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延邊에 살아 숨쉬는 民族 傳統 샘물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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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생활·민속/민속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대구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 연행시기 | 매년 음력 6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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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9년 6월 5일 |
| 제당 | 마을 뒷산자락 |
대구촌은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에서 동북쪽으로 60여 ㎞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행정구역으로는 돈화시 대산진(大山鎭)에 속한다. 마을 동쪽과 서쪽으로는 달구지들이 다니는 흙길이 뻗어 있는데 동쪽으로는 경박호로 갈 수 있고 서쪽으로는 안명호(雁鳴湖)라는 인공 호수를 거쳐 대산진에 이를 수 있다. 대산진에서부터는 돈화시로 통하는 포장 도로가 있다.
마을 북쪽에는 촌민들이 샘뒤덕이라 부르는 산이 있고 남쪽 앞에는 목단강의 한 지류인 대구하(大溝河)가 흐르고 있어 배산임류(背山臨流)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한랭한 돈화 지역에서 따뜻한 편이어서 농사가 잘 된다. 마을 주변 산에서는 범·곰·멧돼지·노루·꿩 등 산짐승들이 출몰하고 산삼·오가피·세신 등 약재들과 여러 가지 산나물, 야생 과실들이 많이 자란다. 마을 앞에 있는 대구하에는 물고기들이 많다.
대구촌은 1942년 일제가 강제로 조직한 ‘개척단’에 뽑혀 한반도로부터 이주해 온 17가구의 경상도 농민들이 정착해 살면서 생겨났다. 현재 대구촌에 살고 있는 이주자 1세는 전재인(全在仁) 한 사람뿐이다. 그는 현재 83세인데 19세 되던 해에 경상북도 영주군 장충면 두전리에서 부모를 따라 대구촌으로 옮겨 왔다.
1947년 이후 용정, 화룡 등지로부터 한인[조선족] 농민들이 계속 이주해오면서 촌민 구성은 경상, 전라, 함경 등 여러 도 출신으로 되었다. 후에는 점차 함경도 사람들이 많아졌고 1970년대 이후에는 일부 한족(漢族)들도 천입해 와서 살게 되었다.
대구촌은 처음에는 17가구로 출발하여 점차 가구수가 늘어났는데, 그 전성기인 1950~1960년대에는 총 가구수가 100가구를 넘었으며 1997년까지도 한인[조선족]들이 80여 가구나 살았다. 현재 등록된 가구 총수는 86가구인데 그중 한인[조선족]이 68세대이고 한족이 18세대이다. 그런데 근간 호적을 남겨둔 채 도회지로 나간 집들이 여럿 생겨서 실제 살고 있는 한인[조선족] 가구수는 50여 세대로 파악된다.
대구촌의 샘물제는 1942년 마을이 생기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대구촌에는 산짐승들이 많이 출몰했는데 그중 호랑이가 많았다. 마을 아낙네들이 새벽녘에 마을 뒤쪽에 있는 샘터에 물 길으러 갔다가 샘물가에 앉아있는 호랑이를 자주 보았고 또 산에 나물을 채취하러 갔다가 산속에서 호랑이를 만나는 경우가 많았다. 울창한 원시림을 거쳐 밤길을 오가는 사람들도 길옆에서 따라 오는 호랑이를 발견하고 놀라는 일들이 잦았다. 그리고 많은 사례는 아니었지만 마을 사람이 범에게 물리는 일도 간혹 있었다.
이런 자연적인 위험성과 더불어 생존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새로 갖추어야 하는 당시의 어려운 생활 조건 속에서 마을의 제1세 이주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낯선 이역 땅에서 삶을 위한 정신적 의지력도 필요하였다. 그들은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을 민족 고유의 민간 신앙에서 찾고자 했다. 제보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마을 사람들은 예로부터 고향에서 믿어오던 것이나 믿어보자고 입을 모았고 그것을 제액초복(除厄招福)의 방법으로 구체화 한 것이 샘물제의 출현이라 한다.
그리하여 모시게 된 신이 산신인데 마을 주민들은 마을 주변의 산을 신령스러운 존재로 생각해 왔으며 산에서 솟아나는 형제 샘과 같은 샘을 역시 일종 생명력의 원천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기에 마을 사람들에게 있어서 산신은 산과 샘을 포괄한 일종 복합적인 존재였다. 그리고 산신과 호랑이의 상관성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 같았지만 호환에 대한 인상이 더 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결핍과 재난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산신과 의사소통을 하여 신의 존재를 확인한 후 신격화하고 제의를 행하여 평안과 풍요를 기원하는 과정에서의 소박성을 잘 말해 준다.
이렇게 생겨난 대구촌의 샘물제는 1965년까지 줄곧 이어져 왔다. 그 기간에 이 샘물제는 인근 마을들에도 영향을 미쳐서 주변의 한인[조선족] 마을인 소구촌(小溝村), 서구촌(西溝村) 등에서도 마을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비록 소박하나마 자그마한 마을 제사 구역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소구촌 등에서는 지금도 마을 제사가 지속되고 있다 하나 그 상황은 대구촌에는 못 미친다.
1965년 대구촌의 샘물제는 ‘문화 대혁명’의 전구곡인 사회주의 교양 운동이 벌어지면서 낡은 미신 행사로 지목되어 일시 중지된다. 극좌적인 문화적 분위기 속에서 마을 사람들은 일종의 불안감을 안고 살아온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문화적 무의식으로 자리 잡은 제의 의식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면서 1978년 대구촌의 샘물제는 부흥의 새 봄을 맞게 된다. 그 해에 마을 주민들은 샘물제를 다시 복원하고자 시도한다. 그러나 당시 문화적 환경과 여건이 제사를 그대로 복원할 수 있을 정도로 개방적인 차원에 이르지 못하였기에 주민들은 샘물제를 일종의 마을 성립 기념 행사로 준비하고 관련 행사를 재개한다. 이렇게 다시 시작한 샘물제는 1982년부터는 원래의 모습인 기원(祈願)적 성격을 띤 제의(祭儀)로서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그 후로 산신제의 형태를 계승한 대구촌의 샘물제는 마을 주민들이 중요시하는 하나의 문화 전통으로 자리를 굳혀가고 있다.
대구촌의 샘물제는 해마다 음력으로 6월 13일에 행하는데 그 절차와 내용은 대체로 아래와 같다.
1. 제수 준비
제사를 행하기 며칠 전부터 제수 준비 작업이 시작된다. 준비 작업은 제주를 마련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950~1960년대에는 제사 일주일전에 마을에서 쌀로 제주를 빚었고 그 제주를 전문 마련한 독에 넣어 두었다. 제주를 넣은 독 주위에는 부정 타지 않게끔 금줄을 늘이었다. 지금은 제주 빚기가 행해지지 않고 제사 전날에 제주를 준비하는데 주변의 양조장에서 구입한다.
제수 준비에서 제주 외에 중요한 것은 신에게 올릴 돼지와 시루떡·두부·산나물 반찬 등 음식들을 마련하는 것이다.
돼지는 반드시 숫돼지어야 하고 또 흑돼지여야 하는데 이는 처음부터 정해져서 전해오는 것이라 한다. 돼지는 사전에 구입 계약을 하고 제삿날 이른 아침 마을로 운반된다. 마을 남성 몇 사람이 돼지를 받아 제사 장소 부근까지 끌고 가서 도축한다.
제사 전날 마을 아낙네들은 집집마다로부터 모아온 쌀을 빻아서 시루떡을 만들 쌀가루를 준비하고 제삿날 아침에 시루떡을 쪄내는데 고물을 얹지 않은 백설기를 만든다. 두부는 집집마다 거출한 콩으로 제사 전날 저녁에 만들며 산나물은 마을 주변의 산에서 미리 채집한 것으로, 제삿날 아침에 음식 솜씨가 좋은 집에서 요리한다. 이외에 과일과 당과류들도 미리 준비하여 둔다.
2. 제사 장소 정돈
제사 장소는 마을 뒤쪽 산자락에 있는 샘터에 있다. 샘터에는 약 7~8m를 사이 두고 두 곳에서 샘물이 솟아나오는데 물맛과 수질이 좋아서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이용해왔다. 이 두 샘을 마을 사람들은 형제 샘이라 부른다. 두 샘 사이에는 백여 년 되는 상수리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그 나무 아래에 제단을 만들었다. 이 나무를 강신 장소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제사 전날 마을의 남정 몇몇이 마을 뒤쪽에 있는 제사 장소에 가서 그 곳을 정돈한다. 그들은 잡초들을 제거하고 재단을 깨끗이 소제한 뒤 제단 주위에 나무막대기를 세우고 금줄을 쳐 놓는다. 금줄은 왼새끼로 하며 한지 조각을 듬성듬성 끼워 넣는다.
3. 제사 진행 절차
제삿날 행사 시작 전에 마을 사람들이 샘터에 모여 제단에 제수를 진설한다. 제단에는 먼저 돼지를 올린다. 과거에는 돼지를 도축해 털을 깎아내고 내장을 제거한 뒤 통짜로 올렸다. 현재에는 돼지머리와 족발만을 올린다. 다음에는 백설기와 두부전, 산나물 반찬, 건어물 등을 진설한다. 그리고 과일, 당과들을 진설한다. 그런데 지금은 마을의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여 제수 진설이 과거에 비해 매우 간소한 편이다.
제사는 정오에 시작한다. 제사에는 원래 마을의 남성들만 참석하고 여성들은 제외되었는데, 개혁개방 이후에는 남녀노소가 다 참석하게 되었다.
제사 진행을 맡아 볼 소임자로서 마을 사람들 중 덕망 있고 풍속을 잘 아는 노인이 제관을 맡는다. 그런데 제주, 축관, 집사를 각각 갈라서 맡지 않고 제관 한사람이 겸한다. 제관을 마을 사람들은 제사 도감이라 부른다.
제1대 도감은 권달구(權達九)였는데 1942년 제사가 시작되면서부터 1965년까지 줄곧 맡아 왔다. 제2대 도감은 서길동(徐吉同)이다. 서길동은 현재 75세인데 전라북도 임실군으로부터 간도에 이주한 남도 농민의 후손으로서 16세 되던 해에 대구촌에 왔다. 서길동은 개혁개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제사 도감을 맡고 있다.
제사의 첫 절차는 강신(降神), 참신(參神)이다. 제관이 제단 앞에 나가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며 기타 참석자들은 제관의 뒤쪽에 모여서서 정숙한 몸가짐으로 신단을 향해 머리를 약간 숙인다. 원래는 술을 올리기 전에 분향을 했다 하나 현재는 분향 절차가 없는 상황이다. 이 절차가 빠뜨려지게 된 것은 제사가 문화 대혁명 기간에 중지되었다가 개혁개방 이후 다시 진행되면서 약간의 변이가 생기는 과정에 누락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술을 올리는 것이 신을 모셔오는 것으로 되고 이어서 제관이 절하는 것이 참신으로 된 것이다.
그리고 절은 세 번 하는데 이는 중국 풍속의 영향으로 보인다. 중국의 한인[조선족] 사회에서는 상사 때나 제사 시에 절을 세 번 하는 곳들이 많은데, 중국에 정착하여 장기간 중국 풍속의 영향 속에 살아오면서 그것을 자연스레 수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근간에는 민족 고유의 절하는 법이 다시 보급되고 있다.
제사의 두 번째 절차는 독축(讀祝)이다. 제관이 제단 앞에 끓어 앉아 구두로 축문을 외운다. 축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유월십삼일(六月十三日)
대구촌 촌민 일동(一同)은 고(告)합니다. 산신(山神)님.
세월(歲月)이 흘러서 또 새로운 한해가 찾아 왔습니다.
지난해의 평안(平安)과 행운(幸運)에 감사(感謝)드리고, 새로운 한 해 우리 촌민들의 안녕(安寧)과 만사대길(萬事大吉)을 기원(祈願)합니다. 항상 많이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술을 올리오니 흠향(歆饗)하십시오.
상향(尙饗).
제사의 세 번째 절차는 세대주 이름을 고(告)하는 것이다. 즉 독축이 끝나면 마을에서 위망 있는 사람이 제단 앞에 나와서 마을 가구들의 세대주 이름을 신에게 고한다. 이는 전통 동제에서의 소지를 올리는 절차의 변이로 보아진다. 세대주 점명(點名)은 마을의 책임자가 맡는 것이 관례인데 과거에는 촌장(村長)이 하였고 현재는 마을 노인회 회장이 한다. 점명을 위해 사전에 마을의 세대주 명부를 작성하는데 무릇 마을에서 사는 가구는 다 올리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남녀가 다 오를 수 있고 한인[조선족]이 아닌 타민족도 올린다. 이는 중국적인 평등 의식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제사의 네 번째 절차는 송신(送神)이다. 제관이 제단 앞에 나가 절하여 신에게 하직 인사를 올린다. 기타 참석자들은 정숙하고 머리를 약간 숙인다.
제사의 다섯 번째 절차는 음복(飮福)이다. 신을 보내고 제수를 거둔 뒤 음복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아이들에게 백설기를 나누어 준다. 제일 먼저 떡을 받는 아이가 복 받게 된다 하여 아이들이 다투어 백설기를 받는다. 아이들에게 백설기를 나누어주는 것은 아프지 말고 건강하라는 의미이며 이는 제사를 시작하던 1940년대부터 줄곧 전해 내려온 것이라 한다.
백설기 나누어주기가 끝나면 제사 참가자들이 제단 앞에 둘러 앉아 음복을 한다. 음복은 제수로 올린 음식과 사전에 마을에서 준비한 음식들을 골고루 나누어 먹는데 음복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두부국이라 한다. 이 두부국은 제단에 머리를 올린 돼지의 고기와 행사용으로 만든 두부로 만드는 것으로서 제사를 시작하기 전부터 끓이는데 제사가 마무리 되면 국도 완성된다.
두부국을 먹는 것도 제사가 시작되면서부터 전해오는 풍속이라 하며 이는 마을 주민들이 흰 두부처럼 깨끗하고 무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소박한 소망을 담고 있다 한다. 이는 백설기와 더불어 민족 고유의 흰색 선호 전통의 맥락을 느끼게 한다.
4. 후속 행사
제사의 후속 행사로서 샘터 가셔 내기를 한다. 마을 주민들은 이 샘물을 항상 식수로 사용하기에 샘터 가셔 내기 역시 중요한 절차이다. 현재는 샘터에 지하 배관을 묻고 시멘트로 만든 저수 시설을 마련하였는데, 깨끗한 물을 확보하는 데는 도움이 되고 있으나 이전 샘터 가셔 내기의 연행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있다.
1982년까지는 제사의 모든 과정을 마친 뒤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기타 다른 여러가지 오락으로 대체한다.
마을굿은 마을 공동체가 신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망 속에서 마을 공동체 내의 문제들을 해결함으로써 조화로운 삶을 지속시키고자 행하는 중요한 문화적 행사이다.
한민족의 민속 신앙에서 볼 때 마을 제사는 그 명칭이 ‘동제’가 압도적이고 또한 동신제·산신제·산제·서낭제·당제·당산제 등으로도 불린다. 그중에서 동제는 유교식 제사가 도입된 이후 많이 쓰인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산신제·서낭제·당제 등이 보다 고형(古形)을 간직한 명칭으로 인정된다.
마을 제사는 또한 ‘굿’으로도 불리고 있는데 이는 마을 제사가 유교식 제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에 의해 일종의 공동체적 축제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많은 경우 동제는 단순한 유교식 제사로 끝나지 않고 동민이 모두 참여하는 대동굿으로 진행된다. 이로 볼 때 마을 제사의 명칭은 대체로 그 마을에서 공동으로 모시는 봉신(奉神)의 명칭에서 유래하며 ‘신’이 가장 대표적인 마을신이다.
마을 제사에서 신당은 신목(神木)·돌무더기·당집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가장 보편적인 것은 자연 그대로의 신목이다. 이는 고대 거목 숭배와 연결된다. 또 신목 밑에 돌 제단을 마련한 경우도 적지 않다.
마을 제사는보통 마을 모임·제의·대동 놀이 등으로 진행된다. 먼저 제일(祭日) 7일 전이나 보름 전에 마을의 청장년 전부가 모여 제사 준비에 관한 사항을 비롯하여 마을의 대소사에 대해 논의하는 대동 회의를 연다. 동제에 관해서 제관의 선출, 제물 준비를 위한 기금 마련 등 동제 진행에 대해 전반적인 논의가 이루어진다.
제관으로는 대개 제주·축관·집사 등이 선임되는데 자신이나 집안에 부정이 없는 사람으로서 생기복덕(生氣福德)을 보아 선출한다. 제관이 선출되면 그때부터 마을 전체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신당은 깨끗이 청소하고 금줄을 쳐서 사람의 출입을 막는다. 특히 제관은 부정이 타지 않도록 각종 금기를 엄격히 지켜야 한다. 제일 전에 마을에서 추렴한 공동 기금으로 제물을 마련한다. 당일이 되면 제관들이 신당에 올라가 제사를 지낸다. 대개의 경우 제물의 진설(陳設)·헌주(獻酒)·독축(讀祝)·소지(燒紙)·음복(飮福) 등 절차를 따른다. 제사를 끝낸 후 제물을 거두어 마을 사람 전체가 함께 음복을 하며 제사가 끝난 후 대동 놀이가 벌어진다. 이는 집단적 신명으로 마을 내의 갈등을 풀고 집단적 동질성을 확보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위에서 살펴본 대구촌의 샘물제도 이런 고유의 마을 제사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대구촌의 샘물제는 그 명칭이 ‘샘물제’로 되어있는데 이는 제사 장소가 샘터에 있고 그 샘물을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하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샘이 신격화된 존재로 된 것은 아니며 샘물제에서 모시는 신은 분명 산신이다. 이는 제사 과정에서 좌정신의 신격이 산신임이 뚜렷이 밝혀지고 있으며 제사 절차도 기본적으로 전통적인 마을 제사인 산신제 절차와 일치함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을 노인들에 의하면 지난 1960년대에 산신에 대한 제사를 직접 언급하는 것이 불편하여 편의적으로 ‘샘물제’라 부르게 된 것이 습관화되어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마을 제사는 기본적으로 산신·농신(農神)·조상신 등 생산의 풍요나 재액의 방지 및 마을 수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마을 신격에 대한 제사이다. 이는 고대로부터의 제천 의례가 고려 말 이후 마을 단위로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생산력의 발달과 마을 공동체의 형성 등에 따라 좀 더 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기능신(機能神)에 대한 제의로 변모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마을 제사는 단순한 제의로서만이 아니라 대동 회의, 대동 놀이 등을 통해 마을의 결속을 다지고 제액초복을 기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민중의 중요한 행사로 된다.
대구촌의 산신제[일명 샘물제]는 아래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볼수 있다.
첫째, 마을 사람들에게 제액초복의 믿음을 갖도록 해준다. 대구촌은 산간 마을로서 아직도 교통이 불편하며 외부와의 접촉이 쉽지 않는 상황이다. 마을 사람들은 주로 농사로 생활하는데 농사가 잘되는 곳이어서 크게 힘들게 사는 형편은 아니었지만 근간 청장년들의 도시 진출로 사정이 어려워지고 있다 한다. 이런 산간 마을의 특성으로 하여 마을 사람들은 줄곧 산신을 신령스러운 존재로 믿어왔고 그 믿음의 표현으로 산신제를 수십 년간 이어오면서 마을의 평안과 풍요에 대한 기원과 그 실현에 대한 믿음을 지켜온 것이다.
둘째, 마을 사람들의 결속을 다지고 유대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한 해에 한 번씩 있게 되는 산신제를 통하여 마을 공동체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고 연대감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고 키워주는 역할을 한다. 대구촌 사람들은 마을에서 오래 동안 살아오면서 자기들의 삶의 터전에 대한 애착과 긍지를 갖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뚜렷한 정착 의식과 주인 의식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 마을 사람들의 삶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어 온 산신제도 중요한 문화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리고 현재 마을에 교회당이 들어앉은 상황 속에서도 산신제가 마을 주민들의 대동 모임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모습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 깊이 뿌리 내린 민족성이 여전히 강한 생명력을 과시하고 있음을 실감케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연변조선족자치주 돈화시 대구촌의 샘물제’는 민족 고유의 전통 산신제의 변이 형태로서 매우 중요한 문화적 의미와 가치를 갖는다. 한인들의 민간 신앙에서 산신제는 일부 저서에서 8·15 광복 이전까지 행해졌다는 간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을 뿐 해방 후 현장에서 발견된 사례는 아직까지 없었으며 그에 대한 연구도 국내외 학계에서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이런 시점에서 대구촌 샘물제는 한인[조선족] 공동체 신앙의 빈 칸을 메꾼, 현장에 실재하는 의례로 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