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三肇 事件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흑룡강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전투 |
|---|---|
| 관련인물/단체 | 허형식|동북 항일 연군제3로군 제12지대 등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0년 9월 |
| 종결 시기/일시 | 1940년 12월 |
| 발생|시작 장소 | 흑룡강성 조원·조주·조동 일대 |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산하의 동북 항일 연군 제3로군 제12지대 등이 1940년 9월 흑룡강성 서남부 송눈평원의 조원(肇源)·조주(肇州)·조동(肇東) 일대를 습격하여 일제의 만주국 통치에 타격을 준 사건.
한인 허형식이 이끄는 동북 항일 연군 제3로군 제3군의 주력부대가 1940년 9월에서 12월 말까지 북만주 하얼빈 서쪽의 조원(肇源)·조주(肇州)·조동(肇東) 일대에서 전개한 항일투쟁을 지칭한다.
1938년 후반기부터 이듬해 초기까지 흑룡강성 등 북만주 지방에 대한 일제의 대대적 탄압으로 동북항일연군은 매우 심한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인명손실이 생겼고, 일제에 투항하거나 변절하는 자들도 많이 생겼다. 실제로 1938년 한 해 동안 북만주지방에서 일제에 ‘귀순’한 대원은 무려 2,742명을 헤아렸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1938년 6월 초 동북항일연군 3군은 4개 사(師)로 축소, 개편되었다. 동북항일연군의 일부 부대는 흑룡강성 동북의 삼강(三江)지구에 잔류하였지만,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는 제3·6·9·10군의 주력부대가 일제의 포위망을 뚫고나가 서북쪽으로 원정해야 한다는 방침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허형식은 제9군 3사와 3군 1사의 생존대원을 거느리고 의란(依蘭)을 출발해서 해륜(海倫)으로 북상했다. 이후 그는 9군을 떠나 3군 1사를 새롭게 편성하고 사장(師長)의 직책을 수행했다.
1939년 1월 말 개최된 북만성 위원회 회의에서는 일본군 및 만주국 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해륜(海倫) 지구에 도착한 항일연군의 각 부대들로 하여금 현지의 중국 공산당 조직과 연대하여 북만주 소흥안령산맥(小興安嶺山脈) 서남쪽의 흑눈(黑嫩)평원에서 유격전을 전개하도록 하는 방침을 정했다. 이러한 중국 공산당 위원회의 결정을 통일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장수전(張壽), 왕명귀(王明貴, 이상 漢族), 허형식 등으로 구성된 눈해지구대표단(嫩海地區代表團)이 조직되었다. 동시에 이 대표단의 군사부문 지휘는 장수전, 부지휘는 허형식이 맡았다. 그 아래에 용남(龍南), 용북지휘부(龍北指揮部)가 생겼다. 용남(龍南)지구에서는 허형식이 책임지고 3·4지대와 독립 제1·2사를 지휘하였다. 허형식은 흑룡강성 덕도현(德都縣) 조양산(朝陽山)에 군정간부학교와 후방병원을 건설하고 부대를 재정비하는 한편, 눈강(嫩江), 눌하(訥河), 극산(克山), 덕도(德都), 조원(肇源), 조주(肇州), 조동(肇東) 등지의 북만주 평야에서 활발한 유격전과 대중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던 것이다.
이 사건을 전후하여 동북 항일 연군제3로군 부대는 1년 여 사이에 흑룡강성 소흥안령과 흑눈(黑嫩) 평원지대의 광활한 30여 개 현과 도시를 넘나들며 4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총 500여 자루, 기관총 5정, 4만 5천여 발의 탄알을 빼앗았으며, 적 250여 명을 사살하고 500여 명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삼조 사건은 흑룡강성의 중심도시인 하얼빈 서북 교외의 세 도시를 습격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정부 ‘만주국’의 통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