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族 文學의 變遷史, 在中 朝鮮人 文學에서 中國 朝鮮族 文學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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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현대/현대 |
중국에서 조선 민족의 문학은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창립을 계기로 재중 조선인 문학에서 조선족 문학으로 변화하였다. 재중 조선인 문학이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으로서 조선족 문학의 모태라면, 조선족 문학은 재중 조선인 문학을 계승하면서 중국 소수 민족 문학과 세계 코리안 문학의 일부분이다.
중국 한인[조선족] 인구는 1백 90여 만 명으로 주로 동북 3성과 산동성 등 여러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한인[조선족]의 교육·문화 중심지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이다. 14세기 중엽에도 요동(遼東)일대에 몇 십만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조선인들의 중국 동북 지방으로의 이민은 오래전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얼후 전역[1619년]·정묘호란[1627년]·병자호란[1637년] 등 청나라와 조선의 전쟁에서 조선인 포로는 수십만 명이었다. 원나라 시기나 명말 청초에 중국 동북 지방에 건너온 조선인들은 지금의 요령성과 하북성에 있는 몇 개 ‘박씨촌’ 사람들을 제외하고 모두 만족이나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청나라 정부는 건륭 년간[1736~1795년]에는 두만강·압록강 유역에 대해 봉금(封禁)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조선 북부의 조선인들은 생존을 위해 이를 어기고 중국 동북에 건너와 살았지만 그 수는 많지 않았다. 조선인들의 본격적인 이주는 1869년부터 1874년까지 5년에 걸친 조선 북부의 흉작이 큰 요인이 되었다. 이주민의 대부분은 가난한 농민들로 훗날 재중 조선인 구비 문학의 주인공들이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1910년 경술 국치 이후 농민들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들도 동북 지방을 중심으로 망명을 떠나갔다.
이주 조선인들은 학교를 세웠고 독립운동이 동북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자들 주도의 항일 독립운동이 공산 주의자들 주도의 반일 투쟁과 공산주의 운동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항일 연극, 항일 가요들이 널리 보급되었다. 특히 1920년대를 전후하여 이주민 학교와 신문·잡지들이 생겨나면서 식자 인구(識者人口)가 크게 증가하였다.
또한,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으로부터 많은 기성 문화인들이 중국 동북과 중국 전역으로 이주하면서 자체적으로 문단이 형성되면서 문학 수준이 높아졌다. 중국에 살면서도 이민 공동체에 합류하지 않았던 김택영·신정·신채호 등의 문학을 조선족 문학사에 포함시키는 것에는 일부 논란이 있지만 이들 역시 간접적으로 중국에서 한인[조선족]의 형성 과정에 동참하였다.
동북 지역의 조선인들은 조선 민족의 한 갈래로서 재만 조선인 공동체를 형성했고, 자연스럽게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의 특징을 갖게 되었다. 첫째, 한인[조선족]은 한반도의 한민족과 동원성(同源性)을 갖고 있다. 둘째, 한인[조선족]은 한반도의 조선인들과 동일한 문화적 특징과 심리적 소질을 갖고 있다. 이는 공통의 민족 의식과 민족 정체성의 기초, 그리고 공통의 민족 감정의 토대가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문화적 속성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동북 지역의 한인과 중국 관내에 들어간 한인들은 중국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항하였다. 10여 년의 항일 전쟁과 중국 내 4년 동안의 해방 전쟁 이후 한인들은 중국인으로 전환되어 갔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으로 조선인 이민들이 중국의 소수 민족 중 하나인 조선족으로 전환되어 갔다. 그리고 조선족 문화는 중국 한족 및 기타 민족의 문화와 관련을 맺으면서 중국적인 요소가 점차 증가해 갔다. 조선족 문화는 한반도의 민족 문화와는 다른 문화적 독특성을 갖게 되었다.
우선, 재중 조선인 이민들은 다른 민족들과 함께 동북 지역의 개척자 역할을 담당해왔다. 명말청초 이래 동북에 건너온 조선인 이민들은 황막한 동북 변강을 개발하여 옥토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인 이민들은 근대 동북의 농업 발전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 벼농사를 널리 보급하기도 하였다.
다음으로 재중 조선인 이민들은 여타 민족들과 함께 제국 주의·봉건 주의·관료 자본 주의에 대항하여 새 중국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불요 불굴의 투쟁 정신을 보여주었다. 특히 1945년 8.15 해방 이후 중국 공산당의 편에 서서 4년 내전에서 싸움으로써 중국의 소수 민족으로서 자격을 갖추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전임 주석 양상곤의 말처럼 “중국 혁명의 승리의 기발에는 중국 한인[조선족]의 선혈이 물들어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계기로 조선인 이민들은 조선인으로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완전한 신분 전환을 이루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이후 60여 년 동안 한인[조선족]은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도 크나큰 기여를 하였고 이 과정에서 중국 국민의 일원으로서 자격을 굳혀나갔다. 따라서 중국과 공유한 문화적 요소는 더욱 증대되어 갔다. 그렇지만 한인[조선족]의 문화 구조 속에는 여전히 모국 문화의 요소가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호미 바바가 디아스포라 공동체의 문화적 특징을 ‘혼종성(混種性)’과 ‘양가성(兩價性)’이라고 했듯이 한인[조선족]의 문화 구조 속에는 여전히 모국인 한반도 문화의 요소와 중국 문화의 요소가 혼재되어 있다.
한인[조선족]은 디아스포라 공동체로서 그 문화 역시 디아스포라 문화에 속한다. 한인[조선족]이라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전 중국 인구에서 인구비중이 0.014% 에 불과한 소수 민족이다. 이러한 한인[조선족]이 영위하고 있는 문학은 전형적인 소수자문학[minority literature]이다. 조선족 문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로 중국 동북 지역에 사는 한인[조선족]이 향유하는 조선인 문학으로부터 중국 공민으로서의 한인[조선족]이 영위하는 조선족 문학으로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거쳤다. 중국 동북 지역의 조선인 이민 문학으로부터 조선족 문학으로의 변모는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계기로 하여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1945년 8.15 광복이전 ‘이민 시기’의 김택영, 신정, 신채호, 김중건, 윤동주, 주요섭, 김광주, 최서해, 강경애, 이육사 등 재중 조선인 문학은 조선족 문학의 형성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조선족 문학의 중요한 구성 요소일 뿐만 아니라 한 반도의 현대 문학사에서도 핵심적 요소로 취급되고 있다.
둘째, 조선족 문학은 독특한 민족적 특성을 갖고 있다. 형식적 측면에서 조선족 문학이 발전한 백년 이상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조선족 문학은 거의 대부분 한글로 이루어졌다. 이는 중국의 주체 민족인 한족 문학과도 다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언어, 문자가 없이 타민족의 언어 문자로 문학을 영위하는 만족, 회족, 장족(壮族), 묘족, 요족, 투쟈족 등 기타 중국 내 소수 민족 문학과도 다르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조선족 문학은 자민족의 독특한 역사와 현실 생활을 바탕으로 고유한 사상과 감정, 성격과 심리, 풍습과 자연 풍물을 재현하거나 표현함으로써 선명한 민족적 특징을 갖게 되었다.
모어(母語)창작과 한문(漢文)창작의 이중 운행[雙軌運行]이 이민 초기의 김택영, 신채호, 신정 등의 문학에서 나타나기도 했다. 1930년대를 거쳐 1945년 8.15 해방 이후에는 점차 모어 창작만이 이루어졌으며 리근전 등 극히 일부 문인들이 한문 창작의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1980년부터 조선문과 한문 창작의 이중 운행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98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한문 창작을 통해 중국 주류 문단에 등장한 것이 ‘중국 락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최건의 락음악과 결합된 가사 문학이다.
21세기를 맞이하여 한문 창작을 통해 중국 조선족 문학의 이미지를 크게 개선한 한인[조선족] 출신의 김인순, 장률, 아남 등의 작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문 창작 위주의 한인[조선족] 문인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지만 그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특히 김인순의 소설은 중국 주류 소설계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장률의 영화 문학은 세계적인 인정을 받고 있다. 이들의 한문 창작은 중국 조선족 문학의 위상을 한껏 높여주고 중국 조선족 문학이 변두리의 위치에서 벗어나서 중국 주류 문학 내지는 세계 문학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마련해주었다.
셋째, 여러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민족정체성을 확인하고 독특한 문학을 건설해온 조선족 문학은 주로 세 가지 중요한 흐름으로부터 발전, 변화해왔다. 중국 문학과 한국 문학 그리고 세계 문학이라는 이 세 가지 주요한 흐름에서부터 자신의 좌표를 설정하고 나아갈 방향을 조절하면서 문학 활동을 영위해왔다.
물론 매 시기 이 세 가지 흐름의 역할이 끊긴 적은 없었다. 이 때문에 조선족 문학은 중국의 주류 문학이나 기타 소수 민족 문학과 적잖은 공통 성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많은 차이와 자기 나름의 특수성을 갖고 있으며 한반도의 문학과도 적잖은 공통 성분을 갖고 있으면서도 차이와 특수성을 갖고 있다.
한인[조선족] 사회가 발전해온 특징과 중국 사회에서 문화가 발전, 변화해온 특징 및 조선족 문학이 발전해온 과정에 비춰 조선족 문학사를 다음과 같이 네 시기로 나누고, 각 시기별 문학 사조, 창작 방법상 특징을 살펴보도록 한다.
1) 이민 시기 문학 : 19세기 중엽 이후 부터 1945년 8.15 광복 까지
조선족 문학은 19세기 말, 특히 20세기 초부터 서구의 근현대 문예 사조와 문학 창작 방법을 적극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사실주의, 낭만 주의 창작 방법 및 기타 문학 사조와 창작 방법들이 조선족 문단에도 전파되었는데 주로 한반도 문단이나 일본 문단의 영향 아래 이루어졌다.
1920년대 부터 비판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이 문학상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당시 간도 지방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최서해의 단편 소설 「탈출기」·「홍염」 등이 그 사례이다. 1930년대에도 비판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이 맹위를 떨쳤는데 강경애의 단편 소설 「소금」·「채전」·「지하촌」 및 장편 소설 『인간 문제』 등이 이 점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공산주의 혁명 운동의 앙양과 소련 문학의 영향으로 1930년대에 들어서서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이 문학 창작에 이용되었는데 시·가사·극 등과 같은 항일 문학이 그 실례이다. 항일 가요 「메데가」 가사의 내용은 소련 무산 계급 문학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 그 곡조는 중국 한족의 전통적인 민간 가요 「양걸(秧歌)」에서 취했는바 전형적인 클레오리제이션(creolization) 즉 혼종성(混种性)을 보여준다.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기 일제 통치하 조선인 문단에서는 작가들의 정치 경향과 문예 사상의 차이에 따라 여러 창작 방법들이 존재했다. 즉 사실 주의·낭만 주의·자연 주의·상징 주의·퇴폐 주의·모더니즘 등이 혼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일제 통치하 조선인 문단에서 빛나는 성과를 달성한 것은 비판적 사실주의였다.
2) 정치 공명 시기 문학 : 1945년 8.15 해방 부터 1976년 10월까지
항일 전쟁 승리 후,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조선족 문학 창작은 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따랐다. 많은 문학 작품들이 개인 우상화의 도구나 시대정신의 메가폰으로 변했고 사실 주의적인 비판성과 진실성이 크게 손상당했다.
‘문화 대혁명’을 전후로 이른바 ‘혁명적 사실주의와 혁명적 낭만 주의를 결합한 창작방법’이나 ‘4인방’이 조작해낸 ‘3돌출의 창작원칙’을 따르기도 했는데 그 여파로 문학은 정치 운동과 계급 투쟁의 도구로 전락했고 많은 문학 작품들이 도식화, 구호화되었다. 문학인들도 주체성을 상실한 로봇 같은 존재로 변했다.
엄혹한 세월에도 김학철 등의 작가들은 올곧은 주체성과 작가의 의지를 잃지 않고 창작 활동을 계속하면서 사실 주의 전통과 5.4 신문화 운동 이래 계몽 문학의 전통을 살려나가면서 개인의 신격화에 반대하고 극좌 정치 노선이 몰고 온 사회적 부조리들을 날카롭게 폭로, 비판하여 『20세기의 신화』 같은 대작을 창작해내기도 했다.
3) 개혁개방 전기 문학 : 1976년 10월 부터 1989년 6월 까지
‘개혁개방 전기’는 인도 주의 사조, 사실 주의 창작 방법, 계몽 문학 정신의 부활로 특징지어진다. 이 시기 한인[조선족] 작가, 시인들은 유린당했던 인간의 권리를 되찾았고 창작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개혁개방의 새로운 현실을 재현하고 표현하였다. 이 시기의 상흔 문학, 반성 문학은 당시의 ‘반우파 투쟁’, ‘문화 대혁명’ 등 ‘잘못 처리되었거나 억울한 사건[冤假錯案]’들을 바로잡고 극좌 정치 노선이 빚어낸 오류들을 시정하는, 이른바‘잘못된 것을 바로잡는[撥亂反正]’ 정치 형세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문학 현상이며, 개혁 문학은 ‘개혁개방’이라는 중대하고도 통일적인 시대적 주제와 직접적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시기의 문학을 여전히 ‘정치 공명(政治共名)시기’의 문학이라고 할 수 있으나 이 시기의 작가들은 정치 세력이나 정치 형세의 억압에 의해 수동적으로 창작 활동을 한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이런 정치 형세를 작품에 반영했다. 이 시기 조선족 문학의 가장 주된 문학 사조는 인도 주의, 계몽 주의였고 가장 주된 창작 방법은 사실 주의 혹은 비판적 사실 주의인데 이런 사조와 창작 방법을 가장 선명하게 드러낸 작가, 시인들로 김학철, 리원길, 정세봉, 조룡남, 김동진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시기에 새로운 미학 원칙의 기치를 내들고 ‘의식의 흐름’의 서술 기법이나 상징주의 기법을 시도하거나 몽롱시를 제창한 문인들도 있다. 전통적인 사실주의, 낭만주의 창작 방법이나 창작 기법의 틀에서 벗어나서 중국 문단의 영향 아래 모더니즘 사조에 기대어 새로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한 장지민, 우광훈, 한춘 등이 이에 속한다. 이러한 경향은 1990년대 이후 조선족 문학이 문학 사조, 창작 방법, 창작 기법 면에서 다원화로 나아가는 전주곡(先声)이 되었다.
4) 개혁개방 후기 문학 : 1990년 부터 2010년 까지
1990년 이후인 ‘개혁개방 후기’에 중국사회는 이미 단일한 시대적 주제가 민족 정신이 나아가는 추세를 좌우지할 수 없게 되어 다원적 가치관이 지배적인 흐름을 형성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문학계 역시 여러 가지 문학 사조, 창작 방법들이 공생 공존하는 다원적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탈 정치, 탈 민족, 탈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탐미 주의문학 사조나 모더니즘 문학, 포스트 모더니즘 문학의 창작 방법과 창작 기법을 주창하는 작가와 시인들의 속출이다. 그 대표적인 보기로 한춘, 최룡관, 최삼룡 같은 이들을 들 수 있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많은 문인, 특히 시인들이 문학 실험을 시도하였는데 원시 주의를 표방하는 남영전의 ‘토템시’실험, 김파의 ‘입체시’실험, 폭력적 이미지의 조합에 심취한 최룡관의 ‘초현실주의시’실험 등 여러 문학적 실험들이 시도되었다.
이와 반대로 김학철은 5.4 신문화 운동 이래의 계몽 문학의 전통을 계승하여 노신을 자기의 스승으로 삼으면서 자각적으로 비판적 사실주의 창작 방법을 잡문 창작에 시종일관 운용하였고 박선석 역시 『쓴웃음』, 『재해』 같은 장편 소설들에서 상흔 문학, 반성 문학의 계보를 이어가면서 극좌 정치 노선이 빚어낸 사회적 부조리들을 끈질기게 폭로, 비판했으며 허련순, 석화, 리혜선, 박옥남 등 소설가와 시인들은 창작을 통해 중국 한인[조선족]의 실존적 상황을 리얼하게 재현하고 민족 정체성과 민족의 진로에 대해 탐구하거나 모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