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反民生團 鬪爭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친일세력 숙청활동 |
|---|---|
| 관련인물/단체 | 민생단|중국 공산당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2년 8월 |
| 종결 시기/일시 | 1936년 2월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연길현 |
1930년대 초기 동만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친일 반공단체인 민생단의 활동에 가담한 재만 한인 및 공산주의자를 체포 숙청했던 사건.
1932년 7월 14일 민생단이 해산된 후, 그해 10월부터 1934년 3월까지 3년 반 동안 계속된 친일 세력 숙청활동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친일파로 몰려 억울하게 희생된 재만 한인이 적지 않았다.
1931년 9월 서울의 갑자구락부(甲子俱樂部) 이사 조병상(曺秉相)과 매일신보(每日新報) 부사장 박석윤(朴錫胤)은 간도에서 조선 인민회(朝鮮人民會), 재간동포구제단장(在間同胞救濟團長), 연변자치촉진위원회, 재한화교위문단(在韓華僑慰問團) 등 여러 친일단체의 간부들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양해 아래 민생단을 조직하였다. 민생단은 민족운동가들에게 접근하여 회유, 분열정책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중국 공산당의 주도하에 반민생단 투쟁이 전개되었다.
1932년 10월 이른바 ‘송영감(宋老頭) 사건’을 계기로 반민생단 투쟁이 시작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연길현 노두구의 구위원회 비서였던 송영감은 1932년 8월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다가 일주일이 지나 항일유격구로 돌아왔다. 송영감의 탈출에 의심을 품은 공산당은 그를 연길의 인쇄소에서 일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 연길현 항일 유격대는 정찰을 나온 일본군 헌병을 사살하고 통역관을 생포하였는데, 송영감이 민생단에 관련이 있다는 자백을 받았다.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는 송영감을 잡아 고문한 끝에 20여 명의 조선인 간부가 민생단에 연루되어 있다는 자백을 얻었다. 이에 따라 1932년 11월부터 1936년 2월까지 중국 공산당의 한인 숙청 작업이 진행되었다. 민생단으로 지목된 사람들은 명확한 근거도 확인되지 않은 채 모두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처음 연길현에서 진행되었던 중국 공산당의 반민생단 투쟁은 1933년 3월 화룡현으로 확대되었고, 그 해 5월에는 동만 특위 전체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만주 지역에서 가장 세력을 떨치던 간도의 항일유격구를 포기하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936년 2월 중국 공산당이 반민생단 투쟁에 잘못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간부들을 신임하라는 지시를 전달하면서 반민생단 투쟁은 완전히 종료되었다.
반민생단 사건이 진행된 1933년 9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재만 한인이 대부분이었던 연길, 왕청, 훈춘 등 3개 현의 공산당원 숫자가 1,299명에서 181명으로 86.1%나 감소되었다는 통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