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大韓 獨立 期成 總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반일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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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구춘선|마진 등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20일 |
| 해체 시기/일시 | 1919년 3월 21일 |
| 최초 설립지 |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 |
1919년 만주 지역 간도 일대에서 만세 시위 이후의 일을 처리하기 위해 조직된 항일 민족 운동 단체.
1919년 3월 13일 만세 운동 이후 3월 15일부터 20일 사이에 만세 운동의 사후조치와 반일 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구춘선을 회장으로 하고, 마진을 부회장으로 하여 만들어진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의사부·재무부·편집부·교제부·교통부와 경위부 등의 부서를 두었다.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소완자를 중심으로 연길 도윤 공서와 교섭하여 ‘3월 13일 만세시위’의 희생자와 부상자를 보상하고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 그리고 재만 한인의 항일 운동을 이해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각지에 인원을 파견하여 조직의 확대에 노력하였으며, 휘하에 맹호단을 조직하여 친일파들을 감시하고, 경고·체포·처단 및 지역 간의 연락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조선 독립 신문』 등을 발행하고, 「간도 독립 선언서」을 각 지방에 반포하였으며, 재만 한인들의 독립집회와 시위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독립운동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반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결사대의 모집과 훈련, 그리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19년 3월 13일 간도 지역의 한인 3만여 명은 용정촌의 영신 소학교 마당(현재 용정 실험소학교 담벽 뒤 농업 실험지)에서 대규모 집회를 소집하고 독립선언서 발표식을 거행하였다. 오후 2시경 시위대는 간도일본 총영사관을 향하였으며, 시위대가 상부지(商埠地)에 이르렀을 때 중·일 군경들의 저지를 받았다. 이 과정에서 중국 군경들은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사격을 강하였으며, 19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 ‘3·13 운동’ 이후 간도지역의 주요 인물들은 용정(龍井)에 남아 사후처리에 주력하였고 국자가의 소완자(현재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 큰 마을)에 집결하였다.
여기서 재만 한인의 독립운동을 더욱 유력하게 조직하기 위하여 3월 15일~20일경을 전후하여 ‘대한 독립 기성 총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회장을 구춘선(具春善), 부회장은 마진(馬晋)으로 하고, 그 산하에 의사부·재무부·편집부·교제부·교통부와 경위부를 설치하였다. 각 부서의 임원들은 다음과 같다. 의사부 유례균(劉禮均)·김병흡(金秉洽)·최원일(崔元一)·고용환(高龍煥)·배형식(裵亨湜)·강구우(姜九禹)·이대현(李臺峴)·이봉우(李鳳雨)·김순문(金舜文)·김약연(金躍淵)·신명덕(申明德)·정재면(鄭載冕)·김신근(金信根)·최자익(崔自益)·박정훈(朴貞勳)이 있었다. 그리고 재무부 유찬희(柳讚熙)·서성권(徐成權)·장석함(張錫咸), 교제부 고용환(高容煥)·배형식(裵亨湜), 편집부 유하천(柳河天)·최기학(崔起鶴)·김정(金精), 통신부 이홍준(李弘俊)·강백규(姜伯奎)·김상호(金尙鎬). 경위부 박정훈(朴貞勳)·최응렬(崔應烈)·이춘성(李春成)·장우범(張禹範) 등으로 조직되었다.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3월 21일 이후 해산한 후 3월 21일에서 31일 사이 간도국민회로 개칭하였다.
‘3·13’ 만세 운동 이후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소완자를 중심으로 연길 도윤공서와 교섭하여 ‘3·13’의 희생자와 부상자를 보상하고 살인자들을 처벌할 것, 그리고 재만한인의 항일 운동을 이해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각지의 반일 운동을 지지, 지도하였다. 간도 각 지방에 분회를 설치하기로 하고 현덕승(玄德勝)·이상호(李尙鎬)·고평(高平)·지송(池松)·강상호(姜尙鎬) 등을 파견, 각 지방의 향약사장(鄕約社長)들을 기성회에 흡수하여 조직의 확대를 꾀하였다. 또 마진·한창섭(韓昌燮)에게 무산군 지역, 한수학(韓秀學)·윤정필(尹貞弼)에게 종성군 지역, 조권식(曺權植) 등에게 온성군 지역을 책임지게 하였으며, 경원과 경흥 등 기타 군은 혼춘에서 책임자를 파견하게 하는 등 조직 강화에 주력하였다,
한편 대한 독립 기성 총회는 명동·정동 등 민족학교의 충렬대와 국자가 도립중학의 자위대의 핵심 대원들을 중심으로 김상호를 대장으로 하는 맹호단을 결성하였다. 맹호단은 친일파를 감시하고, 경고·체포·처단 등을 하였다. 그리고 정보를 수집하며 각 지방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또한 류하천 등을 중심으로는 『조선 독립 신문』(3월 18일 발간), 『우리들의 편지』, 『태극기』와 『조선 국민보』등을 발행하였고, 22명이 서명한 「간도 독립 선언서」도 각 지방에 반포하였다.
대한 독립 기성 총회의 간부들은 간도 각 지방을 순회하면서 재만 한인들의 독립 집회와 시위 운동을 주도함으로써 민족 독립운동의 대중화에 노력하였다. 이외에도 반일 무장 투쟁을 준비하기 위하여 결사대의 모집과 훈련, 그리고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