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소래 김중건의 이상을 실천에 옮긴 원종교의 본거지, 어복촌

한자 笑來 金中建의 理想을 實踐에 옮긴 元宗敎의 本據地, 魚腹村
분야 역사/근현대|종교/신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팔도하자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성격 원종주의 이상향으로 건설된 마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9년
소재지 북만주 영안현 팔도하자
정의

1929년 봄, 소래 김중건이 북만주 영안현 팔도하자에 건설한 원종주의의 이상향.

개설
이상향 건설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어복촌

1929년 소래(笑來)김중건(金中健)(1889~1933)이 원종주의의 이상향을 건설하였던 어복촌(魚腹村)은 지금의 중국흑룡강성 영안시 팔도하자(八道河子)이다. 팔도하자는 영안시에서 남동쪽으로 대략 63㎞ 떨리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전형적인 분지로서 동쪽에는 달호산(撻虎山)이, 서쪽에는 호룡산(呼龍山)이, 남쪽에는 망미산(望美山)이, 북쪽에는 덕성산(德成山)이 솟아있다. 인간의 웅대한 포부와 아름다움 덕성을 나타내는 이러한 산 이름들은 모두 김중건이 직접 지은 것이라 한다. 영안시에 두 줄기의 큰 하류가 있다. 하나는 서쪽에서 흐르는 목단강(牧丹江)이다. 다른 하나는 동쪽에서 흐르는 하마하(蛤蟆河)이다. 하마하의 동쪽 발원지는 분투 임장(奮鬪林場)에 있고 남쪽 발원지는 팔도하자에 있다. 남쪽 발원지는 동·서 두 갈래 강줄기로 되었는데 바로 팔도하자에서 만나 하나로 된다. 이와 같이 전형적인 분지로서의 어복촌은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토지가 비옥하며 강을 끼고 있었다. 어복촌은 이상향을 건설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김중건이 꿈을 품고 찾아간 북만주

김중건원종교라는 신흥 종교를 창립하고 자신의 철학 사상을 실천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선각자이다. 그는 두만강을 개울처럼 넘나들면서 만주 벌판을 무대로 ‘대공화 무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던 인물이다. 1914년부터 김중건두만강을 건너 만주에 원종촌을 건설하기 위한 실천을 시작하였다. 그의 발자취는 북간도를 거쳐 안도현 흥도자로, 다시 장백현 덕수동으로 이어지고, 다시 화룡현 장인강과 삼도구로 펼쳐졌다. 이 과정에서 김중건은 일본간도 총영사관에 두 번이나 검거되기도 하였다.

1927년 김중건은 다시 만주로 들어와서 일본 제국주의를 축출하기 위한 무력 항쟁을 구상하였다. 그는 만주에서 공격과 후퇴가 가능한 지역으로 북만이라고 판단하였다. 북만에는 백두산에서 소련 국경까지 산림으로 뻗은 노야령 대 산맥을 끼고 있으니, 이러한 노야령 대 산맥의 지리적인 이점을 충분히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김중건이 항일 무장 투쟁의 본거지로 지목하였던 북만 영안현 영고탑은 이미 한민족의 독립운동 근거지로 발달하고 있었다. 군정서· 학우단· 적기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이 영고탑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영안 주위 50리 안팎에서는 수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촌락을 이루고 있었다. 위로는 산시· 해림· 목단강 등이 있고, 아래로는 동경성· 경박호· 발해진 등이 있는 곳이다. 좌측으로는 신안진· 영고탑· 밀강· 구가 등지가 있고 우측으로는 황기툰· 철령하 등지가 있다. 영안을 포함하여 상기 지역에는 1920년대 초반부터 이주 한인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북만에서 영안은 한민족 민족운동의 중심지가 되어 있었다.

1928년 김중건은 북만행을 결심하면서 제고문을 통하여 조선 혁명 세력의 총결집을 북만에서 성취하자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김중건신민부를 이끌던 김좌진대종교윤세복 등을 만났다. 이념을 달리하고 있던 그들은 현실적으로 통일 전선을 구축할 수 없었다. 김중건은 독자적으로 원종주의촌을 건설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연합할 수 있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김중건은 북만 노야령 산록 영안현 팔도하자에 원종교의 중앙본부를 두고자 하였다. 그리고 남북으로는 여순· 대련에서 흑하를 관통하고 동서로는 수분하에서 만주리를 연결하는 동청 철도의 중요한 역에 비밀 조직을 두고자 하였다. 또한 두 철도가 만나는 하얼빈에는 국제 정세를 직간접으로 파악하는 연락처를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얻어진 정보는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낸다는 계획을 세웠다.

1929년 봄, 김중건은 팔도하자를 어복촌이라 이름 짓고 원종주의 이상촌 건설에 매진하였다. 어복촌에서 김중건은 60~70세대 300여 명의 촌민을 이끌고 반농반병(半農半兵)의 형식으로 항일운동과 ‘농촌주의 구체안’인 공작분유제(共作分有制)를 병행하는 이상촌의 꿈을 실천에 옮겨 갔다. 어복촌에 건설된 원종주의 이상촌은 김중건이 창건한 원종교에 이념적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김중건이 꿈꾸었던 원종주의 이상향

1912년 김중건은 「대종원부경(大宗元符經)」을 저술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원종’이란 새로운 형태를 가진 새 주의의 종교를 창도하였다. 그는 이 원종을 인류 구제와 세계 개조의 정도대법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주의’로, ‘학설’로, ‘생활 실천의 원리’로 삼았다. 그는 1913년 1월 1일을 기해서 원종의 창건을 선포하였다. 1913년을 건원(建元) 원년이라고 정했다.

원종이란 하나의 종교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위해 종교적인 옷을 입힌 하나의 새 주의·새 학설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하에서 종교 운동밖에 용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김중건은 현실 부정·현상 타파·사회 개조·제도 변혁 등을 내용으로 하는 원종주의를 종교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을 피해가고자 하였다.

김중건이 주창한 원종주의는 사회 개조의 근본 사상을 담고 있었다. 여기서 원종이란 사람에게 으뜸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데 “으뜸 되는 것은 먹는 일, 즉 굶주리지 않을 권리요, 근본 되는 것은 사람 되게 사는 일, 즉 인권을 존중받을 권리가 있음을 말한다”하였다.

김중건은 「새 주의(主義)」 선언에서 “우리는 삶을 구한다. 더욱이 사람다운 삶을 구한다”라고 전제하고 “먹을 일이 으뜸(元)이요, 사람다움이 마루(宗 즉 근본)이다.” 라고 원종의 의미를 풀이하였다. 원종의 목적에 대하여는 “원종은 제세(齊世)를 목적으로 하나니 그리로 나아가는 두 가지 큰 법(法) 즉 「먹은 일」에 최선하는 경제안(經濟案)과 「사람다움」을 최후로 하는 도덕율(道德律)을 우리들은 우리들이 믿는 바에 의하여 각성하고 있다. 그 하나는 농촌주의(農村主義)(혹은 농본주의-農本主義)에 있고 또 하나는 인도주의(人道主義)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 원종의 제세 목적에 나아가는 두 가지 강령인 것이다”라고 하여 원종주의의 근본과 목적을 뚜렷하게 밝혔다. 이것이 김중건 철학의 역사관이며 동시에 개조하여 나갈 미래 사회의 이상이었다.

김중건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 사회를 자연 현상에 비유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의 열악한 자연적 사회이니 순수한 자연의 형태와 같은 대공화 무국(大共和無國)의 이상사회로 필연적으로 이행되어야 하며 그러한 역사 발전을 위하여 인류는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였던 대공화 사회는 “정치적으로 세계 일국을 의미하는 것이요, 도덕상으로 세계 유일의 정도 대법(正道大法)을 배우려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세계 공동(世界共働-다 함께 노동함)과 세계 개농(世界皆農-다 함께 농사지음)을 완전히 실행하려는 것이요, 인종별, 지방별의 망각과 언어와 문자와의 一種이 될 것이다. 경쟁이 근절되고 각 개인의 개성과 자연 공권 등을 실현하는 그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대공화 사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 바로 무국이라 하였다. 무국이란 “자연으로 삶”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것이 본복(復本-본래의 상태로 돌아 감)인데 이것이 곧 무국주의이다. 그러므로 대공화는 인도주의의 최후 실현을 이상으로 하고, 무국은 자연주의의 실제를 의미하는 것, 대공화는 정도(正道)의 극치요, 무국은 대법(大法)의 복귀라고 하였다.

김중건은 원종촌을 중심으로 무국주의 이상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는 소공화·대공화·무국의 순서로 역사가 발전한다고 보고 각각의 단계별 사회 형태로 촌(村)·읍(邑)·국(國)의 3단계 행정구역을 설정하였고 그곳에 촌회·읍회·국회를 두어 연락기관으로 삼고자 하였다. 여기서 원종촌의 관건이 되는 촌회를 중심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촌의 구성체의 단위는 동대(動隊)이다. 각 개인은 동대에 소속되어 「공작 분유(共作分有)」로서 모든 사람이 평등한 물질적 생활과 자유를 누린다. 봉건 수탈과 식민지 억압 속에서 신음하는 농민들을 농촌주의 원종촌 공동체에 참여시킴으로써 정신적인 희망을 갖도록 함이 그 목적이었다. 농촌주의 구체안의 핵심은 「공작 분유와 자치 농촌 연맹 제도」이다.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고 분배하며, 촌· 읍· 국 단위 안에 자치 농촌 연맹제를 실현함으로써 장차 세계 대공화의 사회가 건설될 것이며, 무국주의 이상촌 사회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원종촌은 1)구역 설정, 2)동대 조직, 3)연맹체 조직, 4)분배 등 측면에서 대체적인 구조를 살펴 볼 수 있다. 첫째, 원종촌 구역을 설정한다. 민중을 집단 이주 시킨다. 동대를 조직한다. 생산에 공동으로 참여한다. 둘째, 동대는 지역과 인원 규모에 따라 소대· 중대· 대대의 규모로 종적 계통을 세운다. 셋째, 각 촌은 끼리 끼리 연맹체를 만들어 횡적으로 연결한다. 넷째, 생필품은 공유 분배(公有分配)한다. 분배의 가치 기준은 노동 시간에 둔다. 절약에 의한 저축은 허용한다. 각 가정의 가옥과 기구는 사유를 인정한다. 그러나 본인이 죽은 후에는 공유(公有)로 환원된다. 이상의 내용들은 유물주의와 유심주의를 종합하여 인간 본위의 개성을 존중하는 원종 철학의 이상적 실천 형태라 할 수 있다.

김중건이 기획하고 실천에 옮긴 원종촌은 아래와 같은 설계도에 따라 건설되었다. 원종촌에는 의회· 행정· 사법· 경찰 및 법률 기관을 두어 자치하도록 하였다. 의료· 교통· 체신· 통신· 교육· 예술에 관련된 문화 시설을 갖춘다. 원종촌에는 소비점을 두어 원종촌의 일상 경제의 중심이 되도록 한다. 원종촌에는 사회 구조와 이념의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기관, 이념을 가르치는 훈련· 선전하는 특별 기관을 둔다. 농촌주의 새 이념의 교육과 의식화가 필수이다. 원종촌에는 노인· 어린이 병든 이를 위한 기관을 둔다. 양로원· 영아원 등은 필수적 시설이다. 노인· 어린이 병든 이를 제외한 원종촌 모든 인원으로 동대(動隊)를 조직하여 규율에 따라 활동한다. 원종촌은 농지· 어장· 삼림· 광산· 도로망 등 시설을 개척·정비한다. 원종촌의 모든 일은 의회에서 결정한다. 이 때에 동대에 가입된 원종촌의 전원이 선거권을 가진다. 원종촌 대회는 원종촌에 관련된 각 위원을 선출하고 법을 제정하고 연맹(邑), 연맹체(國)에 관한 모든 문제를 토론하여 결정한다.

김중건은 원종촌의 이상을 사람의 먹는 일을 해결하는 경제적인 대안과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도록 도덕률의 각성과 훈련에 역점을 두었다. 사람의 먹는 일 해결은 농촌주의에 있고 인간의 회복은 인도주의에 있다고 보았다. 먹는 문제와 사람의 문제는 유심(唯心) 또는 유물(唯物)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자신(唯我)에게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김중건은 유아론에서 시작하여 인도주의를 기본 내용으로 하는 농주의(儂主義)를 실천에 옮기고자 하였다. 농주의자는 인도주의자이며 농촌주의자라 할 수 있겠다.

김중건은 사회 개혁과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농업·농민·농촌에 주목하고 농촌주의 구체안을 구상하여 민족 운동을 진전시키고자 하였다. 따라서 농촌은 사회 경제의 중심이 되어야 하고 농촌 문화는 민족 문화의 본위로서 되어야 하고 인류 문화는 농촌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종촌은 자금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에 발전이 늦었다. 원종촌은 물질은 없지만 헌신주의를 내세웠다. 그들은 밭을 갈고, 똥통을 메고, 걸식을 하고, 노숙을 하였다.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삶이었다. 원종은 교통수단도 가옥도 없었다. 행군은 오직 도보였다. 원종은 무자본주의와 헌신주의로 물질주의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원종촌에서는 9륜(九倫)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인도주의 윤리 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9륜은 친자· 형제· 부부의 3가륜(三家倫)과 사생(師生)· 붕어(朋友)· 국민(國民)의 3계륜(三契倫)과 남녀· 장유· 족척의 3향륜(三鄕倫)을 말한다. 김중건은 사람의 품행을 수련하고 사회의 질서를 정숙히 함으로써 무국에 이르는 정대 공평의 윤리가 실천된다고 믿었다. 원종촌에서는 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농우로서 이름을 짓고 성을 부르지 않았다. 성씨는 타파해야 할 봉건적 유제로 보았다.

이와 같이 김중건의 농촌주의 운동은 농우를 주체로 한 국민 국가 운동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진우회, 대진단, 농우동맹의 농(儂)은 깨어난 민중을 말한다. 주의촌 운동의 주체로 농우는 사회 혁명과 민족 혁명을 이룩하고 마침내 세계 개조에 이르는 유토피아를 이룩하는 역사의 담당자라 하였다. 김중건은 이러한 농민들을 농우로 의식화 하여 역사의 담당자가 되도록 하였다. 새 이즘(ISM)은 농업을 근본으로 평화를 이룩하고 사회와 세계를 평등하게 함으로서 인도주의적 이상을 실행하려는데 있었다. 농주의 사상에는 전쟁과 제국주의적 억압이 없는 무국주의가 있었다. 전 세계의 피압박 계층은 모두 일어나 단결하여 착취가 없는 세계, 평등 세계, 평화 세계를 만들라고 호소하였다. 김중건의 농촌주의 운동은 민족사적으로는 민중을 기반으로 한 국민 국가 수립 운동이요 세계사적으로는 억압 없는 민족 해방 투쟁이 종식되고 자연의 본질에 다시 복본하는 무국의 이상 세계 건설에 있었다.

원종주의 이상향 건설의 어복촌 시대를 열다

김중건은 1914년 이러한 원종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안도현 도전동을 근거지로 삼아 백두산 서쪽 장백부 덕수(德水)에 원종촌을 건설하고 농촌주의(農村主義)를 펴며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다. 이것이 김중건이 세운 최초의 원종촌이다. 이 후 세차례에 걸쳐 원종촌 건립 운동이 전개되었다. 북간도 삼도구 원화동과 평강 개척리 그리고 북만 팔도하자의 어복촌이었다. 농촌주의가 구체적으로 실행된 것은 세 번째 주의촌인 개척리 시대라 할 수 있고 그의 이상이 실현된 것은 조선 혁명 지도처를 이룩한 팔도하자 어복촌 시대라 할 수 있다.

팔도하자 어복촌 시대는 1929년 봄부터 1933년 김중건이 피살되기까지 약 5년 동안 지속되었다. 어복촌에 모인 한인 동포 60-70세대 300여 명은 김중건의 두리에 뭉쳐 원종주의 이상향 사회를 건설하여 나갔다. 1930년 김중건은 어복촌에서 백만 농우의 결속을 위해 중앙에서는 ‘조선 혁명 운동 지도처’·‘농우 동맹 중앙부’·‘진우회(震友會)’·‘ABC당’ 등으로 총력을 집중하여 혁명 운동자 백만의 대 집단을 결성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 외에도 청년단 ·소년단·장년단·부녀단 등 교육과 군사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조직되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책 읽는 원종주의 이념을 실천에 옮겨 나갔다. 농촌주의 실제 제도는 공작 분유(共作分有)의 방식으로 동대로 편성된 농우들이 공동 노동을 하고 배급 카드로 생활 필수품을 분배받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북만 각 지역에서는 법회(法會)를 열고 원종주의 교양과 원종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1931년 9월 만주 사변이 일어난 뒤로는 북만 지역 독립운동 단체에 물자와 군비를 보급하며 한때 병력 50여 명을 파견하여 일본군을 압박하였다.

노야령 산록에 자리잡고 있던 어복촌은 김중건 등의 노력으로 ‘나아가면 공격할 수 있고, 물러서면 지킬 수 있는(進可以攻退可以守) 군사적인 요새로 탈바꿈되었다. 따라서 1931년 만주 사변이 발발한 이후로 비적과 반일 구국군의 눈독을 드리며 끊임없이 압박을 가였다. 구국군이 동녕으로 철수한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항일유격대가 어복촌에 들어왔다. 그들은 김중건에 대한 설득과 매수 공작을 벌렸다. 그러나 김중건은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갈 수 없는 입장이었다.

대공화 무국주의 이념을 지닌 김중건은 공산주의 이론에 대하여 비판적인 태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는 “인류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가 아니라 오로지 자신(唯我)의 필요에 의한 물질을 요구하는 인격 투쟁의 기록이다”고 하였다. “과거를 오로지 물질의 역사(唯物史)로 보지 말고 인물의 역사(人物史)로 보라”고 하였다. “맑스주의 모든 오해를 바로 풀어 주어 진정한 사회 개조의 맹우가 되게 할 책임을 우리들은 자각하라”고 하였다.

그가 지은 노래에서는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바람이 피비린 바람이라고 “이 바람은 신풍이었다/빛으로 보면 빨간 바람/펄펄 붙는 불과 같이 온 세계를 태워 나간다/이 바람은 살풍이다/냄새를 맡으면 피비린 바람/육산(肉山)을 넘어 혈해(血海)를 건너 온 천하로 橫行한다/……/악풍(惡風)이다/음풍(淫風)이다/집집마다마다 불어서 패풍(悖風)이요/반신불수의 중풍(中風)이냐……/일쾌이란(一快一亂)의 공산풍(共産風)”라고 읊어서 혹평했다.

1933년 3월 24일 김중건에 대한 설득 매수 공작에 실패한 공산주의 세력 이광(李光) 부대에 의하여 1) 마르크스주의의 적이라 점, 2) 혁명 운동에서 반 공산주의 노선에 철저하다는 점, 3) 회유의 여지가 없고 공산주의 운동에 방해적인 존재가 된다는 이유로 참혹하게 살해당하는 비극이 발생하였다. 이로써 어복촌을 중심으로 소공화· 대공화· 무국의 이상적 평화 사회를 건설하려던 김중건의 꿈도 무참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김중건은 대 공화 무국주의 사상가였지만 그가 진정 사랑한 것은 원종과 조국이었다고 하겠다. 김중건의 독립운동은 조선을 원종위에 건설하는 것이었으며 원종의 이념을 조선 농민에게 주는 것이었다. 어복촌은 김중건의 이러한 원종주의 이상을 실천에 옮겨 진정으로 사람의 먹는 문제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는 인본주의 가치를 실현하였던 유서깊이 지역이다.

참고문헌
  • 김중건, 『소래집』(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1968)
  •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1~4, (태성, 1994~2004)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中國 東北 지역 韓國 獨立 運動史』(집문당, 1997)
  • 최봉룡, 『독립과 민족 해방의 철학 사상가 김중건』(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13)
  • 김지용, 「김중건의 생애와 업적」(『나라 사랑』24, 외솔회, 1976)
  • 이강훈, 「만주 독립운동과 김중건」(『나라 사랑』24, 외솔회, 1976)
  • 김춘선, 「소래선생의 반일 활동유 적지를 찾아서」(『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2,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1995)
  • 서굉일, 「소래 김중건과 항일 민족 운동」(『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3,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도서 출판 태성, 2000)
  • 권립, 「1990년 7월 소래선생의 《理想村》 옛터 踏査에 대하여」(『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4,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블루라인, 2004)
  • 김지용, 「소래 철학의 배경과 主義村 건설」(『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4,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블루라인, 2004)
  • 서굉일, 「소래 김중건의 만주 독립운동과 농촌주의 구체안」(『개혁의 이론과 독립운동-笑來 金中建의 哲學과 思想에 대한 硏究 論叢』4, 소래 선생 기념 사업회, 블루라인, 2004)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