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춘현 유격 총대

한자 琿春縣 遊擊 總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단체
설립자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훈춘현위원회)
설립 시기/일시 1933년 1월
최초 설립지 훈춘현 대황구 청수동
정의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훈춘현 위원회]가 길림성 훈춘현 대황구 일대에서 활동하던 영북(嶺北) 유격대와 연통립자(煙筒砬子) 일대에서 활동하던 영남(嶺南) 유격대를 통합하여 결성한 항일 무장 투쟁 단체.

개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중국 동북 지방[만주] 침략 이후 각 지역에서 여러 계열의 항일 의용군이 봉기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 산하의 동만 특별 위원회는 같은 해 12월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서 회의를 열고 유격대를 조직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연변 지역의 각 현위원회에서도 1932년 초부터 이 회의 방침에 따라 유격대를 결성키로 하였다.

이 때 중국 공산당 훈춘현 위원회가 1931년 10월 대황구 청수동에서 건립되었다. 이 조직은 이 해 가을의 추수 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 투쟁(春荒鬪爭)을 전개하여 다수의 한인 대중을 포섭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훈춘현의 항일 유격대는 연변 4개 현(縣) 가운데 가장 먼저 창건되었다.

즉 훈춘현 위원회 군사 부장 신춘(申春)의 지도로 대황구 두도령(頭道領)에서 1932년 1월 ‘별동대’가 조직되었던 것이다. 대장은 강석환(姜錫煥)이었고, 대원은 15명이었다. 이 해 6월 말 별동대를 기초로 하여 ‘황구(荒溝) 유격대(영북 유격대)’가 조직되었다. 대장은 역시 강석환(姜錫煥)이었고, 정치 위원은 박두남(朴斗南, 후에 변절)이었다. 대원은 20여 명이었다.

한편 훈춘의 남쪽 중·소 국경 지대인 연통립자(煙筒砬子)의 서구촌(서골)에서 1932년 3월에 20여 명 규모의 ‘돌격대’가 조직되었다. 대장은 강일무(姜一武)였다. 이 조직을 토대로 6월에 ‘연구(煙區) 유격대(영남 유격대)’가 세워졌다. 대장은 강일무, 정치위원에 임청(林靑, 漢族)이 임명되었다. 대원은 30여 명이었다.

1933년 1월 훈춘현 위원회는 2개의 유격대를 통합하여 ‘훈춘현 항일 유격 총대’를 조직하였다. 이 해 3월 중국 의용군 출신 30여 명이 가입하여 사기가 크게 고양되었다. 총대장에 공헌침[孔憲琛, 중국인], 정치위원에 박태익(朴泰益)이 임명되었다. 대원은 약 120명이었고 100여 자루의 총을 갖추었다.

영북 유격대가 1대대로 편제되었다. 대장은 총대장이 겸임하고 정치 위원은 윤석(尹錫元)이 맡았다. 영남 유격대는 3대대로 되었는데, 대장은 임청, 정치 위원은 박두남이 맡았다.

훈춘현 유격대는 연변의 훈춘현 및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일대에서 치열한 항일 및 반봉건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1933년 9월 6일 치른 동만주의 동녕현(東寧縣) 전투는 매우 주목된다.

이 전투에는 지청천(池靑天)이 거느리는 한국독립군과 오의성(吳義成)이 거느리는 중국 의용군인 길림 구국군, 그리고 중국 공산당 계열의 왕청현 유격대 등이 함께 참가하였다. 따라서 동녕현 전투는 중국 공산당 계열의 항일 유격대와 중국 의용군, 민족주의 계열 독립군인 한국 독립군 등이 연합하여 공동으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34년 3월 말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방침에 따라 연변지역의 연길·왕청·화룡 유격대와 함께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독립사로 확대개편 되었다. 이 해 4월 제2군 독립사의 제4단으로 편제되었는데, 다수의 대원들이 한인이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훈춘현 유격총대가 성립된 후 일본군이 연동립자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1932년 7월 황정해가 100여 명의 일군을 발견하고 즉시 훈춘현 유격총대에 알렸다. 이에 유격대에서는 매복 공격을 하자 일군은 1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였다. 같은 시기 훈춘현 유격 대원이 반석향 장류구에 있는 일인 축산 회사의 목장을 습격하여 소 160여 마리를 노획하였다.

1933년 봄에는 훈춘의 토호들과 친인상인 등이 동흥진에 군수품 상점을 세우기로 하고 25대의 마차에 상품을 싣고 훈춘에서 동홍진으로 출발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유격대에서는 장수림에게 대원 20여 명을 거느리고 이들을 습격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장수림 등은 그들이 동훙진으로 가는 길목에 매복하였다가 습격하여 25대의 마차에 실린 식량과 피복 등을 노획하였다. 1933년 5월에는 훈춘현 유격 총대 소대장 최진과 박창준이 대원들을 거느리고 소륙도구 다리목에서 일군이 호소하는 20여대의 마차를 습격하여 일군 9명을 사살하고, 밀가루 40여마대를 노획하였다.

1934년 4월 6일 40여 명의 유격 대원들은 탑자구 집단 부락의 자위단을 야습하여 부단장 신연택을 포살하고, 12자루의 보총과 천여발의 탄약을 노획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자위단의 본부를 불사르고, 축산조합의 소 3마리를 가지고 갔다. 그 해 5월 12일 유격대원들은 오두구 집단 부락을 습격하여 4명을 죽이고, 2명을 부상시켰으며, 13명을 생포하였다. 또한 17자루의 보총을 비롯한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 조선 민족 발자취 총서』3 (북경 민족 출판사, 1995)
  • 『한국 독립운동사 사전 5』(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4)
  • 양소전 저 안화춘 등 역, 『중국 조선족 혁명 투쟁사』(연변인민출판사, 2009)
  • 김춘선, 『중국 조선족 통사』(연변인민출판사,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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