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尙志市 韓人 |
|---|---|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역사/근현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에 있는 한인.
상지시는 일찍 1900년대 초부터 한국 독립과 민족 해방을 위해 활약하였던 지역이다. 이상설·김좌진·김규식·정신·김동삼 등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특히 이청천이 이끈 한국 독립군은 상지 지역 여러 곳에서 일본군의 침략에 대항해 싸워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면서 독립군의 군위를 떨쳤다. 동시에 상지시는 신민부 본부와 제4총판, 『신민보』 창간, 한족 총연합회, 한국 독립당 및 한국 독립군,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 등 20여 개 항일 단체들이 설립되고 활동하였던 지역이다.
1927년 10월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가 건립된 후, 1930년 8월 중국 공산당의 첫 기층 조직인 주하 당 지부가 조직되었다. 뒤이어 주하현 특별 지부, 주하현 위원회, 주하 중심 현위원회의 성립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선인들이 설립 초기부터 서기·부장·현위 위원·비서장·순시원 등 지도부 인원으로 활약하였다.
동시에 상지시는 만주 지역에서 가장 일찍 항일 유격대가 설립되어 항일 근거지를 창설했던 곳 중의 하나이다. 훗날 동북 항일 연군 제3군으로 발전한 최초 조직인 주하 동북 유격대의 창립지이다. 주하 동북 유격대의 설립 당시 13명 대원 중 창시자의 한 사람인 이계동(李啓東)을 비롯한 9명이 한국인이었다.
그리고 중공 북만성 위원회 서기를 담당했던 김책(金策), 하동 유격 사령, 동북 항일 연군 제3군·제6군·제8군·제9군, 의동 판사처(依東辦事處) 주임을 담당했던 이복림(李福林), 중공 주하현 철북구 위원회 서기, 연수현·통하현 위원회 특별 지부 서기를 담당했던 이추악(李秋岳), 항일 연군 제3군 군장, 제3로군 총 참모장을 담당했던 허형식(許亨植) 등 많은 항일 투사들이 1930~1935년에 상지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빛나는 전공을 세웠다. 상지 인민 항일 투쟁사에서 한국인의 투쟁은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북만 지역 항일 투쟁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19년 우지미하 두가구촌(烏吉密河杜家溝村)에서 20세대 한인들이 김기우의 주선 하에 40여 ㏊ 수전을 개발하기 시작하여 상지 지역에서의 논농사 역사가 시작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전까지 80여 곳에 400여 ㏊ 논을 개척하여 당시 전 지역적으로 이룬 논 면적의 82%를 차지했다.
1949년 이후 수전 농토 기본 건설, 수리화 건설, 수전 농사 기계화 등 면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벼 농사 과학기술의 보급과 제고, 우량 품종 보급 등 면에서 한국인들은 상지 지역의 수전 농사 발전의 본보기였으며 특별한 공헌을 하였다.
상지는 1947년 3월 송강성 첫 조선족 중학교가 설립되면서 부터 민족 교육의 발전과 함께 교육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었다. 교수 내용이 꾸준히 제고되어, 지금까지 상지시는 2,040여 명에 달하는 학생을 대학으로 입학시켰다. 그 중 30명은 베이징 대학과 칭화 대학에 입학하는 쾌거를 거두면서 민족 교육의 요람으로, 수많은 영재들을 육성, 배출하였다.
『상지시 명인록』에 수록된 상지 출생 혹은 이 곳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 각 지역, 각 분야에서 엘리트로 발탁된 한인 우수 인물들은 197명으로서, 『상지시 명인록』에 수록된 총 인원수의 21%를 차지하며 조선족 인구가 상지시 총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례보다 17%가 높다.
1946년 상지시 하동에서 북만 지구 한인 간부 강습반을 꾸려 500명에 가까운 민주 연맹 간부를 양성하여 당시의 사회와 정치적 수요를 만족시켰다. 역사·사회·정치·경제 건설·문화·교육·체육 위생 등 분야에서 제1대 주하현 위원회 서기, 제일 첫 전국 인민 대표, 전국 당 대표, 제일 처음 논농사 개척, 제일 첫 전국 노동 모범으로 조선족들이 차지하여 상지 지역사에서 제 1위를 차지하는 사연과 인물이 무려 70건에 달해 이 지역 조선족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다.
중국의 개혁개방과 함께 관념 갱신이 빨라지고 시대 발전에 따라 상지시 조선족들은 단일 농경 생산에서 벗어나 도시 진출, 해외 노무 수출 등 다양한 분야로 삶의 활동 무대를 넓혀 갔다.
현재까지 4천여 명이 상지시를 떠나 전국 각지에서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있으며 연 인원수로 1만 2천여 명이 한국을 비롯한 세계의 17개 나라에서 외화를 벌어들여 그 누적 액수가 1억 달러를 훨씬 넘어 상지시 재정 경제 발전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