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 창담

한자 延邊 唱談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현대/현대
정의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구전되는 구연 예술의 한 형태.

개설

연변 창담이란 새로운 예술 명칭은 1970년대 후반기에 나타났다. 연변 창담은 편폭의 길고 짧음을 막론하고, 이야기 줄거리가 있으며 ‘설’이 ‘창’보다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창사(唱詞)는 격률의 구애를 받지 않는 산문체와 운문체를 병용함으로써 서술에 편리할 뿐만 아니라 대중들로 하여금 창사의 뜻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대중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게 한다.

악곡은 한인[조선족]이 익숙한 민가를 기본조로 하였다. 그 중에서도 「수자풀이」 민요의 선율을 대량으로 도입하였다. 연변 창담은 다년간 중국의 여러 민족 구연 예술을 고찰하고 한인[조선족]의 설창 예술을 깊이 연구한 최수봉에 의해 창작되었다. 이미 무대에 올라 공연되었던 연변 창담 극목을 보면 「두견산」[1974년-최수봉 각색, 전승길 음악 설계], 「백계연에서의 회사」[1975년-최수봉 각색, 안계린·리일남·김태국 음악 설계], 「기습」[1978년-최수봉 각색, 안계린 음악 설계], 「신출귀몰」[1980년-최수봉 창사, 안계린 음악 설계], 「대들보」[1982년-최수봉 창사, 이일남 음악 설계] 등이다. 연변 창담은 정서가 활발하고 전투적인 기백이 있으며, 호기롭고 남성적이어서 역사적인 전기적 이야기를 엮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현시대의 새로운 일과 새로운 인물을 부각할 수 있는 훌륭한 예술 형식이다.

연혁

한인[조선족]의 구연 음악은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비롯하여 서도 소리와 이야기 정절로 된 장잡가들이 전승되었으나, 특수한 사회 조건으로 하여 민간 음악이나 대중 가요처럼 대중들 사이에서 널리 불리지 못하였다. 새 시대, 새 인물, 새 이야기를 엮어 부를 음악곡들도 매우 부족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찍부터 한인[조선족]의 새로운 설창 음악을 고민했던 연변 군중 예술관의 최수봉 등은 판소리의 전통적 특징과 표현 형식을 도입하여 새로운 설창 음악 창작에 앞장섰다.

1973년 최수봉, 김남호, 허보선, 김필준 등 구연 창작가들은 중국관내의 한족의 지방 구연 음악 예술을 고찰한 기초 상에서 연변 지역의 농촌에 내려가 새로운 설창 음악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에서 이른바 여덟 개의 ‘본보기극’이 보급되었다. 한족의 경극을 바탕으로 각색한 구연 음악인데, 이를 주선으로 하여 연변 창담을 각색하였다.

1974년 봄, 연변조선족자치주 농민과외 연예 경연 대회가 열리게 되었는데 ‘본보기극’의 하나인 「두견산」의 토막을 각색하여 「두견산편단」이란 이름으로 첫 연변 창담 작품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렸다. 이를 계기로 최수봉과 안계린, 이일남, 김태국 등 작곡가들은 ‘본보기극’인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에서의 마지막 장면 「백계연에서의 회사」를 연변 창담으로 각색하였다. 1976년에 있은 전국 구연 예술 경연 대회에서 연변 창담은 관중들의 많은 호응을 받았으며 『광명 일보』, 『인민 일보』 등 신문들에서 연변 창담은 형식이 활발하고 음악이 건전한 새로운 민족적 형식으로서 중국 예술의 보물고에 새로운 기여를 하였다고 보도하였다.

1979년에 소설 「붉은 바위」의 한 장면을 본떠 「기습」이란 연변 창담을 각색하여 무대에 올렸고, 1983년에는 나라의 재물을 탐하고 성실히 일하는 일군을 억압하는 관료들을 비판하는 「대들보」를 각색하여 방송하였다. 1990년대 이후 창담 형식의 음악 창작은 쇠퇴기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현시대의 새로운 일과 새로운 인물을 구가하는 민족 음악 형태로 사람들의 머리 속에 깊이 인식되고 있다.

참고문헌
  • 북경 대학 조선 문화 연구소, 『중국 조선 민족 문화사 대계 3-예술사』민족 출판사, 1994
  • 김남호 저, 『중국 조선족 민간 음악 연구』(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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