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興京 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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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요령성 무순시 신빈만족자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만주지역 사회주의세력 검거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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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국민부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2년 1월 |
| 종결 시기/일시 | 1932년 3월 |
| 발생|시작 장소 | 요령성 무순시신빈현[흥경현] 서세명의 집 |
| 종결 장소 | 요령성과 길림성 관내에서 간부 83명이 체포당하고 종결됨 |
1932년 1월 하순 조선 혁명당·조선 혁명군, 국민부의 주요 간부들은 9·18 사변 이후 당면한 현안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신빈현(新賓縣) 읍내 부근의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비밀리에 간부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통화일본영사관에 소속된 일본 경찰과 중국 관헌의 습격을 받고 대거 체포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혁명당 중앙 집행 위원장 이호원(李浩源), 조선혁명군 사령관 김관웅(金寬雄, 金保安 또는 金輔安), 조선혁명군 부사령 장세용(張世湧), 국민부 공안부(公安部) 집행 위원장(일부기록에는 公安局長) 이종건(李鍾建[乾]), 조선 혁명군 사령부 부관장(일부 기록에는 당黨의 機要秘書로 나옴) 박치화(朴致化), 조선 혁명군 사령부 경위대(警衛隊) 대장 이규성(李奎星) 등 10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3월 초까지 계속된 통화(通化)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의 검거 활동으로 인해 국민부·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중에 요령성과 길림성 관내 9개 현에서 83명이 체포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1920년대 후반에 추진되었던 민족 유일당 조직 운동과 3부(府) 통합 운동은 비록 좌절되었지만, 남만주 지방에는 국민부(國民府)가 성립됨으로써 이 지역에서의 민족운동 역량을 어느 정도 집중시킬 수 있었다. 국민부는 종전의 정의부(正義府)를 주축으로 하여 신민부(新民府) 민정파(民政派) 계열과 참의부(參議府)의 신용준(沈龍俊) 계열 등이 연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서 1929년 4월에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국민부는 5월 말 23명의 중앙 집행 위원을 두어 각 부서를 정하고 6월에는 본부를 정의부 소재지였던 길림(吉林)에서 흥경(興京; 1929년 말경 신빈현(新賓縣)으로 개칭됨)으로 옮겼다. 이 무렵의 국민부 각 부서를 보면 중앙 집행 위원장이 현익철(玄益哲)이었고, 그 아래 민사(民事)·경제·외교·군사·교육·법무·교통 등의 위원회가 있었다. 군사 위원회에는 군사부와 사령부를 설치하였는데, 군사부에는 병무·훈련·경리·군수(軍需)·인사과(人事課) 등을 두었고, 사령부에는 부관(副官)·참모·작전·훈련·경리·인사 등의 여러 부서가 있었으며 군법국(軍法局)이 있어 군법의 처리를 담당하였다.
이 사건 이후부터 1932년 3월까지 통화일본 영사관 소속 일본 경찰과 중국 관헌의 남만주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그 결과 모두 83명에 달하는 독립운동가들이 일본 경찰과 중국 동북의 공안당국에 체포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