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인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

한자 大韓人 國民會 만주리아 總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반일 민족운동단체
설립자 김성백 등
설립 시기/일시 1910년 4월
최초 설립지 흑룡강성 하얼빈시
정의

1910년 4월에 설립된 반일 단체로 미국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된 대한인 국민회의 하얼빈 지부.

개설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 공립 협회(大韓人公立協會)와 하와이의 한인 합성 협회(韓人合成協會)가 통합해 1909년 2월 국민회(國民會)가 조직되었다. 이어 1910년 2월 국민회는 대동 보국회(大同輔國會)를 흡수한 뒤 ‘대한인 국민회’로 이름을 고쳤다. 그리고 해외의 한인을 총망라한 단체를 구성하기 위해 한인이 살고 있는 지역마다 대한인 국민회라는 지방총회를 조직하였다.

하얼빈에서는 1910년 4월 하얼빈 공립 협회를 대한인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로 변경하였다. 주요 간부를 살펴보면 회장 김성백(金成伯), 부회장 정대호(鄭大鎬), 총무 김주삼(金鑄三), 서기 이상익(李相翼), 재무 최상준(崔尙俊), 학무 장신홍(張信洪), 법무 박명룡(朴明龍), 구제 김수경(金壽京), 외교 현경주(玄京周), 재미 만주리아 지방 대의원 안창호(安昌浩)·강영소(姜永韶)·홍언(洪焉), 극동정권위원 김장호(金長浩) 등이다.

대한인 국민회는 하얼빈 지방회, 석두하자 지방회, 횡도하자 지방회, 목릉 지방회, 하이랄 지방회, 삼성 지방회 등을 두었으며, 아울러 부속기관으로서 대한인 공제회(大韓人共濟會)·대한 기독교 청년회(大韓基督敎靑年會)·대한 기독 동흥학교(大韓基督東興學校)·대한민회(大韓民會) 등을 두어 관할하였다.

하얼빈 대한인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는 하얼빈과 중동 철도 연선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단합에 힘썼으며, 그들의 민족 의식, 반일 사상 고양에 힘썼다.

설립 목적

실업의 발달과 교육의 보급을 통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국민회 만주 지방 총회는 구한말 및 1910년대 전반기 주로 하얼빈을 중심으로 하여 북만주지역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단체이다. 한인들 간의 상호구제와 토론회, 강연회, 언론 등 여러 활동을 벌였다.

언론 활동으로는 특히 경술국치를 반대하는 기사를 많이 실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하얼빈에서 출판하는 중문 신문 『원동보』에서는 하얼빈의 한국인들이 경술국치에 반대하는 항의서를 일본 정부에 제기했다고 보도하였다. 또 한국인들이 자주 학교에 모여 경술국치에 대항할 방법을 의논하였고, 그 방법의 하나로 러시아에 입적하는 방법으로 이를 반대하였다는 기사를 실었다.

현황

대한인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의 주요 지방회를 살펴보면, 우선 하얼빈 지방회의 경우 본부는 하얼빈에 두었으며 1909년 8월에 조직되었다. 회원은 1912년 당시 131명이며, 교육과 실업을 진흥시키고, 자유와 평등을 제창해서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주요 간부로는 회장 김성백, 부회장 정대호, 총무 박명룡, 서기 이상익, 재무 최상준 등이다.

석두하자 지방회의 본부는 석두하자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1910년 8월에 설립되었다. 회원은 1912년 당시 131명이었다. 주요 간부는 회장 오사언(吳仕彦), 부회장 이병학(李丙學), 총무 이시홍(李時弘), 서기 김흥도(金興道), 재무 강승준(姜承俊) 등이었다.

횡도하자 지방회는 1910년 9월에 설립되었으며, 본부는 횡도하자에 두었다. 하얼빈 지방회 회칙에 근거하여 설립되었으며, 회원은 94명이었다. 주요 간부로는 회장 피성준(皮成俊), 부회장 이지근(李芝根), 총무 이창순(李昌順), 서기 김윤종(金允鍾), 재무 조영숙(趙永淑) 등이 있었다.

목림 지방회는 1910년 9월에 조직되었으며, 회원은 26명이다. 주요 임원은 회장 한성열(韓成烈), 부회장 강인섭(姜仁燮), 총무 이만여(李萬汝), 서기 박진구(朴振九), 재무 김정호(金鼎浩) 등이다.

해랍이 지방회는 1910년 11월에 설립되었으며, 본부는 해랍이에 있었다. 회원은 200명이다. 회장은 장운서(張雲瑞), 부호장 김장오(金長吾), 총무 이시환(李時煥), 서기 김흥선(金興善), 재무 최운선(崔云仙) 등이다.

삼성 지방회는 1911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회원수는 106명이다. 회장은 박성삼(朴星三), 부회장 김원준(金元俊), 총무 한상교(韓相敎), 서기 한상교, 재무 이흥삼(李興三) 등이다.

대한인 국민회 만주리아 총회는 대한인 공제회 등 여러 단체의 부속 단체를 갖고 있었다. 먼저 대한인 공제회를 살펴보면, 본부를 하얼빈에 두었으며 회장은 박문순(朴文淳), 부회장은 장신홍(張信洪), 서기는 김익지가 담당하였다. 이 단체는 하얼빈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조직으로 연초(煙草)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상호구제를 목적으로 조직되었으나 일면 배일단체로서 활동하였던 것이다.

대한기독교청년회 역시 하얼빈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1910년 1월에 조직되었다. 이 단체의 회장은 김일선(金日善), 부회장은 홍종률(洪宗律) 등이었다. 주요 활동으로는 토론회와 연설회를 개최하여 애국심 고양에 노력한 점을 들 수 있다.

대한 기독 동흥 학교는 1910년 9월, 하얼빈에 설립되었다. 교장은 방사담(方仕膽), 학감은 박문순, 교사는 지광한(池光漢), 부교사는 전복강(田福疆) 등이었다.

대한민회 역시 하얼빈에 설립되었으며, 만주지방 총회가 하얼빈에 설립되자 동포들 사이의 이익과 편의를 도모하기 위하여 김성백이 스스로 회장이 되어 조직한 것이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사전』4(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서명훈, 『할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중국 민족 출판사, 2009)
  • 姜昌錫, 「大韓人國民會의 組織과 活動에 관한 硏究」(『東義史學』 창간호,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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