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滿洲가 낳은 朝鮮族 文學의 開拓者 金昌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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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중국으로 이주한 이민 1세로서 만주국(滿洲國)과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면서도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온 조선인 개척민들의 삶을 형상화한 소설 작품들을 남겨 중국 내 한인 문학의 개척자이자 대부(大父)로 추앙받는 문인.
김창걸은 1911년 12월 20일 함경북도 명천군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6살 때 가족을 따라 길림성(吉林城) 용정현[龍井縣, 당시는 화룡현) 지신구(智新區) 장재촌(長財村)에 이주했다. 그는 명동 소학교를 마치고 15세 되던 해 예수교장로교파에서 운영하는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글짓기를 즐겨 은진중학의 『신보』라는 벽신문의 위원으로 활약했고 3학년 겨울방학 숙제로 지은 「동색(冬色)」이라는 산문시가 작문 선생님으로부터 ‘혁명적 시인의 색채가 농후하다. 힘써 전진하라’는 평가를 받자 이에 고무되어 작가를 꿈꾸게 되었다.
1년 간 공부하다가 1927년 3월에 학교의 종교 교육에 반대하여 일어난 동맹휴학을 주동했고, 진보적인 성향의 대성중학교로 전학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선의 신경향파(新傾向派)와 카프(KAPF) 계열의 문학 작품을 애독했다. 특히 최서해(崔曙海)와 조명희(趙明熙)의 소설에 심취했다.
그는 동만 소년총대에 가입했다가 얼마 뒤 혁명적 지하조직인 적색 혁명자 후원회[당시 모쁘르라고 했음]와 고려공산 혁명회(ML파)에 가입해 휴일마다 농촌에 내려가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28년 10월 학비를 댈 길이 없어 대성 중학교를 중퇴하고 부모를 도와 낮이면 농사를 짓고 밤이면 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고려 공산 청년회의 활동에 참가했다. 1928년 가을 일제가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을 조작해 검거 선풍을 일으키자 연해주 등지로 잠시 피신했다. 1929년 봄 장재촌으로 돌아온 그는 잠시 집안 일을 돕다가 그 해 7월 덕신구에 있는 창성학원 교원으로 들어갔다. 1930년 2월에는 돈화(敦化)에 있는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서울―상해파)로 옮겨가 그 기관지 『맑스주의』와 『선봉』의 간행 사업에 참여했다.
1930년 10월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가 조선 국내로 자리를 옮기면서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 핵심 인물들을 일본에 보내기로 했다. 김창걸은 일본에 가려고 서울에 갔으나 이미 조직망이 파괴된 뒤여서 일본에 가기는 커녕 조직과의 연계마저 잃게 되었다. 그는 조직을 찾아 함경남도의 원산(元山), 흥남(興南), 함경북도의 영안(永安) 등지, 그리고 중국 동북 각지는 물론 심지어 소련 연해주까지 돌아다녔다. 이 시기 남의 논밭에서 품팔이꾼으로 일하기도 했고, 공장에 들어가 막벌이를 하면서 사회의 최하층 인간들을 깊이 이해하고 동정하게 되었다.
1934년 4월 조직을 찾지 못하고 장재촌에 돌아온 김창걸은 신동 소학교와 명동 소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는 한편 문학 창작에 정진하였다. 그는 1930년 이래로 세 번이나 순사들에게 구속당해 모진 고문을 받았으나 끝끝내 조직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고 절개를 지켰다. 그리고 조직을 찾으려는 일념은 변함이 없었으니 이전에 자기가 활동했던 목단강(牡丹江)의 북만 무역 회사로, 다시 교하현의 대림 농림사와 백금 상회로 가서 일하면서 꾸준히 조직과 연계를 맺으려고 했다.
김창걸이 문학 창작을 시작한 것은 그가 방랑 생활을 그만두고 장재촌에 돌아와 신동 소학교와 명동 소학교의 교원으로 있으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던 1934년 무렵이다. 그는 1936년 단편 「무빈골 전설」을 내놓은 때로부터 1944년 만주국의 국책 문학에 동조하기를 거부해 절필하기까지 45편의 단편 소설과 시, 수필을 발표했다.
김창걸은 광복 후에도 민족 문화와 교육 사업에 자신의 일생을 다 바쳤다. 광복을 교하현에서 맞은 김창걸은 안도현 명월구에 가서 얼마간 있다가 고향 장재촌으로 돌아와 농사도 짓고 사무원 노릇도 하였다. 1948년 용정 인민 학원의 초청으로 어문과 교수를 맡아 오다가 1년 후인 1948년 4월 연길의 동북 조선 인민 대학[연변대학의 전신]에 초빙되어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는 연변대학의 중심 학과인 조선 언어 문학 학부를 건립하고 발전시키는데 온 열정을 다 바쳤다. 그는 잠시 문학 창작을 뒤로 미루고 현대 조선어, 조선 문학사 등 5개 과목을 맡아 교수에 진력했다. 가끔 동료들이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물으면 “부교수(副敎授)와 문학 창작을 바꾸었어.”라고 말하면서 서글픈 웃음을 지어 보이곤 했다. 하지만 연변 문예 연구회 문학 부장, 문련(文聯) 부주임, 중국작가 협회 연변 분회 이사 등 직무를 맡고 일하면서 틈틈이 「새로운 마을」, 「행복을 아는 사람들」 등 10여 편의 문학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다.
김창걸은 평생 민족 문학과 교육의 창달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지만 지난날 조직을 ‘소극적으로 이탈’했다는 점으로 인해 줄곧 중용을 받지 못했다. 물론 중국 공산당에도 가입하지 못했다. 게다가 1957년 조선어의 순결성을 지키자고 발언한 것이 ‘죄’가 되어 1959년 지방 민족주의 혐의 분자로서 가혹한 비판을 받았고 교수직과 창작권마저 박탈당할 뻔하였다. ‘문화 대혁명 때에는 ‘잡귀신’, ‘반동 작가’로 몰리면서 어렵게 생활을 지탱했다. 그러나 역경 속에서도 김창걸은 묵묵히 학문 연구에 정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어문 기초 지식』, 『조선어 속담 사전』 및 『홍루몽』 등 중국의 고전 문학을 번역했다. 특히 ‘사인 방’의 실각 이후 기억을 더듬어 『김창걸 단편 소설 선집』(해방전편)을 복원했다.
김창걸이 광복 전에 창작한 콩트와 단편소설은 31편으로, 이는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김창걸 단편 소설 선집』(해방전편)에 실린 작품들로써 대체로 작가가 간직하고 있던 노트에 적힌 줄거리에 의거하여 '회상으로 그 줄거리를 되살려 정리'한 것, 즉 ‘복원’한 작품들이다. 이 부류에 속하는 작품들로는 「무빈골 전설」, 「수난의 한 토막」, 「두 번째 고향」, 「스트라이크」, 「그들이 가는 길」, 「부흥회」, 「암야」, 「낙제」, 「세정」, 「범의 굴」, 「밀수」, 「강교장」, 「개아들」(1940) 등 13편이다.
둘째는 『싹트는 대지』와 『만선 일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김창걸 소설의 원작들로써 「암야」, 「청공」, 「거울」, 「소고기」, 「마리아」, 「낙제」, 「천사와 요술」 등 7편이다. 이중 단편 「낙제」는 1980년 초반 작가가 '복원'한 「낙제」의 원작이다.
원작 「낙제」는 황금성(黃金星)이라는 필명으로 『만선 일보』 1940년 5월 6일과 7일에 2회로 나뉘어 발표되었다. 소설은 돈과 예물로 벼슬을 사고 승진하는 만주국 시대를 배경으로 성격이 다른 두 노동자의 생활을 대비적으로 그리고 있다. 주인공 ‘나’는 성실한 노동자이다. 융통성이 전혀 없는 주인공은 Y공장에 지정 인부(指定人夫)로 들어간 지 반년이나 되었지만 용원(雇員)이 되지 못한다. 하지만 들어 온지 한 달 남짓이 되는 '용선'이라는 친구는 손쉽게 용원으로 된다. 주인공은 용선이의 가슴에 달려있는 용원 마크를 보면서 착잡한 고민에 잠긴다.
지정 인부의 대우는 일반 인부보다 좋지만 용원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원이 되면 월급도 더 많이 받는데다가 수당까지 받게 된다. 주인공은 참혹한 생활 속에 용원만이라도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데 보통 1년이 걸려야 될 수 있는 용원을 친구 용선이는 한 달 만에 된 것이다. 저녁에 용선이는 용원이 되었다고 술을 한 잔 사면서 나에게 비밀을 알려준다. 용선이는 일본인 조장에게 귤 두 상자와 술 세 병을 뇌물로 바친 대가로 용원이 되었던 것이다. “…난 참 돈만 있고 먹이고만 보면 ×××인들 못할 것 같지 안 해. 이 세상 일이 다 그러하니깐 그래. 이 공장뿐 아니라 무슨 일이든지 제 자격을 알아서 써주겠거니만 믿으면 한평생 낙제니까. 낙제니까 낙제야. 자, 생각을 돌려 먹도록 하라구…” 약삭빠른 용선이의 인생철학이자, ‘나’에게 주는 권고이다. 그제야 어느정도 깨우친 주인공은 보름치 급여가 나오자 큰 마음을 먹고 귤 두 상자에 술 세 병을 사 들고 조장의 집을 찾아간다. 하지만 문 앞에 이른 그는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무거운 짐을 안고 다시 하숙방으로 돌아와 공연히 K라는 친구에게 술을 내면서 “흥, 나야말로 천생 낙제야. 낙제한 덕으로 오늘 저녁은 잘 먹는다.”라고 하며 쓰디쓴 웃음을 짓는다. 그로부터 7년이나 지났지만 주인공은 용선이의 방법을 한 번도 실행해보지 못하고 여전히 ‘낙제생’으로 인생을 살아간다.
이 소설은 부패한 만주국의 현실과 세속을 꼬집기도 했지만 세상물정에 밝으며 자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용선이와의 대비를 통해 아첨할 줄 모르는 성실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회와 개인의 갈등보다도 개인과 개인의 대비가 두드러진다. 타율에 의해 필봉(筆鋒)을 낮춘 결과인지는 모르나 이러한 소설 구조만이 만주국 언론통제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창걸의 소설 「청공」을 보기로 하자. 이 작품은 아편 중독자의 운명을 다루었다는 점에서는 현경준의 단편 「유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유맹」이 ‘국책 문학’에 속하는 작품이라면. 「청공」은 금전에 미쳐 결국 아편 중독자가 된 지식인의 타락과 참회의 과정을 사실주의적으로 그리면서 인간성의 부활과 승리를 보여준 감동적인 작품이다.
소설은 경춘이와 ‘나’(강영파)의 대화로 처음부터 인물들 간의 갈등을 예리하게 부각시킨다. 가난에 찌든 교원 생활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돈을 벌려고 경춘이의 권고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편 장사를 하는 친구 관식이를 찾아간다. 그러나 아편 장사꾼 치고 중독자가 되지 않는 이가 없는 법이다. ‘나’는 시험 삼아 한번 빨아본 뒤 중독자가 되어 아내까지 꼬드겨 중독자가 되게 하고, 돈이 생기게 되자 술집과 카페에 드나들다가 매독에 걸린다. 뿐만 아니라 그 병을 아내에게까지 옮겨놓는다. 한편 아편 장사를 ‘나’에게 인계해 주고 몇 년 간 어디론가 자취를 감추었던 관식이가 찾아오는데, 한때 아편 장사로 수만 원의 거금을 손에 쥐고 어깨에 힘주며 다니던 그는 아편에 중독되어 아내까지 팔아먹은 신세가 되어있다.
관식이는 아편 한 모금을 빨기 위해 남의 구두를 훔치다가 들통이 나서 행인들에게 늘씬하게 매를 맞고 마침내 기차에 치여 죽는다. 관식이의 죽음에서 ‘나’는 큰 쇼크를 받는다. ‘나’는 고향에 돌아갈 낯이 없는 자신과 건실한 교육가로서 참된 길을 걷고 있는 경춘이의 모습을 비교하며 크게 후회한다. ‘나’는 ‘자살’을 시도하던 나머지 아내와 더불어 아편을 끊기로 하고 각각 왼쪽 무명지를 끊어 맹세하기도 한다. 뺨을 때리고 외면했던 경춘이가 다시 찾아와 “강형, 옛날로 다시 돌아와 주…” 하고 머리를 짚어주고 이불을 다시 덮어줄 때 ‘나’는 마침내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의욕을 갖게 된다. 마지막 장면은 시적으로 ‘나’의 부활과 인간성의 승리를 예술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푸른 하늘이 사뭇차게 그립다.”는 말은 소설의 제목 「청공」과 호응되면서 전반 소설의 구성을 탄탄하게 마무리하고 있다.
「청공」에 뒤이어 김창걸은 『만선 일보』에 단편소설 「거울」, 「천사와 요술」, 「소고기」, 「마리아」 등을 발표했다. 「거울」은 만주에 들어와 어렵게 살아가는 농사꾼 최첨지의 생활을 따뜻한 사랑을 가지고 해학적으로 그린 작품이고 「천사와 요술」은 삼각연애를 다룬 재미있는 작품이다. 「소고기」는 식민지시대 지식인의 고달픈 생활을 다룬 소설이고, 「마리아」는 카페의 여급 생활에 권태를 느낀 마리아라는 젊은 여성을 동정어린 시선에서 그린 작품이다. 마리아는 최씨라는 한 유부남의 유혹에 걸려들어 몸을 망친 후 그 남자와 살림을 차리고 살았는데 본처가 나타나는 바람에 쫓겨나 카페의 여급으로 전락한 신세다. 마리아는 손님들이 치근거리고 달려들 때마다, 더욱이 아버지뻘은 됨직한 늙은이들이 음흉하게 수작을 걸 때면 몸서리를 치곤 한다. 마리아는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털어버리고 시골에 내려가 평범한 가정 주부가 되어 김도 매고 나무도 하면서 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한낱 꿈에 지나지 않을 것 같다. 농촌에 가도 꿩의 무리에 병아리 신세를 면할 것 같지 못했던 것이다. 착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마리아가 ‘무조건하고 단연히 이 생활만은 청산해야지’ 하고 중얼거리는데 ‘이랏샤이마세’하는 소리가 들린다. 마리아는 하는 수 없이 새로운 손님을 받아가지고 방으로 안내한다.
역시 사회 최하층에 살고 있는 불쌍한 여급의 삶을 그리고 있다. 타락의 원인이 너무 일상적이어서 주제 발굴의 기반을 잃었다고 하겠으나 몸과 웃음을 파는 윤락녀의 생활을 청산하려고 몸부림치는 마리아의 심리적인 갈등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랏샤이마세’라는 소리에서 그녀의 꿈과 재생의 몸부림을 통채로 삼켜버리는 정글 속 같은 어둠이 느껴진다. 바꾸어 말하면 불쌍한 여성들의 타락과 희생을 강요하는 만주국의 부패한 현실을 암시적으로 비판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원전으로 현존하는 김창걸의 소설 5편을 보면, 작가는 가난한 교원, 농민, 회사원, 지식인, 심지어 여급 등 조선인 사회의 최하층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으며 그들의 어려운 삶과 심리적인 갈등 및 인간적인 성실성을 찾으려는 노력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시대의 반역아, 일제와 착취 계급에게 정면으로 도전하는 최서해식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볼 수 없다. 최하층 인간들의 상대역은 지주나 자본가, 더욱이 일본인이 아니다. 낡은 세계의 보편적인 현상인 가난과 타락, 허위와 인간의 팔자일 뿐이다. 따라서 작품은 이러한 몽롱한 세계에서 깨어나려는, 인간적인 성실성을 되찾으려는 주인공들의 몸짓을 그리고 있다.
단편소설 「암야」는 『만선 일보』에 실렸다가 재만 조선인 작품집 『싹트는 대지』에 수록된 작품이다. 「암야」는 원전으로 볼 수 있는 김창걸의 소설에서는 물론이요, ‘복원’을 거친 김창걸의 모든 소설들을 통틀어 놓고 보아도 그의 대표작이다. 뿐만 아니라 안수길의 「새벽」, 「벼」, 「원각촌」 등 소설과 더불어 광복 전 재중조선인문학의 수준을 대표하는 4대 수작이라고 하겠다.
「암야」는 일제 치하의 잔학상을 이면으로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정서와 감정, 민족의 밝은 미래를 예술적으로 암시했다. 첫째로 명손이의 시점에서 일인칭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고분이에 대한 사랑, 가난이 죄가 되어 사랑하는 처녀마저 빼앗겨야 하는 억울함, 그러한 비극을 조성하는 착취 계급과 비정한 사회에 대한 울분, 반항의 정서가 전편에 흐르고 있다. 이는 ‘오족협화’의 허울 속에 창씨개명까지 강요당하고 개 돼지와 같이 혹사당하면서 힘겨운 삶을 살아왔던 조선인 개척민들의 민족 정서를 소설 속에 옮긴 것이다.
둘째로 소설은 험악한 사회제도를 부정하고 항거하면서 자신의 힘을 믿고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나가려는 당시 조선인 개척민들의 삶의 의지와 끈질긴 생명력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면서 민족의 밝은 미래는 반드시 도래하고야 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셋째로 이 작품은 민족의 생명의식과 저항의식을 암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주제의식을 짙은 민족적인 정서와 세태묘사로 형상화했다. 일제치하의 재만 조선인 문단에 이처럼 아름다운 우리말이 활기 있게 살아 숨 쉬고 민족적인 생활과 습관들이 마치 아름답게 수놓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다. 이러한 의미에서 장백일은 이 작품을 '아릿다운 민속생활의 단면도(斷面圖)'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암야」는 명손이와 고분이의 감동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통하여 만주국시기 우리민족의 생활과 정서를 암시, 대변하고 민족의 밝은 미래를 암시한 우수한 작품이라 하겠다.
복원본 「낙제」를 비롯한 『김창걸 단편 소설 선집(해방전편)』에 수록된 소설들을 재만 조선인 문학의 범주에서 배제해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윤동주의 시집이 해방 후에야 발표될 수 있었던 경우와 같이 원작은 사라지고 기억에 의해 복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러한 ‘김창걸의 문학 현상’은 권철, 조성일이 지적한 대로 '수난에 허덕이었던 우리 조선민족과 같은 피압박 민족들에게서만이 볼 수 있는 특이한 문학 현상'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지배 계급의 언론 통제나 타민족의 탄압이 가혹해질 때 진보적인 문학은 명주제(明主題) 외에 그 밑바닥에 암주제(暗主題)를 교묘하게 깔아놓게 되는데 이러한 암주제들이 ‘복원’된 김창걸의 소설에 와서 분명하게 명주제로 표현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복원본’에는 오랜 정치투쟁과 사회 실천을 거친 광복 후 김창걸의 새로운 의식들이 가미되어 있지만 역시 적잖은 부분들은 그 당시 표현하고 싶었지만 언론 통제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들이다. 또한 김창걸의 적잖은 소설들은 정식 출판은 되지 않았지만 야학의 독본(讀本)으로 이용되었거나 ‘필봉을 낮추지 않은’ 까닭에 퇴고된 작품이므로 광복 전 김창걸 문학에 대한 합리적인 보충으로 보아야 한다.
요컨대 원작으로 볼 수 있는 김창걸의 소설들은 비록 일제의 삼엄한 언론 통제로 말미암아 만주국시기의 주요한 갈등인 민족 갈등을 제시하고 일제 통치에 대한 비판을 직접 시도하지는 못했지만 해당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고 계급적 대립과 투쟁을 일반화하였으며 농민을 비롯한 착취 받고 억압 받는 최하층 인간들의 끈질긴 삶의 저력과 그들의 밝은 미래를 확신하고 있다. 특히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까지 강요하면서 국가 동원령을 반포해 무고한 조선인 젊은이들을 죽음의 늪 속에 밀어 넣고 문인들의 동참을 강요할 때 단연히 붓을 꺾고 침묵으로 대항한 김창걸의 모습은 역시 그 시기 다른 작가들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김창걸을 일컬어 저 '육도하(六道河) 기슭에 우뚝 서있는 선바위'와 같은 자랑스러운 향토 문학의 개척자요, 불굴의 민족 정신의 표상이라고 말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