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菊山 小學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백산시 무송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
| 설립자 | 김성규 |
| 개교 시기/일시 | 1913년 11월 |
| 최초 설립지 | 무송현 하북 |
1913년 11월 무송현 하북 지역에 정착한 김성규 등의 주도로 설립된 민족 교육 기관.
국산 소학의 교육 목표는 민지계발(民智啓發)과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독립군 양성이었다. 체육시간이나 연합 대운동회에서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 훈련과 각종 경기종목을 편성하였다. 한인 사회 대동단결 모색과 시세 변화에 부응하려는 의도는 한글·역사 ·창가 교육 강화로 귀결되었다. 이는 중국의 동화 정책에 맞서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무송 지역 이주 한인들은 학교 설립 의연금으로 300원을 모금하였다. 1915년 당시 국산 소학의 설립자 겸 교장은 김성규, 교원은 윤갑이었다. 재학생은 12명에 불과한 소규모였다.
국산 소학은 교직원이나 재학생 숫자만이 부분적으로 변화되어 왔으나 커다란 차이점은 없다. 다만 일제의 탄압과 경제적인 곤궁 등으로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성향은 점차 쇠퇴하는 분위기를 보였다. 1915년 모든 한인 학교에 중국어가 필수 과목으로 편성되었다는 점이 이러한 사실을 잘 방증한다.
무송현 지역 민족 교육 기관은 항일 의식 고취에 전력을 기울였다. 민족 정체성 정립과 백절불굴의 저항 정신을 일깨우려는 민족 교육은 국어·역사·지리와 군사훈련에 버금가는 체육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또한 배일사상을 고취시키는 창가 교육은 이곳 교육 활동을 그대로 보여준다.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 행사나 체육 시간에 애창된 「복수 회포가」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복수회포가」
제1절 단군자손 우리 소년, 국치민욕(國恥民辱) 네 아느냐
부모쟝사(父母葬事) 할 곳 없고 자손까지 종 되엿다.
텬디(天地) 넓고 너르것만 의지할 곳 어대더냐
간 대마당 천대받고 까닭없이 구축되네
제2절 나라 없난 우리 동포, 사라잇기 붓그럽다
땀을 내고 피를 흘녀 나라 수치 싯처 놋코
뼈와 살은 거름되여 논과 밧에 유익되세
우리 목적 이것이니 잇지 말고 나아가세
제3절 부모친척 다 바리고 외국나온 소년들아
우리 원수 누구던냐 이를 갈고 분발하여
백두산에 칼을 갈고 두만강에 말을 먹여
앞으로 갓 하는 소레에 승전고를 둥둥 울녀
(후렴) 이젓나 이젓나 우리 원수가
합병한 수치를 네가 이젓나
자유와 독립을 다시 찻기는
우리 헌신함에 전혀 잇도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의 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 의식과 미래 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