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송화강』이 걸어온 역사

한자 松花江이 걸어온 歷史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9년 5월 2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6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1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4년-201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0년-2011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12년 12월 17일
정의

하얼빈시 조선 민족 예술관에서 발행하는 조선족 문학지인 『송화강』잡지의 역사.

개설

『송화강』잡지는 한국어로 출간되는 중국하얼빈 조선 민족 예술관 소속의 문학잡지이다. 지금은 월간인데 부정기 간행물, 격월간 등의 역사를 거쳤다. 『송화강』이란 잡지 이름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하얼빈을 가로 질러 지나가는 ‘송화강’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송화강』잡지는 1959년 5월 20일에 창간되었다. 중국 내에서 『연변 문학』잡지 다음으로 일찍 창간된 문학 잡지였다. 그 당시는 중국 국내에서 강철과 식량을 위주로 하는 대약진[중국 극좌의 혁명]의 기세가 좀 누그러지기는 했지만, 아직까지 그 운동의 교훈을 받아들이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하얼빈시 민족사무위원회 그리고 하얼빈시 조선족문화관 지도자들은 대약진의 요란한 구호들이 지나간 후 민족적 생명력을 고양하기 위해 『송화강』잡지를 창간했다.

발행 경위

잡지 창간을 제일 처음 제안한 사람은 서재수였다. 첫번째 어려움은 편집인재의 부족이었다. 당시 오상에서 교원을 지내던 문학인 이경희 선생을 하얼빈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당시 하얼빈 조선족문화관 관장이었던 전억열이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서기 주덕해를 찾았다. 주덕해는 ‘연변 문예’에 재직 중인 김창석을 하얼빈 조선족문화관으로 파견하여 『송화강』잡지를 같이 꾸려 나가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얼빈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근무하고 있던 서영훈이 잡지 창간 제안을 동조하였고, 창간 후 주무기관 담당자로서 잡지 감수를 맡았었다. 당사자들에 대한 조사 결과 처음 주필은 서재수였고, 그 후 그는 문화관 관장으로 승직하고 이경희가 주필을 맡아 1991년까지 잡지를 주도하였다.

문화 대혁명의 시작[1966년]으로부터 14년이란 기나긴 세월 당시 중국의 폭력적인 극좌 노선의 피해로 정간이 되었지만 다시 복간이 될 수 있었다. 그만큼 『송화강』은 민족 문학 잡지로서의 존재 가치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송화강』 잡지는 한인[조선족] 산재지역에서 출판, 발행된다는 특정적인 환경의 제약과 중국의 사회정치 풍향에 따라 이러저러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했지만, 53년이란 기나긴 세월 죽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온 우리말 문학지이다.

『송화강』잡지는 비록 초기에 ‘내부 간행물’로 출판 발행이 되었지만 관련 부문의 출판 허가를 받고 발행되는 잡지이기에 창간호부터 감수 문제가 가장 큰 문제로 제기되었다. 창간호는 당시 ‘연변 문예’의 부주필로 있다가 전근되어 온 김창석 선생이 편집했고 하얼빈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서명훈 선생이 감수를 담당했다. 한때는 문화관이 도리구선전부에 속하면서 잡지의 내용을 도리구선전부에 구두로 설명하는 방식으로 출판 허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적으로 여의치 않아 문화관에서 편집을 하고 하얼빈시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감수하는 방식으로 출판하였다. 안타깝게도 문화 대혁명으로 인하여 1966년에 36기를 출판하고 정간되었다.

초기 수록작품 장르와 참여 문인들

그 당시의 편집은 차례로 김창석, 서재수, 이삼월[이경희]이 맡아서 했다. 발행 부수는 2천부 정도였고 매년 4~5기를 출판 발행했으며 일부는 무료배포 하고 일부는 예약금을 받은 후 자체발행을 했다. 창간호로부터 정간이 될 때까지 발행된 『송화강』잡지의 작품을 훑어보면 시 작품이 많았다. 그 외에 연창 자료, 소설 등이 있으며 평론도 있기는 했지만 수량이 적었고, 문학 지식을 담은 문학 강의나 창작담 같은 것이 있었다.

시는 60년대 초 연변의 기성 시인들인 김철, 임효원, 김창석, 리행복, 한원국, 리상각 등이 『송화강』에 참여하여 시작품의 수준을 높였고 당시 흑룡강성의 젊은 시인들인 박종현, 리오상, 김려수, 동일호, 철민, 김위현, 세인, 장춘수, 허도남, 배창근, 미령재, 한병국, 박찬태, 강효삼, 박철준, 김동진, 한춘 등이 수준 높은 작품을 『송화강』에 수록하였다. 그때만 해도 소설 창작은 맹아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소설의 틀이 잡혔다고 할 수 있는 작품을 내놓은 작가로는 심상직, 서재수, 김호봉, 남일해, 배창조, 정기수 등을 들 수 있고, 희곡 작품으로는 김종의 희극들을 들 수 있다.

광복 직후 북만 지구 민족 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던 3지대가 연변 지구로 나간 후 문화의 황무지나 다름없던 흑룡강성에서 성 소재지인 하얼빈시의 『송화강』잡지는 점차 극좌로 나가고 있던 당시의 정치 영향을 상대적으로 비교적 적게 받았다. 이런 정치 기후는 작가 양성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 주었다. 비록 부정기적으로 출판, 발행 되는 내부 간행물이기도 했지만, 문화 대혁명 직전까지 36기를 꾸려오는 동안 흑룡강성 조선 민족 문학은 『송화강』이란 이 문예지를 통해 그리고 후에 나온 「흑룡강 조선 문보」문예부간, 조선말 방송국 등과 자연스런 협력을 통해 흑룡강성 작가군 형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영향

흑룡강성 조선족 문학의 많은 발전에 고무되고 있을 때 ‘문화 대혁명’이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정치 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평소에는 눈에도 잘 띄우지 않는 내부 간행물이었지만 당시의 시위[하얼빈시 공산당위원회]에서는 방대한 사업대를 파견하여 잡지에 나간 작품들을 검열했고 ‘삼가촌’을 잡아내고 ‘잡가’를 사출해내려고 혈안이 되어 날뛰었다.

이 당시 『송화강』잡지에 나간 작품 중 80% 이상이 독초가 아니면 문제가 있는 걸로 지적된 걸로 알려진다. 그 중 ‘우화 3편’은 모택동을 공격했다는 죄명까지 씌웠다. 이런 치명적인 죄명을 쓰게 된 당사자들은 비록 끌려나오지는 않았더라도 극심한 심리적 고통에 시달렸던 것이다. 두말 할 나위 없이 엉터리란 것이 뻔했지만 엄숙하게 진행된 극좌 노선이어서 그 피해가 얼마나 큰지 이루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복간과 시련

그렇게 잔혹했던 문화 대혁명도 지나가고 1981년 말에 『송화강』잡지는 끝내 복간이 되었다. 『송화강』잡지는 복간이 되면서 정기 간행물로 공개적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인쇄, 장정, 삽화도 새롭게 하고 내용도 매우 충실해져 공개 간행물다운 새로운 면모로 독자들과 대면하게 되었다.

이때는 편집 대오도 강화되고 조직 구성도 명확해졌다. 주필은 서재수가 맡았고 편집 위원은 이삼월[이경희]과 김종운 등이었다. 그 후 이삼월이 주필을 담당하고 김종운, 박길춘, 김금자, 박현철, 양학수, 윤송봉, 구용기, 이금석, 전경업 등이 편집부에서 일했다. 이삼월이 퇴직한 후 편집으로 일한 사람으로는 윤송봉, 구용기, 공호림, 이금석, 전경업, 이호원, 홍군식, 최미령, 방정화김동규 등이다. 잠시 주필을 담당했던 사람은 윤송봉이고 1995년부터 구용기가 주필을 맡아왔는데 그 사이 이금석이 1년, 이호원이 4년 주필을 했다. 잡지에 나가는 작품의 장르도 적절히 안배하였다. 희곡 작품을 대폭적으로 줄이고 시, 소설, 수필, 실화 문학, 문학 비평 등으로 문학적인 성격을 강화했다. 독차 계층의 여러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여러 장르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수록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작가들이 편집자의 기조에 맞추어 작품을 쓸 필요가 없고 어디까지나 자기들의 장점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송화강』잡지에서는 시종일관 ‘백화제방’ 방침을 견지했다.

중국에서 전면적으로 잡지를 정돈할 때 『송화강』은 지방 당 조직으로부터 등록번호를 취소당한 적이 있었다. ‘자산 계급 자유화’에 걸린 것도 성인소설 같은 것을 낸 탓도 아니었다. 중앙에서 지방에 배정한 잡지 수가 적어 다른 한족 간행물들을 살리기 위해 출판 총서의 결정을 어기면서 『송화강』을 희생시킨 것이다.

그렇지만 중국에서 조선 민족 문학은 절대 한족 문학의 부속품이 아니고 다양한 민족의 문학은 어디까지나 서로 따라 배우고 서로 교류하는 평등한 문학이라는 주장을 다양한 경로를 통해 피력했다. 문화면에서나 역사 면에서나 전통 면에서나 조선족 문학은 나름의 흐름이 있어서 다른 민족의 문학과 공통성도 있지만 또한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이었다. 결코 한족 문학으로 우리 문학을 대체하게 버려 둘 수는 없었다.

이윽고 흑룡강성 민족사무위원회, 하얼빈시 민족사무위원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성원 하에 국가 출판 총서를 찾아가 중앙 민족 사무 위원회와 국가 출판 총서의 참여로 취소된 등록번호를 보충 받는 방법으로 『송화강』의 생명을 다시 이어놓을 수 있게 되었다.

1986년, 잡지들을 자력 갱생으로 운영하라는 국무원의 지시가 전달된 후부터 『송화강』 잡지는 심한 경제난을 겪게 되었다. 때로는 기업가들의 지원을 좀 받기도 했지만 궁핍하기는 여전했다. 민족사무위원회와 문화관 지도부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시 재정에서 경제 지원을 얼마간 받게 되었지만, 그 자금으로는 『송화강』잡지의 정상 발행을 담보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송화강 문학상 수상작과 복간 이후 참여 문학인들

『송화강』잡지가 있었기에 우리는 북방 땅에 우리 겨레의 튼튼한 ‘문학 호텔’을 건설할 수 있었다. 『송화강』잡지는 53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해 몇 천 편의 시를 발표했고, 600여 편의 소설을 발표하였으며 기타 장르의 작품들도 몇 백 편 발표하였다. 이 중에는 「송화강 문학상」을 받은 소설 「기형의 인간들」, 「낙엽」, 「최씨네 세 아들」, 「아, 삿갓봉」 등이 있다. 시로는 「산재마을아」, 「바닷가에서」, 「새집들이 시초」, 「고향이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등이 있다. 기타 장르로는 실화문학 「씨베리 포로 수용소」, 평론 「북방 시단의 망향시에 대한 고찰」 등도 수상했다. 근년에 수필상을 받은 작가들도 10여 명 있다.

이삼월이 주필로 있던 시절, 『송화강』잡지에 발표된 많은 시들이 평론가들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 석화, 이임원, 이성비, 오광영, 김혁 같은 훌륭한 청년시인들이 경쟁적으로 작품을 발표했다. 1990년대에는 조광명, 홍군식, 김영환, 차룡, 윤국화, 윤영애, 박연옥, 김태철, 최화길 등 북방 청년 시인들이 중국 조선족 시단의 신선한 시 내용과 형식, 창작방식을 선보이는 좋은 시도를 한 작품을 적지 않게 발표하였다. 초창기에 미진하던 소설 작품도 커다란 발전이 있게 되었다. 류원무, 임원춘, 박선석, 김창수, 윤림호, 장혜영, 박진만, 정기수, 구용기, 이태복 등 많은 소설가들이 작품을 발표했다.

많은 시인이 『송화강』잡지를 통해 자라났다. 『송화강』은 그들의 요람이었다. 최초 『송화강』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과 작가들은 현재 조선족 문단의 중견으로 맹활약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을 중심으로 흑룡강성 조선족 작가군이 형성되었다. 『송화강』잡지가 걸어온 53년을 역사적인 안목으로 살펴보면, 어려운 가운데서도 빛이 나는 노정인 것이다.

연해도시 생활정보지 운용 자구책

『송화강』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또다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경제난으로 운영이 어려워진 것이다. ‘시장’을 찾고 살길을 헤쳐 나가야 했다. 『송화강』잡지는 발행 부수가 2,000부 밖에 되지 않았다. 한인[조선족] 독자층도 매우 얇았다. 그래서 경제 활동이 상대적으로 좋은 연해 지역으로 나가 격월간에서 월간으로 바꿔 생활 정보지를 꾸리고 광고 수입을 올리기로 하였다. 2004년에는 구용기를 주필로 해서 상해로 가서 운영하였고, 2005년부터 2010년까지는 청도에서 이호원이 주필을 담당하면서 운영하였다. 연해지역으로 나간 동안 『송화강』은 문학 내용을 거의 싣지 않았다. 그러나 6년 동안의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

문학지 재건, 새로운 바람

『송화강』은 2010년 10월에 하얼빈으로 돌아왔으며 다시 문학지를 회복하였다. 구용기가 다시 주필을 맡았다. 돌아온 것은 하얼빈에서 꾸려 나갈 수 있는 경제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이었다. 한인[조선족]으로 전 하얼빈 조선민족예술관 관장이었던 하얼빈시 문화국 부국장 서학동이 힘을 써서 정부로부터 잡지 운영 경비가 증가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중국 신문 출판 총서가 20만 위안을 지원하여 잡지의 시설을 개선해 주었다. 이렇게 해서 『송화강』은 지금 온전하게 꾸려 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하얼빈으로 돌아와 문학지를 회복한 뒤로 『송화강』에서 활약한 소설가로 박초란, 박옥란, 이진화, 조용기, 구호준, 신영애, 황혜숙, 박련숙, 서현, 심매화, 장학규, 홍만호, 박일, 전춘화 등이 있다. 수필가로는 이홍철, 한춘옥, 납함, 김재룡, 최복숙, 이춘렬, 주향숙, 정문, 이문혁, 강효삼, 한영남, 전춘매, 이향숙 등이 있다. 문학 비평가로 최삼룡, 한춘, 김룡운, 장춘식, 이태복, 차호걸, 천상규, 김영옥, 유대식 등이 있다. 시인으로는 한춘, 강효삼, 최화길, 이창현, 이상각, 심예란, 김응준, 김응룡, 김학송, 이성철 ,김혁 등이 있다.

잡지는 보다 많은 작가들을 확보하고 등재 작품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한국의 정덕준 교수 협찬으로 2010년과 2011년에 각각 송화강 수필상을 제정하고 시상식을 가졌다. 2012년에는 중국 한인[조선족] 기업인 윤재홍의 후원으로 11월 17일에 ‘북방의 눈꽃-2012년 송화강 필회’ 행사를 가졌다. 『송화강』 문학 월간지는 지금도 50년 전통을 이어 중국 땅에서 한인[조선족]의 문학을 지켜가고 있다.

참고문헌
  • 이삼월, 「송화강이 걸어온 역사」(『송화강』1월호, 2009)
  • 「송화강 잡지 실화 문학으로 독자층 공략」(『길림 신문』, 2012. 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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