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北滿 勞動 義勇軍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무장 투쟁 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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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
| 설립 시기/일시 | 1930년대 중반 |
| 최초 설립지 | 흑룡강성 |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산하 조직으로 북만주(흑룡강성 동북부) 지역에서 결성된 항일 유격대의 별칭.
중국 공산당 길동(吉東), 북만 특별 위원회는 1936년 1월 탕원현(湯原縣)에서 각 항일부대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각 항일부대를 동북 항일 연군으로 재편성하기로 결정했다. 2월 20일에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통일군대건제선언(統一軍隊建制宣言)'을 발표하고 기존의 부대를 항일연군으로 확대 개편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종전보다 한층 광범위한 항일 역량의 결집이 가능해졌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의 실현이 본격화하였다. 그 결과 1936년에 중국 공산당 계열의 동북 인민 혁명군을 중심으로 동북 항일 연군 제1군부터 11군까지가 조직되었다. 그 가운데 허형식이 소속된 동북인민혁명군 3군은 같은 해 8월 1일 정식으로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3군으로 개편되었다.
1936년 가을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토벌'이 강화되는 등 새로운 정세가 형성되었고 만주성위(滿洲省委) 내부의 첩자 존재여부가 문제되어 당 조직의 정비필요성이 제기되었다. 특히 중국 공산당 중앙의 만주주재 대표는 '주하당단현위(珠河黨團縣委) 및 제3군 부책동지(負責同志)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내 만주성위(滿洲省委) 대신에 남만(南滿)· 동만(東滿)· 길동(吉東)· 송강(松江)의 4개 성(省)위원회와 하얼빈 및 합동특위(哈東特委)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따라 만주성 위원회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흑룡강성 등 북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 산하 북만성 위원회 산하 항일 유격대로 조직되어 항일 무장 투쟁을 수행하는 한편, 반봉건 및 계급 투쟁을 수행하였다.
중국 공산당 북만성위와 길동성위(吉東省委), 북만항일연군 사령부에서는 이 일대 항일연군의 협동작전을 강화하고 유격활동과 군수(軍需)조달, 간부의 교환문제 등을 토의하기 위해 1937년 1월 하순 탕원(湯原) 부근의 애홍(涯洪)에서 회의를 소집했다. 이 때 5군 군장 주보중(周保中)과 8·9군 군장등도 참석하였다. 허형식은 3군을 대표해서 여기에 참석했다.
이 회의 직후 북만항일연군 총사령부는 여러 부대간의 협동과 징세 및 군수물자의 배분 문제를 통일시키기 위해 항일연군 의동판사처(依東辦事處)(뒤에 합동(哈東)판사처로 확대됨)를 세우고 허형식을 주임으로 임명했다. 허형식은 2월 초까지 그곳에 머물며 5군 군장 주보중(周保中)과 의논했다. 그리하여 항일연군 각 부대 사이의 현안문제에 대해 상당한 정도의 대책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허형식은 이해 전반기까지 판사처 일을 맡아보는 동안 각군 사이에 미묘한 차이와 갈등이 없지 않은 점을 고려해서 물자의 배분을 공평하게 하고, 또 간부들과의 인간관계를 주도면밀하며 원만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이 임무를 원만하게 완수해서 항일연군 전력의 증강에 크게 기여했다.
1939년 4월 중순 통하현(通河縣)에서 북만임시성위 집행위원회 전체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조상지(趙尙志)가 중공당에서 제명(除名)되었고, 군(軍)의 직책도 박탈되었다. 그리고 '임시(臨時)' 두 자를 삭제한 북만성위(北滿省委)가 정식으로 성립했으며, 김책(金策)· 장수전(張壽)· 풍중운(馮仲雲) 등 3인을 성위(省委) 상무위원으로 선출하고 김책을 성위의 서기(書記)로 삼았다. 또 제3군과 제 6· 9· 11군의 잔여병력을 통합하여 동북 항일 연군 제(第)3로군(路軍)을 편성하기로 했다. 3로군의 총지휘는 장수전, 정치위원에 풍중운, 총참모장 겸 3로군 산하 제3군 군장에 허형식이 선임되었다. 이제 허형식은 온갖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투철한 신념을 견지하고 끈질기게 일제 및 내부 반대론자와 투쟁한 결과 중공당 북만성위와 동북항일연군 3로군의 핵심적 지도자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1937년 6월 말 탕원현(湯源縣)에서 중공당 북만성위 및 길동성위(吉東省委) 간부들의 연석회의가 열렸다. 이 때 제5군 군장이며 길동성위 대표인 주보중(周保中)도 참석하였는데, 항일연군의 군사행동계획이 제정되었다. 즉 이 회의에서 북만당(北滿黨)과 길동당(吉東黨) 조직의 연계, 송화강 하류유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3군 일부부대와 여타 항일연군의 협동작전, 그리고 고봉림(考鳳林) 부대의 흡수여부문제, 앞으로의 유격활동 방향 등 투쟁방략이 검토되었던 것이다. 또 통일전선 전술강화에 따라 나중에 항일연군으로 편입된 8· 9군에 대하여 중공당의 지도를 관철시키는 문제도 토론되었다.
허형식은 9군의 항일투지를 고양시키고 중공당의 방침을 수용하는 부대로 개조하기 위해 방정현(方正縣) 대라륵밀(大羅勒密) 밀림에 3차례의 군정훈련반(軍政訓練班)을 조직하여 120여 명의 간부와 대원들을 교육했다. 그의 이러한 사상교양 강화사업은 9군의 군사, 정치적 소질을 크게 증강시켰다. 때문에 항일투쟁이 매우 곤란한 처지에 빠졌을 때인 1939년 7월 하순 9군 군장 이화당(李華堂)과 일부 간부가 일제에 투항하는 사태가 벌어졌지만, 나머지 중견 간부들은 부대를 이끌고 계속 투쟁했던 것이다.
이해 7월 7일 일제는 소위 '노구교(蘆溝橋) 사건'을 일으켜 전면적 중일전쟁을 도발했다. 이에 따라 중국동북의 정세도 급변했다. 그러나 일제 관동군(關東軍)은 이미 1936년 4월부터 1939년 3월까지 3년 안에 중국 동북의 항일 세력을 말살한다는 '만주국 치안숙정계획대강(大綱)'을 마련했다. 그리하여 중국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 무장 투쟁 세력과 그 근거지에 대한 '토벌'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특히 북만주의 삼강(三江) 지구에 대한 일제의 토벌은 중일전쟁이 발발하던 1937년 7월 개시되어 그해 겨울부터 본격화하였다. 이 지방은 소련과 접경 지역이었고,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이 활발한 곳이었기 때문에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었던 것이다. 중국 기록에 의하면 이 시기 이곳에 대한 일제의 탄압에는 일본군 3개 사단과 만주국 군경 2만 5천명 등 거의 5만 여명의 병력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중반 흑룡강성 동북지역에서 중국 공산당 산하 북만성 위원회 산하 부대로 창건되어 1930년대 후반 이 지역의 동북인민혁명군 5~7군과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으로 항일 투쟁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