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목단강 지구 조선족 거리의 1번지, 목단강시 조선족 민족 거리

한자 牧丹江 地區 朝鮮族 거리의 1番地, 牧丹江市 朝鮮族 民族 거리
분야 지리/인문 지리|생활·민속/생활|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흑룡강성 목단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개설

목단강시는 19세기 목단강과 도문(圖們)과 가목사(佳木斯)를 잊는 목도선과 목가선이 개통될 때까지는 임업을 주로 하는 외진 마을이었으나,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면서부터 급속도로 발전하여 고무, 기계, 석유, 화학, 전기기구, 시멘트, 방직, 목재 등의 공업이 활성화되었다. 그래서 흑룡강성의 세 번째 큰 도시로 부상하면서 흑룡강성 동부의 정치, 문화, 경제의 중심이 되는 지구급(地區級) 시로 자리를 잡았고 지금은 하얼빈과 수분하를 잇는 빈수선이 개통되고 국제선이 취항하는 등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목단강 지구는 목단강시와 영안, 해림, 목릉, 수분하, 동녕, 임구 등을 포함하며 일제 강점기부터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살아오고 있다. 현재 목단강 지구의 면적은 40,583㎢로서 한국 면적의 절반에 육박하며 2009년 통계로 인구는 280만 명이며 그중 조선족은 15만 명에 달한다.

중국의 동북 삼성은 물론 흑룡강성의 대도시에도 조선족들의 집중 거주 지역은 많다. 그러나 독립된 행정구역인 조선족 가도(街道)가 형성되어 있는 곳은 목단강시가 유일하며 목단강시 서안구목단 조선족 가도 판사처(辦事處)로 부른다. 가도 판사처는 우리의 동사무소에 해당한다. 목단 조선족 가도 판사처는 1984년 공화가와 평안가에서 분리되어 성립되었는데 서장안가 서3조로에서 서6조로까지였다.

2013년 3월에 버스 종착역이 서3조로에서 서11조로로 옮겨지고 5월에 서11조로 남쪽 끝에 강남으로 통하는 흥륭 대교가 개통되고 서7조로에 아리랑 광장이 유명해지면서부터 서11조로까지 흥성해지기 시작하였다. 새로 입주하는 조선족들은 대부분 서8조로로부터 서11조로 사이로 이사를 하고 있다.

목단강시 조선족 가도는 1999년부터 조선 민속 풍정 거리라고도 부르기 시작했다. 조선 민족 풍경 거리의 시작은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이다. 상점 건너편과 중국 은행조선족 가도 지점 앞에는 조선 민속 풍정 거리라는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그리고 조선 민족 백화 상점 앞에는 대형 장고탑이 우뚝서있고 인근에는 조선 민족 문화 광장이 조성되어 각종 문화 행사가 치러지고 있으며 스테인레스강으로 제작된 장고춤을 추는 여인의 대형 조각상이 버티고 있다. 그 아래로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 조선족 도서관, 조선족 대반점, 조선족 소학교 등 관공서를 비롯한 조선족들의 조직과 상점과 이파트 등 주거지역이 밀집해 있다. 그리고 휴일에는 혼인 예식과 회갑 잔치들이 이곳 조선족 대반점 등에서 많이 치러지고 있기 때문에 조선족의 민속적인 풍정을 보기가 어렵지 않다.

그래서 이곳은 목단강시 조선족들의 삶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한 여러 가지 연유로 이 지역의 조선족 인구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으며 조선족과 한국 사람들이 이곳에 오면 낯설지 않는 풍경에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완전한 통계는 아니지만 2013년 현재 조선 민속 거리에는 329호의 자영업자가 있는데 그중 조선족 자영업자가 57호에 이른다. 현재 조선 민족 거리의 구성은 신흥(新興) 구역, 입신(立新) 구역, 서단(西丹) 구역, 서장안(西長安) 구역, 서목단(西牡丹) 구역, 동단(東丹) 구역 등으로 나누어지며 대부분 아파트나 연립 주택의 형태로 밀집해있다.

그리고 화룡 시장이라는 전통 시장과 새벽장이 서는 조선족 중학교 옆길의 애민 시장이 조선족들이 많이 애용하는 시장으로 유명하다. 목단강 시내의 조선족 인구는 3만 명 전후인데 그 중 1만 5백 명 정도가 이곳에 살고 있으며 조선족 유치원에서부터 소학교, 중·고등학교 등이 모여 있다.

목단강시 지구 조선족 교육의 산실

조선 민족 거리에는 유치원을 포함한 목단강 조선족 소학교, 중·고등학교를 통합한 완전 중학교인 목단강 조선족 중학교, 그리고 중국 유일의 관립 조선족 도서관인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 등이 밀집해 있어서 목단 조선족 교육의 산실, 인재 배양의 요람 등의 애칭으로 불리고 있다.

1934년 목단강 보통 학교로 출발한 목단강시 조선족 소학교는 1937년 목단강시 공립 장안 국민 우급 학교, 1945년 목단강시 고려 제1 소학교, 1946년 목단강시 제1 조선소학교, 1948년 목단강시 제5 완전 소학교, 1949년 목단강 시립 조선족 제1 완전 소학교, 1959년 목단강시 조선 사범 부속 소학교, 1966년 목단강시 붉은 넥타이 소학, 1968년 목단강시 57전교를 거쳐 1971년부터 목단강시 조선족 소학교로 그 이름을 바꾸어왔다,

서장안가 5~6조로 사이에 있는 학교는 덕육(德育), 지육(智育), 체육(體育)을 바탕으로 하는 심리 건강 교육과 생활 체육 교육, 민족 문화 교육 등의 《3육》과 중국어, 조선어, 영어 등의 배양을 목적으로 하는《3어》, 빙설절(氷雪節), 예술절(藝術節), 축구절의《3절》교육을 건학 이념으로 하면서 민족 문화를 널리 전파하고 발전시킴으로써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일찍부터 전국 붉은 넥타이 꼬마 갑급 축구 구락부 학교, 흑룡강성 빙설 전통 종목 학교로 자리를 잡았다. 현재 교직원은 50여 명, 초등학교 학생은 600명, 유치원 어린이 230명이 다니고 있다. 학교 건축 면적은 5,000㎡로서 다기능 교실, 유아 활동실, 무용실, 미술실, 전산실, 어학실, 실험실, 도서실 등이 구비되어있다.

목단강시의 조선족 중등 교육은 1940년 2월 목단강 국민 고등 학교와 1942년 목단강 여자 국민 고등 학교의 설립에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1945년 9월 목단강 고려 중학교와 목단강 고려 여자 중학교로 이어지고 1946년 3월 두 학교가 합병하였으며 1950년 2월에 목단강조선족중학교[이하 목조중으로 표기한다]로 명명되어 흑룡강성 조선족의 중점 중학교로 되면서 동년 3월 고등 학교가 증설된다. 1962년 6월에는 목단강 조선족 사범 학교가 합병되었다가 1976년에는 목단강 조선 사범 학교로 독립 하였다.

목조중은 1986년 흑룡강성 교육청의 평가에서 성급 중점 중학교, 1992년 정처급(현급)단위로 부상하였다. 2008년 12월 성급 시범 성 고중 전문가 평가를 통하여 2009년 12월 성급 시범 성 보통고중으로 승인되어 흑룡강성 동남 지구의 중점 중학교가 된다. 그리고 1950년대와 60년대 대학 입시와, 80년대 고등 학교 입시에서 연속 5년 동안 전성의 조선족 중학에서 1등을 차지하였다. 2000년도 고등 학교 입시에는 85%가 합격하였고 2001년 고등 학교 본과에서는 흑룡강성 조선족 중학교 중에서 처음으로 합격자가 백 명이 넘었으며 그 후에도 연속 7년간이나 본과 입학생이 백 명을 넘어섰다. 뿐만 아니라 대학 입시에서도 2000년 목단강시 장원, 2002년 목단강 지구 문과 장원, 2003년 목단강시 이과 장원, 2004년도 목단강시 문과 장원, 2007년 목단강 지구 문과 장원생 등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북경 대학, 청화 대학, 하얼빈 이공 대학, 복단 대학 등 중국의 명문 대학에 입학생이 끊이지 않고 있다.

목조중은 2013년 기준으로 건교 이래 16.165명의 중학생과 고등 학생, 450명의 사범 학교 학생을 배출하였으며 전국의 대학교와 중등 전업 학교에 3,165명을 입학시켰다. 그중 청화 대학에 8명, 북경 대학에 9명, 중국 인민 대학에 6명, 복단대학에 4명, 하얼빈 이공 대학에 43명, 길림대학에 30명, 중앙 민족 대학에 66명, 동제대학에 3명, 남개대학에 2명 등이다. 목조중 교육청사의 특징은 1992년에 설립된 2,000㎡의 기숙사로서 타지에서 온 학생들을 대부분 수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3년에 건설한 3,100㎡의 예술·체육 청사와 전자 교실 어음실, 악기실, 무용실, 미술실, 열람실, 통용 기술 교실, 종합 실천 활동실, 교사(校史) 전람실, 회의실과 공회 활동실 등을 통하여 전인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목단강 조선족 소학교와 100m거리 평안가 6~7조로 사이에 있는 목조중은 2013년 현재 재적 총학생수가 874명이며 그중 고등학생수가 680명, 중학생 193명, 교직원이 119명이다. 2001년 9월 국가 교육부로부터 “중대 항목 중점 과학 연구 기지”로 확정되었고, “외국어 교학 실험 선진 집체”로 선정되었으며, 교사들의 기획과제 연구에서 우수한 성과를 취득하였는데 그 중 ˂특수가정 학생 품덕 경향 연구˃가 국가급 특등상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1990년 전국 조선족 중학생 지력 경선 대회, 1992년 한국의 MBC에서 실시한 흑룡강성 조선족 학생 지력 경선 등에서 고등부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최근 10여 년 사이에 한국, 일본, 미국, 캐나다, 조선 등의 대학교들과 자매결연을 맺고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국제적인 명문고로 발돋움 하고 있다.

목단강시 평안가 서오조로 30호에 있는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은 목단강시 예술관과 같은 건물을 사용한다. 이 도서관은 중국에서 유일한 관주도의 조선족 도서관으로서 1980년에 건립되었으며 건물의 1~3층까지를 사용하고 있다. 1층은 영어 학원, 2층은 대출실과 열람실, 서고, 3층은 도서를 분류하는 편목실과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는데 건평이 1,000㎡이며 현재 직원은 11명이다. 이곳은 중국 정부로부터 연간 인민폐 25만원을 지원받고 영어 학원의 집세를 보태어서 운영하고 있다. 도서 구입비는 7만원으로 책정되어 있지만 직원들의 급료와 중국에서 발행되는 조선족 잡지와 도서, 신문 등을 구입하고 나면 대부분의 예산이 바닥이 나서 신간도서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도서관의 장서는 조선문 도서 1만 5천권, 중문도서 3만5천권으로 약 6만권 정도인데 중국 내의 조선어 도서 출판이 줄어들고 있어서 더욱 더 도서 구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소장도서는 중국에서 발행되는 조선어 간행물과 민속 풍습, 사전류, 신문 등이며 아침 8시에 개관하여 저녁 9시 30분에 폐관하고 매주 금요일은 휴관한다. 이용객은 하루 300~400명 정도로 대부분 초등학생들과 중등학생들이다. 최근에는 인근의 한족학교에서도 도서 기지로 결정하여 한족 독자수가 20~40%를 점하고 있다. 그리고 1년에 네 차례 한글 백일장을 개최하고 있으며 중국의 어린이 날인 6.1절에는 민족 구분 없이 장기와 오목 등의 행사를 개최하며 참가자 수는 500~600명에 이른다.

이 도서관의 가장 큰 과제는 한국과 관련된 도서를 구비하는 일이다. 코리안드림의 열풍이 전 중국의 조선족들에게 휘몰아치고 있는 현실에서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 사회에서는 한국에 관한 교양서적과 전문서적, 잡지 등에 대한 구독 욕구가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현제 이 도서관의 예산으로서는 그러한 다양한 서적들을 구입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본 연구자가 여러 곳을 통해서 도서를 기증할 곳을 찾아보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추진이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에서 한국의 여러 곳으로부터 도서를 기증받은 소식을 본인에게 알려 주었는데 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1994년에는 한국의 ‘사랑의 도서 보내기’라는 민간단체에서 보낸 도서를 중국대련 부두를 거쳐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의 단체에서 대련으로 발송하였고 우리가 대련 세관의 수속을 밟아 운반해왔습니다. 2004년 10월에 우리 도서관에서는 한국 국제 교류 재단 해외 도서 지원부에서 보내준 도서 150여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우편 요금까지 재단에서 지불하면서 직접 항공으로 부쳤더군요. 얼마나 고마웠던지 바로 회답을 보내드렸습니다. 우리에게 도서를 보내주시겠다는 분이 계시면 아래 주소로 연락을 해 주십시오. 주소는 중국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 도서관입니다. 도서관은 법인 증명서도 있으니 필요 하다면 제가 중문으로 된 주소와 법인 증명을 팩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김관장과 사서들은 한 목소리로 민족 교육이 자리를 잡으려면 도서관이 한민족 문화의 중심인 한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최근 도서들을 구비하여야 하는데 방법이 없다면서 어려움을 토로하였다.

2013년 다시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을 찾았다. 예전의 김관장은 한국으로 출장을 가고 없었고 새로운 관장으로 한족이 부임해 있었으며 열람실과 서고는 별다른 변화가 없어서 많은 아쉬움을 남겼다. 앞으로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에 책을 보내줄 독지가나 관련 기관이 늘어나서 목당강시 조선족들의 양질의 도서를 통하여 올바른 가치관 형성과 문화 민족으로서의 소양을 높이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겠다.

목단강시 지구 조선족 문화 활동의 중심지

목단강 조선족 도서관과 같은 건물을 사용하는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목단강 지구 조선족의 전통문화를 배양하고 전수하는 중심이다.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은 1952년 설립되었으며 초기 상주 직원은 김석관 관장 1명이었고 목단강 지구 조선 민족문화참이라고 불렀으며 1955년 목단강시 조선 민 족문화관으로 개칭하여 편제 정원이 4명으로 늘어났다 1969년 문화 대혁명 초기에는 목단강시 문화관, 조선족 문화관, 목단강시 도서관, 문화궁 등이 합병되어 목단강 지구 모택동 사상 선전잠을 설립하면서 문화관은 없어지고 구성원들은 농촌으로 내려갔다. 문화혁명이 끝난 1974년에는 조선족 문화관으로 다시 복관이 되면서 편제 정원을 12명으로 늘어났고 1989년 신청사를 건립하였으며 1990년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으로 개명하고 17명의 편제를 이루면서 목단강 지구 15만 조선족의 문화 예술 사업을 조직하고 지도하며 선전하는 구심점으로 부상하였다.

1998년에는 목단강 조선 민족 가무단과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을 합병하여 산하에 연출대를 설치하면서 편제는 36명이 되었는데 합병을 통하여 조선족 전문 예술인의 유기적인 조합이 이루어지는 등 예술관의 운영에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였다.

현제 목단강시 조선 민족 예술관에서는 매년 400여 명이 참가하는 윷놀이 대회 등 조선족 민속 활동과, 두 차례의 목단강시 조선족 민속 문화 예술절을 개최하며, 민속 표현 대를 조직하여 정부에서 개최하는 춘절양걸(중국 춤의 일종)시합에 참가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조선 민족 전통 문화 예술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목단강시 조선 민족 유아 문예 공연, 목단강시 조선족 중·소학교 문에 공연을 조직하여 전국 조선족 어린이 예술절에 참가하고 있으며. ˂목단강시 청소년 예술 양성 센터˃를 설립하여 고등 예술 교육의 진출 기지를 담당한다. 그래서 해마다 음악, 무용, 악기, 미술 등 예술 양성반을 통하여 200여 명의 예술인을 양성하며, 우리의 예술 대학에 해당하는 고등 예술 학원 등에 20여 명을 입학시켰다. 또 목단강시 조선족 새 노래, 새 가사 창작 학습반을 조직하여 20여 명의 민족 음악인을 양성하였다.

최근 예술관은 한민족 언어 문화 진흥회와 손잡고 양질의 민속 타악기를 후원받았으며 2001년 말 장영실 기념 학회의 요청으로 한국 공연을 하였고, 2002년 상반기에는 조선 평양시 문화원의 요청으로 아리랑 예술절에도 참가하였다.

목단강시 지구 조선족의 큰 장터

1950년 목단강시에서는 한인 합작사 설립을 위해 주식을 상장하자 많은 한인들이 주식을 구입하여 큰 어려움 없이 목단강시 한인 합작사를 설립할 수 있었다. 당시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민족적인 특색을 갖춘 종합 상점으로서 환영을 받았고 발전을 거듭하여 1972년 9월 목단강 조선 민족 백화 상점으로 발전하였다.

이 상점은 목단강시의 번화가인 장안가 서3조로, 조선 민속 풍정 거리에 있으며 부지 1,500㎡에 건평 2,400㎡로 종업원 100여 명을 거느린 백화점에 해당하는 종합 상점으로서 목단강시 조선족 집중 거주 지역의 간판이 되는 상점이다.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은 1988년 시 총공회로부터 최우수 상점으로 명명되었고, 1990년에는 흑룡강성 상업 계통 문명 단위, 물가 계량 신용 단위, 소비자 신임 문명단위가 되는 등 모범적인 상점으로 발전하였다. 매출액도 첫해인 1972년 14만원에서, 1978년 185만원, 1982년 335만원, 1989년 803만원, 1990년에는 880만원으로 상승하여 황금 시기를 구가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시대의 조류와 시장 경쟁의 논리에 밀려 파산위기에 처해 2004년에는 문을 닫고 영업 청사를 매각하는 위기에 도달하게 되었다.

5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상점이 파산의 위기에 몰리게 된 원인을 살펴보자. 첫째, 상업 환경이 예전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선족들이 집거하고 있는 이 지역에 규모를 갖춘 상점이 이곳뿐이었고 민족적 특색이 있는 상품을 주로 취급하다보니 시내는 물론 교외나 외각지에서도 조선족 소비자들이 찾아오게 되었다. 즉 상권을 독점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제3차 산업이 전례 없이 발달함에 따라 국영 상점, 민영 상점, 개인 점포들이 많이 설립되어, 상점수가 많아짐에 따라 경쟁이 치열해지고 살아남기 위해 이윤을 낮추다 보니 전체적인 수입이 줄어들게 되면서 경영 악화에 도달하게 되었다.

둘째, 민족 상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상점들과 똑같은 경영 환경에 처해있다. 예전에는 민족 용품 판매단위의 위치를 이용하여 시장에서 사기 힘든 전문 상품을 국가 관련 기업이나 생산 공장에서 직접 구입하여 품질이 좋으면서도 다른 상점들보다 싼값에 거래할 수 있어서 조선족 소비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시장이 개방되어 소비자들이 유사하고 다양한 상품들 중에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상품을 고를 수 있게 되니 시장 경쟁이 가혹할 정도로 치열해졌다. 그리고 국가 정책에서도 소수 민족의 물품을 생산하는 기업들에게는 혜택을 주지만 유통 기업에는 혜택이 없어졌다.

셋째 경영 전략 면에서도 문제가 없지 않다. 목단강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은 목단강 시내와 교외 일부 외곽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을 주 고객으로 상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개혁개방과 더불어 시장 경제가 발전하고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소비 상황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실례로 개혁개방 전에는 손목시계, 재봉틀, 자전거 등이 주된 상품이었으나 지금은 주택 분양, 자동차, 고급 가전 제품을 선호하며 의복도 브랜드를 따지는 등 다양한 제품을 선호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소비 성향의 변화를 쫒아가기 위해서는 큰 매장을 요구하고 있는데 규모가 작은 조선 민족백화상점으로서는 따라가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도처에 널려있는 일용상품을 취급하는 개인 상점들의 포위 속에서 일용 상품을 취급해서는 적자를 면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파산의 위기에 처하자 현실을 직시하고 전체 종업원과 주주 회의에서 선택한 방법은 영업 청사를 매각하는 것이었다.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이 문을 닫게 되니 마음이 쓰립니다. 현재 상황에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목단강시의 대형 백화 상점들도 대련 상업 그룹에서 경영하는 두 곳을 제외하고 모두 문을 닫는 형편이니 우리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이 지금까지 견지해온 것도 쉽지는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설경리의 말에서 시장상황과 어쩔 수 없는 경영진의 고초를 읽을 수 있었다.

2005년 2월 목단강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은 한족인 왕광희씨가 인수하였다. 그들은 조선족 경리를 고용하여 경영을 합리화 하고 있다. 또한 한국의 의복, 화장품, 웨딩, 침구, 주방기구, 가전제품 등과 웰빙 시대의 고급식품으로 예전의 명성을 다시 찾겠다는 판매 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한국의 투자자를 겨냥해서 “투자자는 돈을 벌고 우리는 발전한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쌍방의 이익을 위한 전략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현지 조선족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는 시간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2013년 다시 조선 민족 백화 상점을 찾았다. 1층에는 보석과 잡화, 시계, 안경, 가방, 주방용품, 한복점, 2층에는 가구, 도기, 식기, 가전 등이 들어서있고 웅진코웨이 정수기를 비롯하여 옥매트, 돌침대 등의 한국제품과 대한항공을 비롯한 항공권 판매처와 카페, 식당 등이 들어서 있어서 제법 활기차 보이지만 다른 대형 매장과의 차별화 전락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조선족의 음식 및 문화를 전파한다

목단강시 조선 민족 거리에는 수많은 조선족 식당들이 있다. 대부분의 식당은 조선족의 전통 음식을 판매하고 있어서 조선족 음식 문화를 전파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조선족의 전통 문화를 간직하면서 혼례식이나 회갑 잔치 등으로 가장 많이 활용되는 곳은 조선족 대반점이다. 그래서 조선족 대반점의 설립 과정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한다.

조선족 대반점의 설립자는 김창화이다. 그는 일제 시대 경찰서에 근무하였던 아버지를 둔 죄로 문화 혁명 때인 15살에 학교에서 쫓겨나 방목장과 논밭에서 노동을 하면서 반혁명 분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멸시와 천대 속에서 살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과거 문제를 해결한 그는 생산대의 운수업을 맡았는데 첫 해부터 흑자를 기록하며 부를 축척하기 시작하였고 그것을 바탕으로 1984년 목단강시 사도촌에서 민족 백화상점을 개업하였다.

1987년 그는 목단강시 서안구 판사처와 민족 기업 공사의 초빙으로 파산의 위기에 처한 목단강 조선족 음식점의 경리로 부임하였다. 그가 처음 목단강시 조선족 음식점을 맡았을 때 국수틀 1대, 전기 냉장고 1대, 볼품없는 의자와 사발들, 23명의 종업원, 3만원의 빚이 전 재산이었고, 종업원들은 타성에 젖어 나태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우선 능력위주의 인사를 할 수 있도록 제도를 개혁하고 냉면조, 복무조, 재무조, 여관조로 나누어 책임 경영제를 도입하고 사제를 털어 설비를 개조하였으며 유능한 요리사를 초빙하여 음식의 질을 높였다. 그러자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반년이 지나자 경영은 본 괘도에 올랐으며 1년이 지난 1988년 7월에는 인수 당시의 빛을 모두 청산하였을 뿐만 아니라 25,000원의 고정 재산이 증가하는 등 식당은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성공에 만족하지 않고 현대화된 종합적인 음식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식당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총자산은 20만원인데 최소한 60만원의 투자가 필요하였다. 그는 원래의 음식점을 처분한 자금에다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면서 영업을 시작한 후 나머지 잔금을 변제하겠다는 각서를 쓰는 등의 방법 등으로 2년여에 걸친 악전고투 끝에 서안구와 목단강시의 재정 지원을 받아서 1989년 11월 15일 500㎡규모의 지금의 목단강시 조선족 대반점을 개업하게 되었다.

그의 경영 철학은 믿음과 이해, 그리고 사랑을 바탕이 되었다. 그는 국영 해방 음식점에서 부경리로 요리 솜씨와 식당 관리 경험에 명망이 높은 1급 요리사 류정남을 초빙하여 부경리로 임명하고 업무 관리 권한을 주어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종업원들에게 정서적 변화가 있다고 판단되면 찾아가서 대화를 나누고 고난을 해결해 주었으며, 그들의 가정을 방문하여 자료를 만들고 생활과 취미활동 전반을 파악하였다. 그리고 한 번 받아들인 사람은 철저히 관리하여 스스로 자립하고 일어설 수 있도록 지도하였다.

식당은 번성했다. 그는 어렵게 번 돈을 사회에 환원하여 다양하게 재투자를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설립한 목단강시 조선족 봉사원 훈련반은 정치학, 심리학, 경제학, 법제 지식, 회계학, 위생학, 봉사원의 자세 등 식당 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지식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교육원을 설립하였다. 1기에 조선족 청년 80여 명, 2기에 20명이 참가한 봉사반은 수료 후 그의 식당이나 전국 각지 여러 도시의 음식점에서 근무하거나 자립하여 음식점을 경영하고 있다. 그리고 필요할 때에는 학교나 노인 협회에도 기부를 아끼지 않는다.

2013년 현제 식당은 전문 경영인의 손에 의해서 조선족뿐만 아니라 한식을 선호하는 한족들에까지 수용할 수 있는 항목을 개발하여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함경도 설렁탕 함흥 소머리집〕

목단강시 신안가 149번지에 위치한 함흥 소머리집의 주 메뉴는 함경도식 설렁탕으로 설립자인 김일순씨의 집안 음식이었다. 그녀는 1996년 자녀들의 학비를 벌기 위해 조선족 식품 시장에서 혼자서 조그마한 식당으로 개업하였는데 워낙 인기가 좋아 1년 후에는 300명을 수용할 수 잇는 장소로 옮겨와 지금까지 성업 중이며 목단강 시내 여러 곳에 분점을 둘 정도로 번창하였다.

이곳의 손님은 조선족들도 있지만 90%가 한족이며 지금은 한국 여행객들도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함흥 소머리집은 본점에서만 월 매출이 인민폐로 9만원이 넘는다고 한다. 중국의 실정으로 보면 웬만한 기업보다 수익이 높다. 이 집의 성공 비결이 무얼까 생각해보니 우선 중국의 식문화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고 생각된다.

중국에서는 집에서 아침밥을 해 먹기보다는 출근길에 아침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대부분 죽이나 콩기름에 반죽한 튀김과자를 콩국에 말아먹으며 만두나 만두국을 먹는 것이 대부분인데 기름기를 좋아하는 한족들의 기호에 설렁탕이 맞았고 가격이 저렴하여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었다. 거기에 한족식당에 비해 청결한 조선족 식당이 호감을 갖게 되었으며, 저녁에 독한 백주를 항상 반주로 마시는 사회에서 한두 번 먹어보고 나면 다시 찾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2013년 7월 조선 민족 거리에 머물면서 아침마다 호텔 부근에 있는 함흥 소머리 집을 찾았다. 무엇보다도 이른 아침에 들어가도 언제나 모든 준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예전과 달리 관리인은 한족이었지만 불편함은 없었다. 설렁탕은 한국보다는 약간 기름진듯하나 깍두기와 배추 김치가 곁들여지고 시원한 국물 맛은 예전 그대로여서 하루를 시작하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강위원, 『흑룡강성의 조선족』,(고함커뮤니케이션, 2005)
  • 흑룡강 신문사 문예부, 『하면 된다는 사람들』(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7)
  • 「목단강 조선 민족 상점 파산에 직면」(『흑룡강 신문』, 2004. 6. 2)
  • 인터뷰(목단강 조선족 대반점 총경리, 김창화 61세, 2004. 2. 7.)
  • 인터뷰(목단강시 조선족 도서관 전임관장, 김성옥 58세, 2005. 2. 21.)
  • 인터뷰(흑강성성 조선 민족 출판사 전임 부총편, 임승환 63세, 2013. 8. 2.)
  • 인터뷰(목단강 조선족 예술관 전임 관장, 최창준 73세, 2013. 8. 3.)
  • 현지 조사(2004. 2. 7. , 2013. 8. 3.~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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