구입되는 제품과 관련하여, 중조 국경 무역의 주체인 세 집단과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세 집단은 한국 사람이 관련된 물건이나 한국산을 사고팔지만, 이 물건들이 중·조 국경을 통과할 때는 중·조 무역의 통계 수치로 계산된다. 이때 중·조 국경 무역 행위자들은 세 집단 즉 북한과 중국 국민으로만 상정되는 한계가 있다.
단동의 국경 무역에서 삼국이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현실을 이해하려면, 단동에서 북한으로 수출 또는 반입되는 물건의 원산지와 유통 흐름을 짚어보아야 한다. 단동에는 한국 사람이 사장 혹은 북한사람이 노동자로 일하는 봉제공장이 산재해 있다. 간혹 북한에서 제작된 의류가 최종적으로 단동의 중국 회사에서 마무리 공정을 거치는 때도 있다. 여기에서 만들어지는 의류는 다양한 방법을 통해 중국이 원산지가 된다. 따라서 이런 방식들을 통해서 단동에서 만들어진 제품들이 한국에서 소비되다가 다시 중국으로 넘어가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한국에서 소위 ‘땡처리’ 되는 의류와 제품들이 액면가가 아닌 무게를 달아 다시 중국으로 재수출되는 사례들이 있는데, 이때 단동에서 이것을 구입하는 주 고객 중 북한사람도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역 주체 가운데 한 축은 북한 사람과 한국 사람이다. 그러나 물건의 원산지는 중국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 물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생산 공정을 거쳤다. 그러나 북한에서 북한사람은 중국산으로 인식하고 소비한다. 나아가 탈북자는 한국 연구자와 언론에 “자신들은 중국산을 소비했다”고 진술한다. 이러한 물건에는 국경 즉 국적이 표시되어 있지만, 그 물건을 생산·유통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국경은 무의미함을 보여준다. 오히려 물건 가격이 국경을 통과하는 이유가 된다.
전술한 사례와 더불어, 단동 사람은 원산지와 관련된 국경을 허무는 방식을 알고 있다. 한국 제품이 기본적으로 북한에서 통관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선입견이 있지만, 중·조 국경 무역의 장에서는 “MADE IN KOREA”라는 표시에서 최소한 “KOREA”를 지우면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2007년 대북 무역의 한 장면을 경험한 한인[조선족]은 “요즘은 MADE IN KOREA라는 표시가 있어도 통과되곤 합니다. 북한사람도 중국에서 한국 짝퉁을 많이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한 세관에 이렇게 말하면 됩니다. 이것은 중국에서 만든 한국 짝퉁이다. 그러면 문제가 없습니다.”라는 일화를 이야기한다.
즉 국경 너머에서 만들어진 한국 제품은 북한에서 묵인이라는 방식 또는 원산지를 중국산으로 바꾸어서 유통되기도 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물건의 원산지 혹은 생산지 라벨을 주목하기보다는 중·조 무역의 주체와 유통 흐름 그리고 한국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방식들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