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集安市 楡林鎭 迎水 朝鮮族 小學校 |
|---|---|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 |
| 시대 | 현대/현대 |
| 성격 | 학교 |
|---|---|
| 설립자 | 김시용 |
| 개교 시기/일시 | 1936년 |
| 개칭 시기/일시 | 2004년 8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8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65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통화지구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 |
| 현 소재지 | 집안시 |
길림성 통화지구 집안시 유림진 영수촌에 있던 조선족 소학교.
집안시 유림진 영수 조선족 소학교의 교육 목표는 ‘진보, 책임, 단결’의 교훈 아래 학생들을 씩씩하고 건강하며 민족의 문화도 전승한 어린이로 키우는 것이다.
집안시 유림진 영수 조선족 소학교의 전신은 1936년에 갑장 김시용이 한국의 이봉과를 교사로 초빙하여 설립한 것이다. 초기 학교 명칭은 유림 강구 조선인 사립 학교였고 당시 학생은 27명이었으며 개설한 교과목은 조선어, 산수, 일어 등이었다. 1937년 7월에 강구 명신 국민학교로 개칭하였다. 이 때 교장은 이운봉이었고 교사 2명에 학생은 3개 학급에 43명이었다. 1942년에 수풍 수력 발전소가 세워지면서 원래의 마을이 해체되면서 학교를 고산자(현재의 영수촌)로 옮겨 갔다.
1948년에는 한두 학교를 통합하여 고산자소학교가 되었다. 1958년에 다시 조선족 소학교로 독립하였는데 당시 교사 8명에 학생은 6개 학급 106명이었다. 1965년에 서민들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조치로 또다시 민족 연합 학교가 되었다가 1981년에 한인[조선족] 농민들의 의견으로 학교를 독립시켰다. 당시 학생은 93명, 교사는 8명이었다.
집안시 유림진 영수 조선족 소학교가 독립한 후 촌민과 학교 구성원들의 피땀으로 교사를 새로 건설하였고 1984년에는 지구급의 교사 건설 선진 단위의 칭호를 수여받았으며 교육 수준도 전례 없이 향상하였다. 지구급과 현급의 우수 교사, 교수 능수 등 선진인물들이 용솟음쳐 나왔으며 교사들이 쓴 여러 편의 논문이 성, 지구급 우수상을 수상하였다. 졸업생들 가운데는 많은 인재들이 나와 각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집안시 유림진 영수 조선족 소학교는 1998년 당시 학생 73명에 교직원 11명이었다. 건축 면적은 423㎡이었고 소장 도서 256책이었다.
2004년 8월에 집안시 소속의 12개 조선족 중소학교를 통합하여 집안시 조선족 학교로 바뀌면서 유, 초, 중 단계 교육을 포함한 9년 일관제 종합성 기숙학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