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여학교

한자 三聖 女學校
분야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유형 기관 단체/학교
지역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삼원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기독교 민족여학교
설립자 한경희
개교 시기/일시 1914년 10월
최초 설립지 유하현 삼원포
정의

1912년 유하현 삼원포에 설립된 은양학교에서 분리된 기독교계 민족 여학교.

교육 목표(교훈 포함)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일환으로 신민회의 이시영·이회영 일가와 안동 혁신유림 이상룡·김대략·김동삼 등은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이주 한인의 권익옹호와 대동단결을 위한 자치단체인 경학사를 조직했다. 이어 독립군 양성을 위한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등 중장기적인 독립전쟁을 실천에 옮겼다. 1912년 흉년으로 이주한인들은 경제적인 곤경에 처하여 자제들 교육을 방기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에 삼원포 교회방기전 장로는 안동식·이호림·김세택 등과 상의하여 학교설립기성회를 조직한 후 교회 내에 은양학교를 설립했다. 학생 수가 급증하자 한경희 목사는 1914년 10월경에 삼성 여학교를 독립시켰다. 학교 설립의 목적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항일의식을 일깨우는데 중점을 두었다.

변천

1914년 10월 은양학교에서 독립한 삼성 여학교의 교육 내실화를 강화하기 위해 힘썼다. 학부형회는 재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19년 경영난으로 일시 폐교하였다가 다시 개교했다. 폐교 당시 일부 여학생은 은양학교로 전학하기도 하였다.

교육 활동

학제는 개교 초기부터 4년제로 운영하였다. 은양학교와 연합운동회를 개최하는 등 여학생들에게 상무정신를 고취시켰다. 교재는 교사들이 직접 편찬한 교재를 사용하였다. 3·1 운동기념일이나 국치기념일에는 교실에 태극기를 걸어놓고 애국가 제창과 만세 삼창 등을 불렀다. 또한 웅변대회 개최 등을 통하여 식민지 현실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웠다.

교가와 상징물

교가는 학생들에게 잠재된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동시에 투철한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내용이었다.

제1절 대한민족 자주독립 굳은 기치는

세 번 길을 흐른 길이 우리 학교일세

후렴 합심하는 마음으로 나아갑시다

삼성학교 만세라

만세 만세 삼성학교 만세

구원하는 목적으로 노래 부르세

삼성학교 만세라

제2절 백절불굴 망명장애 용감력으로

만리종진 일보일보 전진하면서

제3절 대한민국 8도에 선도자 되려면

유진무퇴 사자로 신을 신고서

현황

1914년 10월 개교 당시 삼성 여학교의 초대 교장은 한경희 목사가 맡았다. 교사는 2명이고, 그 중 여교사 1명을 두었다. 학생 수는 60여 명이었다.

참고문헌
  • 중국조선민족교육과학연구소, 『중국조선족학교지』(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8)
  • 『동아일보』(1929. 1. 18, 1935. 2. 7)
  • 일본관동도독부, 「通化縣과 柳河縣 등지의 독립운동 상황」,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1)』, 1919.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 일본 외무성, 「排日鮮人 狀況報告의 건(機密公 제13호)」,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13)』 (1919),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 http://e-gonghun.mpva.go.kr
  • 일본 외무성, 「柳河縣에서의 鮮人의 現況(秘受12205호-關機高收제8948호-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0)』(1921),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 일본 외무성, 「柳河地方에서 朝鮮人 耶蘇敎徒의 對 大韓統義府와의 關係(機密受제343호-關機高收제11362호-1)」,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1924),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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