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연합군

한자 韓中 聯合軍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중 연합 항일 무력단체
설립자 한국독립당|길림자위군
설립 시기/일시 1930년 7월
해체 시기/일시 1933년 10월
최초 설립지 북만주 위하현
정의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에서 조직된 한국 독립당 산하의 한국 독립군이 길림성 자위군 등과 연합한 부대.

개설

1930년 7월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생육사(生育社)가 중심이 되어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였다. 당군(黨軍)으로 지청천을 사령관으로 한 한국 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중앙위원회 결의를 통해 한국독립군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리고 중국의 이두(李杜)·정초(丁超) 등이 이끄는 길림 자위군(吉林自衛軍)을 비롯하여 고봉림(考鳳林)·오의성(吳義成) 부대 등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서란현(舒蘭縣) 전투·쌍성보(雙城堡) 전투·경박호(鏡泊湖) 전투·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동녕현성(東寧縣城) 전투 등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33년 10월 동녕현성 전투로 얻은 전리품 문제로 오의성 부대와 마찰을 일으켜 무장해제 당하고, 이 사건으로 100여 명에 가깝던 한국 독립군의 병사들이 흩어졌으며, 부대의 지휘자들이 중국의 관내로 이동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서란현 전투는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인 길림 자위군(吉林自衛軍) 제9사(師) 부대가 연합한 뒤 1932년 1월 29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에 걸쳐 길림성 서란현성을 공격하여 승리한 전투이다.

1932년 1월 초 북만주의 오상(五常)·서란현 일대에서 조경한(趙擎韓)·권오진(權五鎭) 등이 이끄는 한국독립군 1개 대대 약 270명은 한국독립군 본부가 있는 방정현(方正縣)으로 이동하는 도중 태평천(太平村) 부근에서 길림자위군 제9사 사복성(謝復成) 부대를 만나 공동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조경한 등이 이끄는 독립군 부대는 이후 ‘한국독립군 유격독립여단’으로 명칭을 붙이고 길림자위군으로부터 소총 70여 자루, 탄환 5,000여 발, 수류탄과 장창(長槍) 등의 무기를 지원 받아 무장하였다.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 양군은 서란현의 현성을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1932년 1월 29일 밤 서란현성 주변 8~12㎞ 지점에 병력을 분산 배치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한·중 연합군의 공격시 중국군은 동·서·남 세방면에서 포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한국독립군은 성의 북문 밖 8㎞ 지점의 산 계곡길 양편에 매복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패주하는 적을 섬멸키로 하였다. 자정을 기하여 길림자위군이 성을 공격하자 약 2시간 반의 전투 끝에 성안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개 분대, 만주국군(친일중국군) 1개 중대는 중과부적으로 자위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과연 한국독립군의 매복지점으로 패퇴하여 왔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일제히 사격함과 동시에 수류탄으로 집중 공격하였고, 그 결과 일본군과 만주국군은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한·중 양군은 적 150여 명을 살상하고 소총 121정, 탄환 8,000여 발, 박격포 2문, 포탄 22상자, 기관총 2정 등의 많은 무기와 피복 100여벌, 군마 5필, 화폐 200만원(길림성 화폐단위 大洋) 등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는 일제의 중국 동북지방 침략 이후 북만주 지역에서 거둔 한국독립군 최초의 승전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쌍성보 전투는 한국독립군과 중국의용군인 길림자위군이 연합하여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1차 전투에서는 대승하였으나, 2차 전투에서는 패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노선 사이에 있는 소도시로서 만주의 각종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거주하는 일제 침략의 거점이었다. 또 이곳에는 중국의용군과 한인(韓人) 독립군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만주국만주국군 초비단(剿匪團)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원래 한국독립당에서는 1932년 7월 당·군 연석회의를 열고 한·중 양군의 합동으로 하얼빈에 진공하기로 방침을 세웠으나 하얼빈은 북만주의 대도시로서 적의 대부대가 주둔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이에 한국독립군은 이 계획을 포기하고 병력의 증모와 군사훈련에 치중하는 한편, 하얼빈의 위성도시인 쌍성보를 공격하여 점령하기로 계획을 바꾸었다. 쌍성보 전투 당시 한국독립군은 총사령관 지청천, 부사령관 김창환(金昌煥), 참모장 신숙(申肅)·조경한·최악(崔岳)·안종명(安鍾鳴)·심만호(沈萬湖)·차철(車澈) 등이 이끄는 각 지대가 합류하여 500여 명이나 되었다. 한편 중국의용군은 고봉림(考鳳林) 등이 거느리는 길림자위군 제1·2군과 근처에서 활동 중이던 종교 계통 무장 세력인 홍창대(紅槍隊)·흑창대(黑槍隊) 등이 합류하여 거의 2~3만 명에 이르렀다.

1차 쌍성보 전투는 1932년 9월 20일 밤 8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쌍성보에는 약 3,000여 명의 만주국군과 소수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군과 함께 쌍성보성의 서문쪽 공격을 맡았다. 나머지 길림자위군은 성의 동·남문을 공격하였고, 홍창대와 흑창대 등의 부대는 북문 밖에 매복하여 퇴각하는 일·만군을 기습하기로 하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한중 연합군은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였고, 약 2,000여 명의 만주국군을 생포하는 등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은 서문 돌파의 주역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쌍성보를 점령한 한중 연합군은 소수의 중국의용군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일·만군이 다시 반격해와 이 성은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

2차 쌍성보 전투는 같은 해 1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계속되었다. 한국독립군과 길림자위군은 17일 밤 쌍성보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 때 성안에 있던 일본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하였고, 만주국군 일부는 투항하였다. 이에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일·만군은 다시 쌍성보를 탈환하기 위해 11월 20일 폭격기까지 동원하여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하였다. 한중 연합군은 이에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일·만군의 우세한 병력과 화력에 밀려 22일에 그곳을 철수하고 말았다. 특히 연합군은 쌍성보 동남쪽의 오상현(五常縣) 밀림지대로 도주하였는데, 적은 무려 4일간이나 끈질기게 추격해와 매우 고전하였다. 이 전투 직후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던 고봉림은 겨울을 지내기가 어렵다는 구실로 적에게 투항하려 하였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동요하는 길림자위군과 결별하고 11월 말부터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이처럼 한국독립군은 2차 쌍성보 전투에서는 고전하였지만, 중국 의용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함으로써 1차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한국독립군의 이러한 한중연합 투쟁은 직접 일제 침략세력에 상당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재만 한인사회를 보호하는 등의 효과를 거두는 한편, 북만주지역 한인 독립운동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경박호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길림 구국군(吉林救國軍) 선봉사령 요진산(姚振山) 및 제14사(師) 시세영(柴世榮) 부대와 연합하여 1933년 2월 28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중국 동북의 경박호(鏡泊湖) 연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 연합부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1932년 11월 말 한국독립당의 주요간부들은 북만주의 우싱현(五常縣) 사하자(沙河子)에서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주요사항을 의결하였다. 이때 군사활동 지점을 동만주(東滿洲) 지방(현재의 연변 일대)으로 한정하고, 그 지역의 중국의용군 지도부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한·중 합작을 논의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독립군은 사하자 지방에서 한인 장정을 징모하여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동만주 지방으로 옮겨간 후 그곳의 길림 구국군과 연합하기로 하였다. 1933년 1월 13일 수백 명 규모의 한국독립군은 수천 명 규모의 길림 구국군 제14사 시세영 부대와 연합하였다.

1933년 2월 우가둔(牛家屯)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독립군은 같은 달 28일 경 길림 구국군 제14사 부대와 함께 동진하여 경박호 부근에 이르렀는데, 그 날 일본군 약 1개 대대가 동경성(東京城)을 출발하여 경박호 쪽으로 진공하여 온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이에 한·중 연합군은 적의 통과가 예상되는 호수 주변에 병력을 4부대로 나누어 매복하였다. 이 때 중국군 요진산 부대도 합류하였다. 그 날 저녁 적의 전초대 1개 분대와 기병 1개 중대(일본군인지 만주국군인지 미상)가 지나간 뒤 보병·기병 등으로 이루어진 일·만군 후속부대가 얼음판 위를 행군하여 한·중 양군의 매복지점에 도달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빙판 위에 그대로 노출된 적군을 향하여 일제 사격을 가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적군은 제대로 반격하지도 못한 채 사방으로 흩어져 패주하고 말았다. 그들을 추격한 한·중 연합군은 적 1개 대대를 거의 전멸시키고 소총 및 경기관총 70정, 실탄 6,000여 발, 기타 물품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경박호 전투는 동만주 지방에서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이 길림 구국군과 연합하여 거둔 최초의 승전이었다.

동경성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길림 구국군 제14사 시세영 부대와 연합하여 동만주의 동경성을 공격하여 점령한 전투이다.

1933년 1월 13일 중국의용군인 길림 구국군 제14사 시세영 부대와 연합한 한국독립군은 이후 중국군과 함께 공동으로 싸워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이 해 4월 중순 사도하자(四道河子)전투와 그 직후 수행한 일련의 전투를 통해 동만주 지방에서 일정한 기반을 다진 한국독립군은 5월 29일 부사령관 황학수(黃學秀)로 하여금 편의대(便衣隊: 비무장으로 적의 후방에 침입하여 적을 교란하는 첩보 부대)를 인솔케 하여 북만주의 각 군구에서 장정을 모집하여 전투지역으로 동원토록 하였다. 그 결과 상당한 병력이 증원되었다.

이후 한중 연합군은 북만주의 영안현(寧安縣)을 점령하기 위하여 먼저 부근의 동경성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 때 열린 한·중 양군의 작전회의에서 한국독립군 사령관인 지청천(池靑天)의 군령을 따르기로 결정되었다. 동경성은 영안현 서남쪽에 위치한 발해의 고도로서 영안현 방위상의 요충지였고, 동시에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식량 보급기지이기도 했다.

한국독립군과 길림 구국군은 6월 7일 휘하 부대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공략하였다. 먼저 편의대를 성내에 미리 침투시켜 공격에 호응케 하였다. 또한 제1로는 기병을 중심부대로 하여 목단강(牧丹江) 연변의 산릉(山陵) 일대로 진출케 하여 적이 동경성을 지원하지 못하게 하였다. 제2로는 1려(旅)로써 영안현과 동경성 사이에 매복케 하여 다리와 전선 등을 먼저 폭파·절단하여 적의 원병을 차단토록 하였다. 제3로는 주력군으로서 좌·우익으로 나누어 동경성을 협공케 하였다. 6월 7일 저녁에 한·중 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하여 3시간 정도 혈전을 벌였다. 당시 서문 공격을 맡았던 한국독립군이 먼저 성문을 격파하고 성내로 진입하였다. 성에 주둔하고 있던 소수의 일본군은 전세가 불리하자 북문으로 도주하였지만, 복병에 거의 섬멸되었다. 만주국군 여장(旅長) 마도재(馬道才)는 부하 몇 명만 데리고 겨우 도주하였고, 만주국군 대부분은 항복하였다. 이는 1933년 6월 30일에 치러진 대전자령 승전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길림 구국군과 연합하여 1933년 6월 30일 중국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판 전투이다. 동경성 전투 이후 왕청현 동북의 산악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독립군과 길림 구국군시세영 부대는 1933년 6월 25일 동서검자에 이르렀다. 여기서 연합군은 대전자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 주둔 19사단의 간도 파견군이 각종 군수물자를 싣고 연길현으로 철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한·중 양군은 일본군이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길목인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하였다. 이 때 한국독립군은 약 500여 명, 길림 구국군은 약 2,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6월 30일 아침 6시경에 일본군이 출발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한국 주둔 제19사단요시다(池田信吉) 대좌가 인솔하는 혼성 2개대대 규모의 약 1,300여 명에 화물차와 우마차 등을 합쳐져 약 1,600여 명 가량이었다.

오후 1시경 일본군이 한중 연합군이 매복한 곳으로 진입하자 포위·공격하였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저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한국독립군과 시세영 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다른 전투의 상대가 주로 만주국군이었음을 비해 일본군과 싸운 전투로 ‘대전자령 대첩’이라고도 한다.

동녕현성 전투가 벌어진 동녕현성은 소련과 인접한 곳으로 정치·군사적인 측면에서 중요한 곳이었다. 때문에 당시 동녕현성에는 일본군 및 만주국군을 합쳐 약 2,000여 명의 병력과 함께 장갑차와 같은 현대화된 무기들도 집결해 있었다.

중국 공산당 동만 특위는 이곳을 주목하고 사충항(史忠恒)과 시세영이 이끄는 길림 구국군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에게 공동으로 동녕현성을 기습 공격할 것을 제안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중공측에서는 이 전투에 왕청현 항일 유격대의 일부를 참가시켰다.

한국독립군도 그 동안 대전자령전투 등에서 길림 구국군과 연합투쟁을 꾸준히 실천해 오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 연합하여 투쟁하는 것은 그다지 문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세 연합부대는 유격대가 경비가 삼엄한 서대문 밖의 서산포대를 공격하고, 길림 구국군과 한국독립군이 남대문과 동대문을 공격하기로 합의하였다.

9월 6일 저녁 9시, 이들 연합군은 작전에 따라 동녕현성을 기습하였다. 이들 세 연합군은 강력하게 저항하는 적들과 다음 날 아침까지 싸워서 성안을 거의 다 점령하였다. 성안의 한 구석에 몰린 적들은 자신들의 우월한 화력을 바탕으로 반격을 시작하였다. 이에 연합부대는 일본군과 만주국군의 증원부대가 올 것을 우려하여 애초 목적했던 동녕현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해야만 하였다.

후퇴 과정도 그리 원만하지 않았다. 성안에 있던 적들은 후퇴하는 연합부대를 추적하여 많은 피해를 가했다. 그 와중에서 구국군의 지도자인 사충항이 적의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하였다. 이때 유격대의 황해룡 등은 위험을 무릅쓰고 부상당한 사충항을 업고 후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길림 구국군과 왕청현 유격대의 사이가 원만해질 수 있었다. 실제 왕청현 유격대는 이후 나자구(羅子溝) 일대에 주둔하면서 시세영과 사충항이 이끄는 길림 구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였다.

반면에 한국독립군은 오의성의 부대와 함께 나자구 일대에 주둔하면서 동녕현성 전투에서 노획한 군수물자의 분배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이로 인해 자신들과 공동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오의성의 부대와 결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장해제까지 당하였다. 이 사건은 100여 명에 가깝던 한국독립군의 병사들이 뿔뿔이 흩어지는데 영향을 끼쳤으며, 부대의 지휘자들이 중국의 관내로 이동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었다.

참고문헌
  • 박창욱 외,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민족출판사, 1995)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1920~1945) : 민족주의 운동 및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대립과 연대를 중심으로』(아세아 문화사, 1999)
  • 『한국독립운동사사전』, 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한국독립운동사사전』5(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장세윤, 「한국독립군의 항일무장 투쟁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 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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