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天婚形 說話 |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정착한 한인[조선족]들에게 전해지고 있는 전래 설화.
「천혼」형 설화는 주로 한국·중국·일본·한국·미얀마·캄보디아 등의 나라에서 전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천혼」형 설화가 매우 많다. 이미 발견된 것만도 100여 편이 넘는다. 문헌 설화로는 『삼국사기』에 실린 「온달」과 『삼국유사』에 수록된 「무왕」을 실례로 들 수 있다. 민간에서는 흔히 「복진 며느리와 생금강」·「생금덩어리」·「양반아들과 백정딸」 등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의 경우 1930년대 종경문이 이 설화를 ‘향부복녀아형’으로 분류하였다. 「천혼」형 설화는 「초혼」형과 「재혼」형 모두 존재한다. 문헌에 수록된 「천혼」형 설화를 보면, 송나라 시기의 『북창자과』에 수록된 「강팔랑」과 명나라 때의 『남조야사』에 수록된 「록각장」을 실례로 들 수 있다.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는 「부엌신의 이야기」·「곽정향과 장대랑」·「조왕의 이야기」 등도 「천혼」형 설화이다.
중국 한인[조선족]들 가운데 유전되는 「천혼」형 설화는 「온달과 평강공주」·「대감의 사위」·「딸 삼형제」·「서동과 선화공주」·「총각과 세처녀」 등이다.
1985년에 출판된 『조선 옛말 365켤레』 1·2·3집[김형직·윤봉현 저, 료녕 인민출판사, 1985년]에 「온달과 평강공주」·「서동과 선화공주」·「딸 삼형제」·「세 딸」 등 「천혼」형 설화들이 수집·정리되어 있다.
『조선족 민간 이야기 구술가-김덕순 이야기집』[배영진 수집·정리, 상해 문예 출판사, 1983년]에는 「총각이 자득한 색시」·「총각과 세처녀」·「머슴이 색시를 얻다」·「게으름뱅이가 색시를 얻다」·「과부업어오기로 얻은 랑군」 등 「천혼」형 설화들이 구술·수록되어 있다.
「온달과 평강공주」
온달은 고구려평강왕 시대의 사람이다. 온달의 용모는 여위고 허름하여 우습게 보였으나 마음은 순박하였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언제나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낡은 신을 걸치고 저자거리에 왕래하니 당시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 불렀다.
평강왕은 딸이 울기를 잘하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늘 울어서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보내야 하겠다’고 하였다. 딸이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상부고씨에게 시집을 보내려 하니 공주는 ‘저는 온달의 아내가 되겠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왕은 성을 버럭내면서 공주를 마음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주가 진귀한 금·은 팔걸이 수십 개를 손목에 걸고서 대궐문을 나서 혼자 길을 떠났다. 겨우 온달의 집을 찾아 눈먼 늙은 어머니를 보고 온달이 어디 갔는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 산으로 갔다고 알려주었다. 공주는 산 밑에 이르러 온달이 오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말하였다. 온달은 성을 내면서 가버렸다. 공주는 그날 밤 밖에서 자고 다음날에 온달 모자에게 세세히 말하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에 황금 팔걸이를 팔아서 전택·노비·우마·기물들을 사들이니 살림이 완전히 변하였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월 3일을 기하여 악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을 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 신령에 제사를 지내였다. 이때에 온달이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따라 나섰는데 온달은 앞장서서 짐승도 가장 많이 사냥하였다. 왕은 온달을 불러들이고 이름을 묻고 치하해주었다.
이때 후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진공하여 왕이 군사를 이끌고 맞아 싸웠는데 온달이 선봉이 되어 적군을 물리치고 큰 공을 세웠다. 왕은 이에 감격하여 예를 갖추어 온달을 맞아들였으며 대형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그 후 신라 군사와 싸우다가 온달은 화살을 맞고 죽는다. 장례식을 치르려고 관을 들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는 관을 어루만지면서 ‘생사가 결판났으니 아아 돌아가시라’하니 그제야 관이 들려 하관하였다고 한다.
「서동과 선화공주」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장(璋)이었다. 장의 어머니는 과부로 서울남지 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남지의 용과 관계해서 그를 낳았다. 아명은 서동(薯童)인데 속이 깊어 남들이 헤아리기 어려웠다. 서동이 언제나 마를 캐내 팔아서 생활한다 해서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신라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고 곱기가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도읍으로 와서 동네 아이들과 마를 나눠 먹으며 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이에 동요를 지어 아이들을 부르게 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했다.
선화공주님은/남몰래 얼려두고/서동님을/밤이면 안고가다.
동요가 퍼져 대궐까지 전해졌다. 대신들이 떠들고 공주를 먼 지방으로 귀양보냈다. 떠나기 전 왕후는 순금 한말을 주었다. 공주가 귀양 갈 때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인사를 드리고 호위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공주는 첫눈에 마음이 들어 따라 나섰다.
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을 내놓으면서 함께 살림을 차리자고 의논하였다. 서동은 ‘내가 마를 캐던 곳에 이런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하였다. 공주는 크게 놀라 그 금덩이를 왕궁에 실어 보내자고 한다. 그래서 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용화산사자사지명 법사에게 금을 실어 보낼 방도를 내라고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 앞에 가져다 놓으니 법사가 귀신의 힘으로 하루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까지 날라다 놓았다. 서동은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을 데리고 사자사로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불 셋이 연못에서 나타나자 가던 수레를 멈추고 치성을 드렸다. 부인의 요구대로 지명 법사에 부탁하여 못을 메우고 미륵사라는 절을 지었다.
「딸 삼형제」
옛날에 가난한 집안에 딸만 3형제가 살았다. 딸들이 과년해지자 아버지가 묻기를 어느 곳으로 시집을 가겠느냐고 물으니 맏딸과 둘째 딸은 돈 많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셋째 딸은 부자집에 시집갈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소원대로 맏딸과 둘째 딸은 부잣집에 시집보내고 셋째 딸은 일부러 산속에서 숯 굽는 가난한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친정의 늙으신 아버지가 고생하는 정경이 눈에 선하였으나 살림이 하도 구차해서 가볼 생각도 안했다.
그러나 셋째 딸은 아무런 원망도 없이 살아갔다. 그러다 하루는 친정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데 조그만 옹달샘에서 서광이 비쳤다. 그래 가보았더니 물속이 환히 보이는데 그 속에는 금덩이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셋째 딸은 당황하지 않고 한 알씩 메여 장에 갖다 팔아 부자가 되어 친정 부모님을 모셔다 봉향하였다. 그래서 언니들은 질투가 나서 숯쟁이에게 시집 못간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동아시아 지역에서 유전되는 「천혼」형 설화의 주요 모티프는 첫째, 모 원인으로 딸[혹은 아내]은 집에서 쫓겨난다. 둘째, 쫓겨난 딸[혹은 아내]는 가난한 총각과 결혼한다. 셋째, 금덩이를 발견[혹은 노력을 통해서]하여 행복하게 잘 산다.
이러한 「천혼」형 설화 가운데 하나는 딸과 아버지의 모순을 통해 딸의 삶을 묘사한 설화가 있고, 다른 하나는 아내와 전 남편의 갈등과 대립을 통하여 아내의 복된 삶을 서술한 설화가 있다. 일반적으로 전자를 「초혼」형이라 하고 후자를 「재혼」형이라 한다.
「초혼」형을 결말에 따라 형태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지가 결말에 나오지 않고 딸만 행복하게 사는 단독형, 잘사는 아버지가 부자인 딸을 보고 딸을 인정해주는 인정형, 아버지가 몰락하여 거지가 되는 몰락형, 부자가 된 딸이 거지가 되거나 혹은 잘사는 아버지를 비롯한 친척들을 골려주는 대치형, 잘사는 아버지가 거지가 되어 우연히 딸을 찾아오거나 혹은 거지 잔치를 벌려 찾아온 어버지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효녀형 등이다.
「재혼」형도 역시 결말 형태가 다양하다. 전 남편이 거지가 되어 잘사는 아내를 보고 부끄러워 떠나거나 죽는 몰락, 사망형과 쫓겨난 아내가 또다시 몰락된 전 남편과 결합하는 재결합형 두 가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