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民族 唯一黨 促成 運動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운동 |
|---|---|
| 관련인물/단체 | 참의부|신민부|정의부|혁신의회|국민부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0년대 |
| 발생|시작 장소 | 만주 |
1920년대 후반 만주에서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으로 분리된 독립운동 세력들이 협동 전선을 결성하여 효과적인 항일 투쟁을 시도한 운동.
1924년부터 실현된 중국 관내의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전쟁으로 말미암아 중국 혁명은 전례 없는 상황을 맞이하였다. 이를 목도한 관내의 한인 민족독립운동가들은 이념 차이로 생긴 파벌을 극복하고 민족 독립을 전제로 전 민족의 유일당을 결성하여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족 운동 세력은 민족 유일당 촉성 운동의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해 2월 식민지 국내에서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진영의 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신간회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외의 민족 유일당 운동은 당시 동북에 있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27년 봄, 동만 지역에서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동만구역국의 주최 하에 강수희, 임계학 등이 유일당 조직 결성을 준비하였다. 남만주지역에서는 같은 해 4월 15일에 정의부 집행위원장인 김동삼과 이광민, 김원식 등의 노력으로 유일당 조직을 위한 연석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8월에는 제4차 중앙회의를 열고 신민부, 참의부와 연합을 도모할 것과 유일당 촉성을 준비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듬해 2월 정의부, 신민부와 참의부의 간부들은 영고탑에서 모임을 가지고 3부 통일회의를 소집할 것에 합의하였다. 1928년 5월 12일, 길림성 화전현에서 모든 동북의 각 단체들이 참가한 전민족 유일당 조직 촉성회의가 소집되었다. 회의에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두 진영 18개 단체의 대표들이 참가하였다. 회의는 5월 26일까지 화전, 반석 경내에서 자리를 옮기며 세 차례 거행되었다. 회의에서는 김동삼, 현정경, 현익철 등 21명으로 이루어진 집행위원회가 설립되었고, 유일당 헌장을 기초하는 일을 집행위원회에 위임하고 유일당 조직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러나 개인본위조직론과 단체본위조직론의 의견 차이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함에 따라 민족 유일당 재만 촉성회와 재만운동 단체 협의회로 분열되었다. 민족 유일당 재만 촉성회 세력은 조선 공산당 ML파와 김동삼을 비롯한 정의부 일부, 김소하를 비롯한 참의부의 일부 및 김좌진을 비롯한 신민부의 군정파로, 기성단체들의 보수성과 파벌성을 해산하고 참신한 중앙집권제의 전민족 대당을 결성하고 조직 원칙에 따라 개인 이름으로 입당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비해 재만 운동 단체 협의회 세력은 현익철을 비롯한 정의부의 다수파와 심룡준을 비롯한 참의부의 소수파 그리고 최호를 비롯한 신민부의 민정파, 조선 공산당의 재건파로, 이들은 기성단체들의 연합전선 형식의 연맹체를 조직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촉성회 세력은 혁신 의회,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로 발전하였다. 협의회 세력은 이후 민족 유일당 조직 동맹을 두어 3부 통합을 준비하다가 1929년 4월에 길림에서 국민부와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국민부는 자치행정을 책임지고 조선혁명당은 조선혁명군의 활동을 책임졌다.
민족 유일당 촉성 운동은 촉성회와 협의회라는 새로운 대립 국면 가운데 통합에 실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