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育英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대도구 연화동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
| 설립자 | 개신교인 |
| 개교 시기/일시 | 1910년대 초반 |
| 최초 설립지 | 장백현 대도구 |
1910년대 초반 장백현 대도구 연화동에 정착한 한인들 중 개신교인이 설립한 민족교육 기관.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따른 위기의식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연해주 등지로 이주가 급증하였다. 한인사회에 형성과 정착에 즈음하여 개신교·천주교·천도교·대종교 등도 유입되기 시작했다. 개신교계의 선교는 의료사업과 함께 교육사업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전도를 통한 교세 확장은 물론 민지계발과 독립전쟁을 수행하는 독립군 양성도 모색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동휘는 ‘삼국전도회’를 조직하여 각지를 순행하면서 ‘1교1당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주한인들을 분발시켜 개량 서당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촉발시켰다. 체육시간에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과 병식체조 등이 행해졌다. 이러한 한인사회의 대동단결 모색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려는 의도는 한글·역사·창가교육의 강화로 귀결되었다. 아울러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1914년 7월 16일 당시 육영 학교의 교사는 이태걸이며, 재학생은 32명이었다. 교사는 주민들 공동기금으로 마련하였다. 주요 교과목은 한글·지리·습자·이과·수신·작문·산술·창가·체조·성경 등이며, 교재는 『유년필독』 등을 비롯하여 교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시기에 따라 교직원이나 재학생 수에 있어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다. 이주 한인 증가와 근대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는 학생 증가로 이어졌다. 다만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인 곤궁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성향은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1915년 모든 한인학교에 중국어가 필수과목으로 편성된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아울러 1920년대 중반 사회주의이념의 확산으로 성경이 차지하는 비중은 크게 약화되었다.
장백현에 설립·운영된 민족 교육 기관은 항일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민족정체성 정립과 백절불굴의 저항정신을 일깨우려는 민족교육은 국어·역사·지리와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체육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경 교육을 통한 ‘절대적인 평등’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지역의 교회는 단순한 구복을 위한 기도처가 아니라 이주 한인 공동운명체로서 기능하였다.
육영 학교에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행사나 체육시간에 애창된 「복수회포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수회포가」
제1절 단군자손 우리 소년, 국치민욕(國恥民辱) 네 아느냐
부모쟝사(父母葬事) 할 곳 없고 자손까지 종 되엿다.
텬디(天地) 넓고 너르것만 의지할 곳 어대더냐
간 대마당 천대받고 까닭없이 구축되네
제2절 나라 없난 우리 동포, 사라잇기 붓그럽다
땀을 내고 피를 흘녀 나라 수치 싯처 놋코
뼈와 살은 거름되여 논과 밧에 유익되세
우리 목적 이것이니 잇지 말고 나아가세
제3절 부모친척 다 바리고 외국나온 소년들아
우리 원수 누구던냐 이를 갈고 분발하여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갓 하는 소레에 승전고를 둥둥 울녀
(후렴) 이젓나 이젓나 우리 원수가
합병한 수치를 네가 이젓나
자유와 독립을 다시 찻기는
우리 헌신함에 전혀 잇도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의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