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 총연합회

한자 韓族 總聯合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독립운동 단체
설립자 신민부 군정파|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설립 시기/일시 1929년 7월
해체 시기/일시 1931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9년 10월
최초 설립지 길림성 영안현
정의

1920년대 북만주 지역에서 조직된 무정부주의 이념의 항일 독립운동 단체.

개설

신민부 군정파는 1929년 7월 길림성 우창현(吉林省 五常縣)에서 홍진(洪震)·김좌진(金佐鎭)·지청천(池靑天)·황학수·이장녕(李章寧) 등의 주도하에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본부는 영안현(寧安縣) 산시역전(山市驛前)에 있었다.

한족 총연합회가 무정부주의 사상을 추구한 이유는 신민부 군정파의 관할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재만 동포들이 대종교 민족주의자들이 배타시하고 있던 공산주의 사상에 공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신민부 군정파의 지도자인 김좌진과 정신 등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위해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과 연합하여 무정부주의 이념을 제공받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재만 조선 무정부의자 연맹이 신민부가 무장 투쟁을 추구한데서 발생되었던 재만 동포들의 두려움을 해소시키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농민들에게 독립운동 단체가 독립운동가들 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농민 자신들을 위한 조직이라고 생각하도록 하는 데도 공헌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즉,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은 철저한 반공사상을 갖고 있었고, 스스로 농민단체임을 자처하였다. 농민대중과 똑같이 노동하고 자력으로 생활을 영위하는 동시에 농민들의 생활개선과 사상계몽에 주력하였다. 아울러 직접적인 무장 투쟁보다는 동포들의 교육·사상계몽·생활개선 등의 지도에 전력을 기울이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재만 동포들이 경제적·문화적인 면에서 발전할 수 있도록 동포들의 자치조직(自治組織)으로서 동포들의 조직화에 노력하였다.

나아가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 측에서도 신민부 군정파와의 연합을 강력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들은 무정부주의 이념단체를 조직하고는 있었으나 무기·관할구역·관할주민 등 실질적인 세력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무정부주의자들은 신민부 군정파를 발판으로 하여 무정부주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신민부 군정파와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의 상호 필요성에 의하여 1929년 7월 한족 총연합회가 결성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한족 총연합회 간부로는 김좌진(위원장)·권화산(權華山, 부위원장), 한규범(韓奎範, 조직·선전·농무부 위원장), 정신(鄭信, 조직·선전·농무부 위원장), 김종진(金宗鎭, 조직·선전·농무부 위원장), 이붕해(李鵬海, 군사부 위원장), 강석천(姜石泉, 군사부 부위원장), 박경천(朴耕天, 교육부 부위원장), 이을규(李乙奎, 교육부위원장), 박찬순(朴燦順, 경제부 위원장) 등의 주요부서를 담당하였으며, 이밖에 민무(閔武)·유현(劉賢)·이종주(李鍾柱) 등이 중앙간부였으며, 이달(李達)·김야봉(金野蓬)·김야운(金野雲)·이덕재(李德載)·엄형순(嚴亨淳) 등이 차장이었고, 이백호(李白虎)는 군사부 별동대 제3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즉 김좌진·정신 등 신민부 군정파 출신들과 김종진·이을규·이붕해 등 재만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연맹 출신들이 그 조직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1929년 8월 조직을 정비한 한족 총연합회는 권력의 중앙 집중을 부정하고 자주적 조직의 연합체를 지향하는 무정부주의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과 1931년에 연이어 일어난 한족 총연합회의 핵심인물인 김좌진김종진의 암살과 이을규의 체포는 한족 총연합회에 큰 타격을 주었다. 또한 이들 사건이 있은 후 무정부주의자들과 신민부 군정파 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양 계열간의 대립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재만 동포들에게 행한 활동에 의하여 더욱 심화되었다. 이들은 연극공연을 통하여 은근히 대종교 민족주의자들을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의 대종교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은 한족 총연합회를 해체의 위기로 몰아갔으며, 결국 신민부 군정파들이 1931년 여름에 이탈함으로써 한족 총연합회는 해체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한족 총연합회신민부 군정파 출신인 대종교 민족주의자들이 재만 조선 무정부주의자 연맹의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하여 조직한 단체이다. 그러므로 한족 총연합회는 농촌 자치조직의 건설과 교육 활동 및 무장 투쟁 등을 통하여 효과적인 독립운동과 반공운동을 전개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먼저, 한족 총연합회의 활동으로는 일본제국주의와 재만조선인반제동맹 등 공산주의 단체들에 대항하기 위하여 농촌 자치 조직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 단체에서 바라던 농촌 자치 조직은 농민들 스스로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상호 단결하여 자발적으로 조직하는 것이었다. 무정부주의자인 김종진과 이을규 등은 기존의 농촌조직이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들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조직된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일부 독립운동가들의 조직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한족 총연합회가 앞으로 북만지역에서 공산주의 단체들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한편, 대일항쟁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민부 군정파에서 갖고 있었던 단점들을 보완하여 농민 대중 속에 기반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농민자신들의 생활 공동체로서의 경제적 협력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같은 조직 안에서라야 비로소 농민 각자가 자신들의 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고, 아울러 농민들에게 효과적인 생활훈련과 직업 교육을 시킬 수 있으며, 영농방법의 개선도 추구할 수 있을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북만 동포들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부유해 질수 있으리라 믿었다.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이러한 농촌 자치 조직의 결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김종진을 필두로 각 지역에 배치된 동지들을 동원하여 각 마을을 돌아다니며 순회 강연을 실시하였으며, 순회 연극공연 등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이 조직의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 신민부 군정파가 관할하고 있던 북만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농민들의 경제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한인 농민들은 중국인 지주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재만 동포들의 생활은 계속해서 곤궁해 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만 동포들에게 반일·반공 사상이나 민족정신 같은 것은 현실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실제로 독립운동 자금이나 조직운영비의 명목으로 갹출되는 많은 돈은 한인농민들에게 경제적 부담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한족 총연합회가 주장하고 있는 농촌 자치 조직은 북만 동포들의 경제적인 사정과 독립운동 단체에 대한 인식을 고려한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북만지역 한인사회는 김종진·이을규 등 무정부주의자들이 추구한 농촌 자치 조직의 건설에 적극 동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의 동의를 바탕으로 한족 총연합회가 관할하던 지역에는 농촌 자치 조직이 결성되었다.

한편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이러한 농촌 자치 조직 하에서 생활하고 있는 농민들의 이익과 편의를 위하여 1929년 10월에는 산시참(山市站)에 정미소를 설치하여 운영하였다. 당시 중동선의 연선 일대에는 많은 동포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경작하는 농토에서 생산되는 미곡만도 매년 수만석에 이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한국인이 운영하는 정미소는 무링시엔(穆陵縣)의 황공삼(黃公三)이 경영하던 것밖에는 없는 형편이었다. 이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한인농민들이 중국 상인들에 의해 부당하게 당하는 불이익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정미소를 운영하였으며,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농촌 자치 조직을 통하여 공동판매·공동구입·경제적 상호금고의 설치 계획 등도 시도하였으나 계획대로 잘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둘째,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4년제 소학교와 3년제 중학교를 설립하여 교육 사업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학생들에게 무정부주의 상호 부조의 정신과 자주·자치 정신을 가르치고자 하였던 것이다.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성인교육에 대한 계획안도 수립하였다. 성인교육은 남녀 30세 이하, 20세 이상의 청·장년을 대상으로 계획하였다. 주된 내용으로는, 생활개선·직업 훈련·국민생활을 위한 상식 강좌와 군사훈련 등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교육받은 성인들을 중심으로 한족 총연합회의 군대를 조직하고자 하는 구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이들에 대한 순회강좌도 계획하였는데, 이 강좌의 내용은 무정부주의 이념의 고취·독립정신의 앙양·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세계정세·생활개선 등에 관한 것이었다.

한편 김종진과 이을규 등은 1년 동안 군사훈련을 받는 단기 훈련반도 조직하여 운영하고자 하였다. 이 훈련반은 중학교 출신들 가운데 성적이 우수한 자를 선발 대상으로 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한족 총연합회의 중견간부로서 채용하고자 하였다. 이밖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교포들의 생활 개선과 농업 기술의 지도 등을 위한 정기간행물의 간행과 순회문고의 설치 등도 계획하였다.

한족 총연합회가 계획했던 교육활동 가운데 실천된 것으로는 먼저 신민부 군정파가 설립했던 학교들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소학교를 운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중학교의 설립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 같다.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북만중학(北滿中學)을 설립하고자 북만중학기성회(北滿中學期成會)를 조직하고, 학교의 부지는 해림(海林)과 산시의 중간에 위치한 고령자(高領子)로 정하여 토지를 중국인 지주에게 조차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학교 설립을 위한 계획은 중도에 중단되고 말았는데 한족 총연합회의 주석인 김좌진이 1930년 1월에 공산주의자들에게 암살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북만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의 민심 안정과 지방의 치안 유지가 우선적으로 시급한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성인을 위한 교육계획안은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보인다.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농번기에는 동포들의 농사일을 거들며 그들과 고락을 같이 하였고, 농한기에는 사상 계몽과 생활 개선에 노력하였다. 또한 각 마을을 순회하면서 강연도 하고 학생들과 교사들로 구성된 간이 극단을 만들어 순회 공연 등도 하였다.

셋째로 한족 총연합회의 무장 투쟁은 공산주의자들과의 대결에 좀 더 많은 비중이 두어졌다. 당시 재만 조선인 반제 동맹 등 북만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공산주의 단체들은 한족 총연합회에 반대하고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공산주의자들은 한족 총연합회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동포들을 습격하여 사살하기도 하였고 한족 총연합회의 주석인 김좌진을 암살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장학량(張學良)의 동북군벌정권과 연합하여 공산주의자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0년에 있었던 5·30 간도 폭동사건 이후 더욱 그러하였다. 이 사건은 1930년 5월 30일 간도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대대적인 무장폭동이었다. 이에 대응하여 중국의 동북군벌은 동년 6월 「중한공산당취체변법(中韓共産黨取締辨法)」을 제정하여 공산주의자들의 토벌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때 한족 총연합회의 회원 중 남대관(南大觀)·백남준(白南俊) 등 10여 명은 중국의 공비토벌대장(共匪討伐隊長)인 길림성 군법처장(軍法處長) 왕과장(王科長)과 연합하여 공산주의자들의 토벌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무장 투쟁이 전개되기 위해서는 군자금이 필요하였으며,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이의 타개를 위해 우선 경제적 협동체인 농촌 자치 조직을 통해 항일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한족 총연합회의 이러한 구상은 한인 농민들 대다수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순탄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국내에 대원을 파견하여 군자금을 획득하고자 1930년 초 이달·이강훈(李康勳) 등을 국내에 잠입시켜 군자금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참고문헌
  • 박환, 『만주 한인 민족 운동사 연구』(일조각, 1991)
  • 『중국조선민족개방자취총서』2(민족출판사, 1999)
  • 『한국독립운동사사전』5(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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