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維新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십팔도구 대서가리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
| 설립자 | 이주 한인 |
| 개교 시기/일시 | 1910년대 초반 |
| 개칭 시기/일시 | 1915년 |
| 최초 설립지 | 장백현 십팔도구 |
1910년대 초반 장백현 십팔도구 대서가리에 정착한 이주 한인들이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따른 위기의식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연해주 등지로 이주가 급증하였다. 그 가운데 이동휘는 ‘삼국전도회’를 조직하여 각지를 순행하면서 ‘1교1당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주 한인들을 분발시켜 개량서당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촉발시켰다. 이들 학교의 체육시간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과 병식체조 등을 가미했다. 한인사회 대동단결 모색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려는 의도는 한글·역사·창가교육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는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교직원이나 재학생 수에 있어 일부 변화가 있었으나 큰 차이는 없었다. 이주 한인 증가와 근대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는 학생 증가로 이어졌다. 1915년 교명을 명신학교로 변경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인 곤궁 등으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성향은 점차 쇠퇴하는 분위기였다. 1915년 모든 한인학교에 필수과목으로 편성된 중국어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장백현에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은 항일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민족정체성 정립과 백절불굴의 저항정신을 일깨우려는 민족교육은 국어·역사·지리와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체육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경 교육을 통한 ‘절대적인 평등’은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교회는 단순한 구복을 위한 기도처가 아니라 이주한인 공동 운명체로서 기능하였다.
유신 학교에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행사나 체육시간에 애창된 「복수회포가」 등은 이를 반증한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의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1914년 7월 16일 현재 유신 학교의 교사는 이성일과 김창영 등이며, 재학생은 17명이었다. 주요 교과목은 한글·지리·습자·이과·수신·작문·산술·창가·체조·습자 등이며, 교재는 『유년필독』 등을 비롯하여 교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학교 경영권은 근동실업 회사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