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大興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장백조선족자치현 십팔도구 덕신리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
| 설립자 | 근동실업회사 |
| 개교 시기/일시 | 1910년대 전반 |
| 최초 설립지 | 장백조선족자치현 십팔도구 |
1910년대 초반 장백조선족자치현 십팔도구 덕신리에 정착한 이주 한인들이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
을사늑약 이후 식민지화에 위기의식과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동북지역이나 러시아연해주 등지로 이주가 급증하였다. 그런 가운데 이동휘는 ‘삼국 전도회’를 조직하여 각지를 순행하면서 ‘1교 1당 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주 한인들을 분발시켜 개량서당이나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촉발시켰다. 체육시간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과 병식체조 등을 가미했다. 한인사회 대동단결 모색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려는 의도는 한글·역사·창가교육 강화로 귀결되었다. 중국의 동화정책에 맞서 민족정체성을 일깨우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1914년 7월 16일 기준으로 교사는 한택수였으며, 재학생은 15명이었다. 주요 교과목은 한글·지리·습자·이과·수신·작문·산술·창가·체조·습자 등이며, 교재는 『유년 필독』 등을 비롯하여 교사가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교직원이나 재학생 숫자만이 부분적으로 변화되었으나 커다란 차이점은 없다. 이주 한인 증가와 근대교육에 대한 인식 변화는 학생 증가로 이어졌다. 1915년 교명을 명신학교로 변경하였다. 1915년 모든 한인 학교에 필수과목으로 편성된 중국어는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30년대까지 운영되면서 장백조선족자치현 십팔도구 민족 교육 중심 기관으로서 역할을 다하였다.
장백조선족자치현에 설립·운영된 민족 교육 기관은 항일 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민족 정체성 정립과 백절불굴의 저항정신을 일깨우려는 민족 교육은 국어·역사·지리와 군사 훈련에 버금가는 체육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경 교육을 통한 ‘절대적인 평등’은 자유와 민주 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교회는 단순한 구복을 위한 기도처가 아니라 이주 한인 공동 운명체로서 기능하였다.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 행사나 체육 시간에 애창된 「복수 회포가」 등은 이를 반증한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의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