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光振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녕현 동성구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민족 교육 기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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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이주 한인 |
| 개교 시기/일시 | 1910년대 |
| 최초 설립지 | 동녕현 동성구 |
1910년대 초반 동녕현동성구에 정착한 이주 한인들이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
을사늑약 이후 많은 한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하여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연해주 등지로 이주하였다. 이동휘는 ‘삼국 전도회’를 조직하여 각지를 순행하면서 ‘1교 1당 운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활동은 이주 한인들의 개량 서당과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을 촉발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1913년 8월 이곳 한인들도 광진학교를 설립하였다. 체육시간에는 실전을 방불케 하는 군사훈련과 병식 체조 등을 하였다. 한인 사회 대동단결 모색과 시세변화에 부응하려는 의도는 한글·역사·창가교육 강화로 귀결되었다. 중국의 동화 정책에 맞서 민족 정체성을 일깨우려는 목적도 내포하고 있었다.
이주 한인의 증가와 근대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로 학생 수가 증가하였다. 1915년 모든 한인 학교에 필수 과목으로 중국어가 편성되었다. 1922년에는 대한 독립 군단이 이곳에 성동 사관 학교를 설립하는 등 독립군 양성을 위한 중심지로 변모하였다.
동녕현에 설립·운영된 민족 교육 기관은 항일의식 고취와 대동단결을 도모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민족 정체성 정립과 항일 정신을 일깨우려는 민족 교육은 국어·역사·지리와 군사 훈련에 버금가는 체육 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성경 교육을 통한 ‘절대적인 평등’은 자유와 민주 주의에 대한 관심을 촉발시켰다. 지역의 교회는 단순한 구복을 위한 기도처가 아니라 이주 한인 공동 운명체로서 기능하였다.
교가는 없었으나 당시 성행한 창가를 널리 애창하였다. 각종 학교 행사나 체육 시간에 애창된 「복수회포가」 등은 이를 반증한다. 조국을 빼앗긴 망국한과 실의를 노래하면서 조국 자유와 독립을 회복하는데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 일제와 싸워서 이를 물리치자는 도전적인 용기와 기백을 보여주자는 의미심장한 가사이다. 당시 창가교육은 청소년들에게 백절불굴의 항일의식과 미래지향적인 가치관을 정립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