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 노동당

한자 韓族 勞動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길림시 반석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김응섭|박병희 등
설립 시기/일시 1924년 11월
해체 시기/일시 1928년 2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반석현
정의

1924년 11월 길림성 반석현에서 정식으로 창립되어 1928년 2월 재만 농민 동맹으로 개편될 때까지 반석현 일대의 경상도 출신 농민들을 주된 지지기반으로 한 단체.

개설

한족 노동당은 노동자, 또는 소작농민들의 일치 단결과 의식의 함양을 꾀하고 ‘세계의 대세에 순응’하며 ‘광복 사업’에 한 사람이라도 더 참여시키기 위해 발기되었다. 창립 초기 한족 노동당은 노동자를 위한 계급적 성향의 단체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계몽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즉 의식 개혁과 교육, 그리고 근검 절약을 강조하는 등 문화·계몽적 의식 양성에 치중하는 민족주의 운동 단체로 출발하였다.

이후 1924년 8월경부터 한족 노동당의 계급적 성향이 강화되어 갔다. 만주 고려 공산 청년회 청년들이 반석현 일대로 진출하였고, 남만지방에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기 시작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를 배경으로 1925년부터 만주고려 공산 청년회가 장악하고 있던 남만 청년 총동맹한족 노동당의 연계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1925년 11월 반석현에서 남만청년총동맹의 창립대회가 열렸는데, 한족 노동당의 총회도 같은 달 그곳에서 열렸다. 당시 한족 노동당의 중앙 집행 위원 가운데 한사람으로 선출된 박병희(朴炳熙)는 동맹사청년회(同盟社靑年會)의 대표로 남만청년총동맹의 결성식에 참석하여 중앙 집행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족 노동당 길남(吉南)지방당의 지당장(支黨長)인 양호(楊虎)도 대차노동청년회의 대표로 참석하여 검사위원에 선출되었다.

두 단체 간의 이러한 연계 관계는 사실상 만주고려 공산 청년회, 그리고 1926년 5월 이후에는 조선 공산당의 외곽 단체인 고려 공산 청년회에 의해 조정되었다. 박병희는 1925년에 만주고려 공산 청년회의 중앙 간부였고, 1926년 5월에 결성된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의 중앙 간부였다. 한족 노동당의 핵심 지도자인 김응섭(金應燮)도 조선 공산당 만주총국의 무임소 간부였다. 따라서 한족 노동당은 남만지방에서 사회주의 운동, 내지는 그 세력 가운데 하나인 ML그룹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조선 공산당의 외곽단체로 변화하여 갔다.

한족 노동당은 1924년 11월 반석현에서 김응섭을 위원장으로 하고 경상도 출신의 간부진을 중심으로 한 지도부를 재편하였다. 한족 노동당의 체제는 1925년 11월 5일 반석현에서 열린 정기총회에서 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기본 조직체계는 중앙-지방-구(區)였다. 그리고 중앙 집행 위원회를 중심으로 당원이 100명 이상인 지방에는 ‘지당(支黨)’을 두었고 그 산하에 ‘구’를 두었다. 이 때 상무 집행 위원장 겸 서무부 위원에 김응섭을, 이재부 위원 겸 산업부 위원에 안창섭을, 선전부 위원 겸 장학부 위원에 문일을, 외무부 위원에는 김윤녀(金胤汝)·오재걸(吳在杰)·장동일(張東一)을 상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검사위원에는 김응달(金應達)·박근식을 선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기관지인 『노동보(勞動報)』를 『농보(農報)』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출판 활동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 중앙 집행 위원장인 김응섭이 사장을 겸임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렇듯 한족 노동당은 길림성 반석현과 길림현(吉林縣)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기반으로 한 조직이었다. 당시 이 지방의 주민들은 이주의 시기가 다소 늦은 경상도 출신의 사람들이 다수였다. 한족 노동당 당원은 창립 당시 818명에서 1925년 11월에는 1,563명으로 확대되었다.

한족 노동당은 1920년대 중반 경 계급적 성향이 강화되던 만주지역 민족 운동의 분위기를 반영한 조직이었다. 즉 같은 시기에 남만과 북만지방에 존재했던 이주한인들의 정당과는 달리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따라서 결성 당시 계몽적 성격에서 계급적 성격이 강화되면서 사회주의를 지향하였던 한족 노동당의 이념은 다른 정당이 지향했던 이념과 달랐던 것이다. 한족 노동당은 1920년대 중반 경 반석현 일대에 거주하던 한인 농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조직이었다. 1928년 2월 재만 농민 동맹으로 조직의 이름을 바꾸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역설적으로 이점을 놓고 보더라도 한족 노동당은 다물당이나 고려 혁명당과 달리 비밀 결사적인 정당은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신주백, 『만주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1920~1945) : 민족주의 운동 및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대립과 연대를 중심으로』(아세아 문화사, 1999)
  • 『한국독립운동사사전』5(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주성화 저,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 학술 정보(주),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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