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正夢 中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
| 설립자 | 이동휘|유일우|김필선 |
| 개교 시기/일시 | 1913년 11월 15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최초 설립지 | 요령성 장백현 장백현성 |
1910년대 이동휘·김필선·유일우 등이 장백현에 설립한 중등 민족 교육 기관.
장백현에는 1913년 11월에 유일우가 교장을 맡으며 설립한 한교중학교(韓僑中學校)와 1915년 한족 학교인 제일정몽학교(第一正蒙學校)의 부속학교(학급 수 1개)가 있었다. 또한 여자학교와 2개 학급의 장맹학원도 있었다. 지금 학교의 위치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학교는 제일 정몽 학교이다.
이곳 장백현에서 3·1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3월 16일 만세 가두시위를 시작으로 3월 17일, 4월 8일에 해방가(장백대가)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또한 장백현에 부속한 한교향약에서는 1920년 5월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위해 녹강촌에서 창흥 상회를 발기하였다.
장백진에서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정몽학교 교사 김관해를 비롯하여 수십 명의 정몽학교 학생들이 3월 말경 장백현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또한 정몽 학교는 장백진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군 단체인 광정단의 간부 출신 오주환이 1925년 제1정몽학교 교장을 맡는 등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하였다. 광정단은 1922년 대한 국민단·대진단·대한독립군비단·흥업단 등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 발전한 독립군단이었으며, 이후 정의부로 통합되어 갔다.
또한 정몽 학교 후원을 위한 후원회가 조직되었다. 1928년 2월 17일 개최된 제1회 정기총회는 회장 설관협(薛寬協) 주재 하에 개최되었다. 주요부서는 의사부와 서무부 등이었다. 의사부는 각 면장 이후 구장으로 구성되어 예산편성 등을 담당한 반면 서무부는 유력한 청년부원 6인으로 구성되어 학교 운영과 관련된 일체 사무를 당당했다. 또한 학생들 향학열을 고취시키기 위한 기숙사도 마련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행사나 체육시간에 애창된 「복수회포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수회포가」
제1절 단군자손 우리 소년, 국치민욕(國恥民辱) 네 아느냐
부모쟝사(父母葬事) 할 곳 없고 자손까지 종 되엿다.
텬디(天地) 넓고 너르것만 의지할 곳 어대더냐
간 대마당 천대받고 까닭없이 구축되네
제2절 나라 없난 우리 동포, 사라잇기 붓그럽다
땀을 내고 피를 흘녀 나라 수치 싯처 놋코
뼈와 살은 거름되여 논과 밧에 유익되세
우리 목적 이것이니 잇지 말고 나아가세
제3절 부모친척 다 바리고 외국나온 소년들아
우리 원수 누구던냐 이를 갈고 분발하여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갓 하는 소레에 승전고를 둥둥 울녀
(후렴) 이젓나 이젓나 우리 원수가
합병한 수치를 네가 이젓나
자유와 독립을 다시 찻기는
우리 헌신함에 전혀 잇도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의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3년 11월 15일 개교식 당시 정몽 중학의 교장은 유일우(劉一優), 교사는 환흥(桓興)과 유모(劉某) 등이었다. 주요 과목은 역사·한문·중국어·수학·윤리·화학·생물·작문 등으로 편성되었다. 학생 수는 갑반 4명, 을반 11명, 병반 13명 등 30여 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