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안도현 신둔촌의 어제와 오늘

한자 安圖縣 新村의 어제와 오늘
분야 지리/인문 지리|생활·민속/민속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장흥향 신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8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1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7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2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53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68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3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79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6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08
마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장흥향 신툰촌
한민족의 전통 문화를 지키고 있는 마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장흥향 신둔촌(新屯村)은 ‘새마을’이라고도 불리는 한민족 고유의 전통 문화를 상당 부분 간직하며 살아 온 전형적인 조선족 마을이다. 마을에는 연길에서 백두산 가는 길에 만나는 첫 번째 도시인 안도현 명월진과 연결 되는 작은 길을 통해 버스가 하루에 두 번 오가고 있으며 장흥향 소재지와는 6.2㎞ 떨어져 있다. 주변이 참나무 등 밀림으로 우거진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분지 형태의 오지이다.

만주국이 개국한 이후인 1938년 경상남도 밀양과 합천, 거창의 주민들이 이주하여 마을이 만들어졌다. 일제의 강제 이민 흔적이 상당 부분 남아 있으며 구성원 모두가 조선족인 조선족 집단 마을이다.

신둔촌은 중국 동북 3성에서는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당집과 상여를 여전히 보존하고 있으며 한국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장례를 치루는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남사당패가 전수한 「농악무」를 오늘날까지 지켜 오고 있어서 문화 혁명 이후 사라진 「농악무」를 재건하여 동북 3성의 조선족들에게 새롭게 전파하였다. 된장과 고추장, 김치는 물론 막걸리 등을 직접 제조하고, 한국의 전통적인 먹거리를 주식으로 하고 있다. 신둔촌의 조선족들은 한민족의 문화적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특히 민속 부분에서 한국에서도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전통을 지키고 계승·발전시키고 있다.

현재의 조선족 문화에는 한국과 중국의 과거와 현재가 누적되어 있다. 현재의 모습을 기록하는 것은 현재를 비롯하여 가까운 과거의 문화를 읽어내기 위한 텍스트를 준비하는 일이다. 그들의 머릿속에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어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못지않게 시급한 일은 현재에 남아 있는 생활 모습, 문화의 장면을 시각적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그러나 조선족 사회는 한국과의 국교 수립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산업 사회의 도래와 시장경제 원리의 도입 등으로 농촌 인구가 감소하였다. 뿐만 아니라 코리안 드림의 열풍 등으로 농경 문화가 붕괴되면서 마을 공동체의 고유한 생활 양식이나 전통적인 삶의 문화가 사라져 가고 있다.

새마을[신둔촌] 역시 다른 조선족 마을과 같이 출산율의 저하와 젊은 인구의 도시 유출 등 여러 복합적인 원인으로 마을의 고유한 문화가 점차 소멸되어 가고 있는 상태이며 언젠가는 한족에게 동화될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서 살고 있는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민감한 지역으로서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의 현실을 고려할 때, 중국 정부의 협력과 중국 학자들의 자발적인 연구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장의 사진은 글로써 표현하기 힘든 많은 내용을 기록하고 전달할 수 있다. 문화를 기록하는 인류학자들이 차츰 사진에 의존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필자는 1999년부터 지금까지 14년 간 여러 차례 새마을을 방문하여 그들을 인터뷰하고 대화를 통하여 마을의 현실을 이해하면서 마을의 환경과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촬영해왔다. 이러한 내용을 바탕으로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이 남긴 기록을 참조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새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새마을 사람들의 독특한 삶, 문화의 정체성은 중국 한족(漢族)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현재 한국인의 모습과도 차이가 많다. 그 속에는 그들이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이주와 적응에 대한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것은 그들이 떠나온 고향의 문화를 바탕으로 이곳의 기상 조건에 적응하고 주변의 이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살아온 삶의 지혜가 축적된 문화라고 생각하며 민족 문화의 소중한 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그것을 바르게 기록하여 제대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 필자가 선택한 과제이다.

굶주림의 마을에서 중국 최고의 조선족 마을로..

연길에서 백두산을 향하다 만나는 첫 번째 도시는 안도현 명월진이다. 명월진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명월진의 중심이 나온다. 명월진을 관통하여 조금 더 가다보면 ‘명월진 회의’를 기념하는 비석이 나오고 장흥향 소재지를 지나서 비포장 도로를 조금 더 올라가면 오봉 마을과 새마을이 나온다. 새마을과 오봉 마을은 경상남도 밀양의 40호와 합천의 30호, 거창의 30호가 이주하여 형성된 것으로 일제에 의해 조성된 집단 마을에서 출발하였다. 그들은 만주로 가면 주택을 무상으로 제공 받고 5,000평 이상의 논 역시 무상으로 제공받아 농사를 짓을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이주를 하였다. 게다가 자식들을 대학까지 무상으로 교육시켜 준다는 일제의 거짓 약속은 일가족 전체의 이주를 결심하게 하였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1938년 3월 19일 보슬비가 내리는 대구역에 집결하여 하루를 자고 그 다음날 열차를 타고 4일 만에 안도현에 도착했다고 한다. 그들은 두만강을 건너면서 다시는 조선에 돌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한다. 당시 누군가에 의해 지어진 노래는 당시의 정경을 이해하는 단초가 될 수가 있을 것이다.

동무들아 잘 있거라 나는 간도로

비 나리는 그 날을 못 잊겠노라

기차는 달려서 두만강 건너

백설이 자욱한 북만주로다.

3월 25일 안도현에 도착한 조선 이주민들은 지금의 마을 아래쪽과 위쪽에 접하여 있는 수동촌과 도안촌, 오봉촌 등 한족들이 살고 있는 집에 단칸방을 빌려 임시로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만선 척식 회사[이하 만척]에서 배급하는 썩은 좁쌀로 연명하면서 초막을 세우고 버려진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당시의 식량은 아무리 가난한 농민이었다고 하더라도 조선에서는 먹지 않았을 정도로 질이 낮고 먹을 수 없는 정도의 식량이었으며 절대량도 모자란 것이었다.

그래서 이민 모집 당시의 약속이 모두가 거짓인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가난한 이주자들은 어떻게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이 체념하고 이곳에서 정착을 시도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어려웠던 일은 따듯한 남쪽 지방에서 살아 왔던 사람들이 별다른 방한 장비 없이 가혹할 정도로 혹독한 북만주의 겨울을 지탱하면서 냉해와 풍토병에 시달려야 했던 것이다. 이주 초기 노약자와 어린이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고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게다가 먼저 정착한 한족들과의 알력 다툼과 일제의 탄압까지 받으며 버려진 황무지를 개척하고 주택을 짓고,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고난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신둔촌은 집단 마을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외부로 부터의 안전과 마을의 경계를 위해 토성을 쌓고 북문과 남문을 만들었다. 마을 바깥에는 2m 넓이의 해자를 파고 나무를 엮어 울타리에 철망을 쳤다. 대문 위와 네 귀퉁이에는 초소를 만들었으며 언덕 위에는 포대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시설은 비적을 막는다는 구실이었지만 실제로는 독립군이나 공산당과 주민들의 접촉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3년이 지나자 기본 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토지가 개간되었지만 일제의 군량미 공출로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마을 주민에게 분배된 토지는 부락과 8㎞ 넘게 떨어져 있으며 추수를 하고 난 후 공출을 하고 나면 식량이 모자라 이웃 마을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농한기에 숯을 구워 팔아서 빚을 갚았다. 천이 모자라서 마대 조각으로 옷을 해 입었으며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보초를 섰다. 보초를 서다가 졸면 구타를 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으며 무조건 복종을 해야만 무사할 수 있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중국 정부로부터 무상으로 인구 비례에 따른 토지를 분배 받았고 1947년부터는 토지 부근으로 이사를 하여 1952년에는 현재의 위치로 마을을 집중시켰다. 1946년부터 해방 전쟁에 참전하기 위한 군입대가 증가하였고 1947년에는 부모 형제도 모르게 참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1953년에 큰 흉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토지가 많은 흑룡강성의 가목사 등지로 10여 호가 이사를 하였다. 1960년도에는 흉년으로 식량 사정이 어려워 메주나 콩깍지는 물론 나무껍질이나 축사의 사료를 먹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1968년 권동현[1921년생]이 대장을 하면서 주민들과 함께 마을 위 800m의 물길을 돌리고 제방을 쌓으며 개간을 한 후부터 해소되기 시작하였다. 1973년부터 벽돌 공장, 기와 공장, 철 공장, 숯 공장 등을 건설하였으며 축사를 개량하고 주택 개량 사업을 하여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모범 마을로 선정되었다. 이러한 발전으로 1970년대 전 중국에서 유명한 조선족의 모범 마을인 길림의 아라리 마을에서 이곳을 롤 모델로 삼았다고 하니 당시의 발전 정황을 추측할 수 있다. 1973년에는 마을 아래의 강줄기를 돌려 발전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현재 마을의 주요 경작지와 산지의 면적은 밭이 52㏊, 논이 31㏊, 산이 850㏊이며, 주산물은 벼와 콩 등이다.

조선인의 전통을 잇는 조선족 마을

새마을은 현재까지 한 호의 한족도 받아들이지 않는 순수한 조선족 마을이다. 이와 같이 조선족 마을로 남아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마을에 입주하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의 동의를 받아야만 하는 독특한 중국의 제도 때문이다.

마을의 구성원들은 대부분 1938년 함께 이주한 사람들과 그들의 후예들이다. 더욱이 그들은 같은 고향 사람들끼리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따지고 보면 대부분이 친척이다. 그래서 서로 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으며 의사 결정 과정에 의견통일을 하기가 쉽다.

마을의 행정 구조는 중국 공산당 신둔촌 위원회 지부 서기와 촌장, 서기, 부녀 주임 등이 있으며 마을의 시니어 그룹인 노인회가 있다. 마을의 중대사는 이들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촌장이나 지부 서기 등 마을의 수뇌부는 선출직이기 때문에 주민들의 의사를 존중하는 관습이 있고 노인회의 회장과 부녀 주임은 언제나 의사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1952년 토지 부근으로 마을을 이주시켰을 당시와 마을의 기본적인 구조는 큰 차이가 없으나 1973년 주택 개량 사업의 일환으로 새롭게 재건되었으며 2008년 신농촌 건설의 일환으로 지붕과 외형 등을 현재의 모습으로 통일하였다. 100호의 주민들은 1952년 63호가 새마을에 바둑판 모양으로 구획 정리를 하여 통일된 구조로 주택을 건설하여 입주하였다. 37호 중 일부는 타지로 떠났으며 나머지는 원래의 초가집 형태를 2000년대 중반까지 유지하고 있었던 아래 마을 오봉촌 한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새마을의 가옥 구조는 한 채의 기다란 주택의 중간을 막아 둘로 나누어 두 호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당과 외양간이 있고 현관문으로 들어가면 바로 부엌과 거실 겸 침실이 붙어 있는 통칸형 가옥 구조로 실내가 한눈에 보이며, 난방과 취사를 할 수 있는 아궁이가 있다. 난방은 구들장을 놓은 온돌로 이루어지며 장작불을 피워서 사용한다. 거실의 건너편은 창고이며 식수로 사용하는 펌프는 겨울철의 동파를 막기 위해 부엌에 붙어 있다. 세면을 할 수 있는 곳은 현관문 옆에 있다.

집 뒤로 나가면 굴뚝이 붙어 있는 집 앞으로 채전 밭이 있고 채전 밭 한쪽 구석에는 여름철 취사를 위한 화덕이 있다. 거실은 간혹 자녀가 성장한 가정 중에서 미닫이문으로 나누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회의나 잔치를 할 때 아주 편리하다. 그리고 식기 등의 집기를 넣는 찬장은 부엌 쪽에, 이불장이나 옷장, 재봉틀, 책상 등은 거실의 양 옆이나 정면에 배치되어 있다.

거실은 침실을 겸하고 있다. 손님이 많을 때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안주인은 혼자 사는 친구가 있는 옆집으로 피신을 한다. 손님들에게 편안한 잠자리를 배려하기 위해서이다. 집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통칸식이라 요를 깔고 두 줄로 누우면 10명도 너끈하게 잘 수 있다. 충분하게 지핀 장작불과 흙벽돌, 솜이불은 혹한의 북만주 겨울 날씨도 녹여주기에 충분하다.

아래 마을인 오봉촌은 초가집이 많았는데 외형은 한국의 옛 초가와 차이가 없다. 대문을 들어서면 외양간이 보이고 잘 정돈되고 다져진 황토로 된 마당이 있다. 마당에는 곡식 창고나 닭장, 호박, 디딜방아가 보이며 옆으로 채전 밭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실내로 들어가면 새마을의 실내 구조와 흡사한 북방식의 통칸형 구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져서 남아 있지 않다.

주택의 벽은 아래 마을이나 윗마을 어디서나 흙을 이용한 토담으로 되어있으며 흰색의 회벽을 바르고 창문과 현관문은 청색을 많이 사용하고 있어서 멀리서도 조선족의 집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가 있다. 겨울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마을길 양 옆에 꽃이 만발하여 아름답고 정겨운 거리가 펼쳐진다.

2008년 신농촌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주택 개량 사업에 의해 마을의 외향적 모습은 많이 바뀌었다. 지붕은 금속제를 사용하였으며 외벽은 시멘트를 덧발랐고 원래 홍송으로 되어 있던 나무 대문은 합성수지 대문으로 바뀌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면 모든 집들의 외향은 통일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은 여타 조선족 마을과 비슷하지만 지붕이나 외벽의 색깔은 조금 다르다. 내부의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며 집의 외향이나 처마, 지붕의 모습에서 조선족 특유의 선이 남아 있다.

옥수수 막걸리와 두리반

중국 조선족 식생활 문화는 한국의 전통적인 음식 문화가 골격을 이루지만 조리 방법은 인접해 있는 한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새마을의 식생활 문화는 중국 조선족 농촌 지역 식생활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인근에 다양한 소수 민족이 많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민족 식생활의 영향을 적게 받았으며 도시와 어느 정도 떨어져 있으며 출신 고향이 비슷한 사람들 끼리 모여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만의 전통이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밥상에는 매 끼마다 쌀밥과 찌개, 무침 채소와 김치 등이 차려져서 한국 전통적인 식단과 비슷해 보이지만 전통 한국식보다는 기름의 사용량이 많으며 볶음 요리의 특성은 중국의 것에 영향을 받았다. 밥은 흰 쌀밥에 간혹 거피(去皮)를 한 옥수수를 섞었다. 드물게 야채 국이나 인근 논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끓일 때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국은 찾아보기 힘들고 찌개는 된장찌개가 주류이며, 간혹 김치찌개나 두부찌개, 동태찌개도 오른다.

밑반찬은 깻잎과 김치 등이며 콩나물과 두부, 계절 채소를 이용한 요리가 많다. 양념은 된장과 마늘, 고추장, 고춧가루 등이 빠지지 않으며 조미료 사용량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그리고 봄이나 여름에는 텃밭에서 나는 채소를 이용해서 무침이나 쌈으로 먹기도 한다. 쌈 채소로는 민들레와 상추, 풋고추와 파 등이 일상적인데 최근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종자로 재배한 여러 가지 채소들을 만날 수 있다. 텃밭의 한쪽 구석에는 우엉과 방아도 보인다. 그것은 고향의 맛을 간직하고자하는 이곳 사람들의 정성된 마음이다.

귀한 손님이 오는 날에는 두부를 만들거나 삶은 계란, 삶은 돼지고기가 나오고 돼지고기 볶음 요리도 곁들인다. 두부를 만들면 간수를 넣지 않는 순두부나 사각으로 잘라 접시에 담은 모두부를 사람마다 한 그릇씩 올린다.

이 지역은 겨울이 길고 기온이 낮아서 움의 문화가 발달되어 있다. 움은 겨울철 창고의 개념으로 깊이와 넓이가 보통 자그마한 방과 비슷하다. 겨울에는 김치나 채소들이 어는 것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냉장고 대신 사용한다. 움 속에서 보관된 야채는 교통이 나빠 도시로부터 풍부한 영양을 가진 재료를 공급 받기 어려운 이 곳 농촌 겨울 식단에 비타민 C와 섬유질 공급을 원활하게 해준다. 숙성된 김치는 초여름까지 먹을 수 있다. 메주가 매달린 풍경이나 청국장 띄우는 냄새는 겨울철 어느 가정에서나 쉽게 볼 수 있다.

새마을의 밥상은 어느 집이나 두리반이다. 상차림과 식사 순서는 대부분 중국 조선족 마을과 비슷하다. 손님상에는 음식이 포개어질 정도로 많고 남기는 것을 미덕으로 여긴다. 식사를 하는 순서는 안주가 네 가지 이상 나오면 술을 마시기 시작하는 중국의 풍습과 같으며 마실 때마다 건배 제의를 하고 덕담을 나눈다. 혼자서 홀짝 홀짝 마시는 습관을 가진 필자는 가끔 혼자만 먹느냐며 핀잔을 받기도 했다. 손님에게는 식구마다 술을 권하고 술이 끝난 후에야 식사를 하는데 찌개를 포함한 모든 반찬은 안주가 되어 밥을 먹을 때에는 맨밥을 먹는 경우도 있다. 식후에 숭늉이나 더운 차를 마시는 경우는 적고 대부분 냉수를 마셨으며, 과일 등의 후식을 먹는 습관은 없다.

대부분의 조선족 마을에서는 보통 한국에서 빼갈이라고 부르는 백주[조선족들은 빼주라고 부른다]를 반주로 사용하지만 새마을에서는 막걸리를 반주로 하기도 한다. 새마을의 막걸리는 옥수수로 담그는데 막걸리 제조의 달인은 강덕이[1940년 생] 할머니이다. 그녀는 인근에서 막걸리와 된장, 그리고 간장과 고추장 담그는 솜씨가 제일이다. 전통적인 토속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잃어가는 많은 조선족들에게 그 방법을 전수하기도 하였다. 지금은 연변 일대에도 막걸리 열풍이 불어서 많은 사람들이 새마을의 막걸리 비법을 배워갔다. 새마을의 막걸리는 신맛이 약간 나고 감칠맛이 있으며 연 노란색을 띄고 있는데 옥수수로 고두밥을 쪄서 담근 것이다. 그리고 인삼 등의 약재를 넣기도 하는데 인삼 막걸리는 도수가 좀 더 높으며 감칠맛과 깊은 맛이 더한 것이 특징이다.

경상도의 ‘밍태’를 말하는 새마을 사람들의 언어

전술한 바와 같이 새마을은 경상남도 거창과 합천, 밀양 출신들이 농사를 지으면서 집단 거주 지역을 형성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온 1938년도의 경상도 사투리가 마을의 표준 언어로 현재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상당수 타 지역 출신 여인들이 시집을 왔고 고향이 다른 사람들이 이사를 오기도 하였지만 절대 다수인 경상도 사람들의 언어 습성에 동화되어 토착화 되었다.

마을에는 최근까지 타 지역 주민들의 이주가 미비했기 때문에 새마을 초기 고유한 언어의 특성을 대부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들의 언어에는 한국 땅에서 건너올 때 사용하던 말들도 있으며 중국 땅에 와서 타민족의 영향을 받아서 생겨난 언어들도 있을 것이다. 새마을 사람들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언어 중 몇 가지 특색있는 언어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새마을에서 사용하는 말들 중 기억에 남는 용어는 ‘우엉’을 ‘우봉’이라고 하고 ‘누룽지’는 ‘가마치’, ‘상여’는 ‘향두’, ‘많다’는 것을 ‘까뜩하다’, ‘망가졌다’라고 하였다. ‘부서졌다’를 ‘마사졌다’, ‘명태’를 ‘밍태’, ‘두유’를 ‘콩물’이라고 하며 ‘주문했다’를 ‘쑹했다’ 라고 하는 것 등이다. 그 외에도 조사나 형용사 등에서 한국에서는 이미 사라져버린 말들이나 중국어의 영향을 받은 말들이 상당수 있어서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조선족 농악무를 보전하고 계승하는 새마을

이주 초기 마을이 정착 단계에 접어들자 만척 주식 회사는 유화 정책으로 홍농회를 통해서 조선인들에게 민속을 주제로 하는 놀이 문화를 보급하였다. 1941년 관혼상제 의례를 위한 상여와 가마, 사모관대, 활옷 등과 농악 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구, 매구, 징, 꽹과리 등이 그것이다. 주민들은 단오나 보름, 추석 등의 명절에 농악을 즐기면서 향수를 달랠 수 있었다.

당시 새마을의 보도원이던 제국 대학 출신 의사인 김평권은 농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기도에서 남사당패 출신인 이기익 옹을 초빙하여 농악을 지도하였다. 그러한 노력 끝에 만주국 창설 10주년을 기념하는 경축 대회에서 동북 3성의 6개 민족이 참가한 소수 민족 민속 대회에서 새마을이 1등 상을 수상하게 되었고 그것을 기점으로 이 마을의 농악은 더욱 활성화 되었다. 광복 후에도 마을의 농악은 계속 되었고 마을에서 성장한 이범용[1923년 생] 옹 등은 어릴 때부터 농악을 익히면서 즐겼다.

「농악무」가 사라지게 된 것은 문화 대혁명의 영향이다. 문화 대혁명이 일어나자 농악 등 전통적인 민속은 민족의 분파를 조장하는 구습으로 타파되어야 한다고 규정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조선족의 전통 민속 악기인 북과 꽹과리 등을 불태우고 「농악무」 자체를 금지하였다. 그러나 이범용 등 마을에서 「농악무」를 사랑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꽹과리 등의 민속 악기를 천장이나 땅속에 숨겨놓고 보관하였다. 그래서 문화 혁명이 끝난 후 개개 민족의 민속 풍습이나 특성의 표현이 자유로워진 1974년 3월 8일 부녀절에 「농악무」 한판을 벌려 갈채를 받았는데 그 주인공들은 이범용, 정주영, 정현주, 강영운 등이다.

그 후 북과 소고, 장구, 상모 등을 제작하거나 구입하여 새롭게 농악대를 구성하였고 우리의 노인회에 해당하는 노인 독보조를 중심으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문화 대혁명 이후 새마을의 공식적인 농악 첫 공연은 1979년 마을 주민들이 안도 저수지에 유람을 갈 때였으며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에 의해서 입소문이 나서 인근 조선족 부락에 많이 전파되었다. 소문을 들은 길림 TV가 기획 프로그램으로 제작하여 1986년 8월 1일 방영한 후 새마을의 「농악무」는 동북 3성 언론의 집중적인 취재를 받았다. 현재는 전 중국의 조선족 부락에 전파되어 중국 조선족 전반에 「농악무」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범용은 「농악무」를 재건한 이외에도 농요나 옛 노래들도 잘 불렀고 어릴 때 어른들이 부르던 고향의 노래들을 기록하여 전수하기도 하였다. 필자와 인터뷰할 때에는 만주로 건너온 직후의 심정을 부인과 함께 노래하면서 처연한 심정으로 눈가에 이슬이 맺히기도 하였다. 이범용의 영향을 받은 마을의 주민들 중에는 저녁에 모여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일과가 된 시절도 있었으며 그 가사를 기록하여 남기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용운[1923년 생]은 이범용이 아들을 따라 하얼빈으로 이주한 후 실질적인 「농악무」의 책임을 맡아 젊은이들에게 전수하면서 같이 공연에 참가하였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금은 마을 전체 주민이 모두 농악에 심취하여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농악을 즐기고 있다.

새마을이 자리 잡고 있는 안도현백두산 언저리에 속하며 두만강 유역이라고 할 수 있는 북만주의 중심 지역으로서 조선족이 주류를 이룬다. 혹한의 추위를 동반한 이곳의 겨울이 매우 길고 생활의 근간이 농사이기 때문에 기나긴 겨울 농한기는 특히 한가롭다. 이러한 이유로 신정에서부터 전통 명절인 설날, 정월 대보름은 물론 부녀절이 있는 3월 초순까지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다.

설날은 춘절(春節)이라고도 부르는 중국 최고의 명절이다. 중국에는 곳곳에 다양한 소수 민족들이 많기 때문에 지역마다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참여하여 경연하는 민속 경연 대회가 개최된다. 설날부터 대보름 사이에는 마을 단위로 경연 준비에 매우 분주하다. 새마을은 매 해 민속 경연 대회에 참가하고 있으며 안도현에서는 1등을 도맡아 수상하는 마을 중의 하나로 조선족의 사기를 높이고 있다.

필자는 새마을과 인연이 있어서 여러 차례 방문하였는데, 2000년 대보름 때에는 며칠을 마을에서 묵었다. 당시의 정경을 소개하고자 한다.

새마을에서는 음력 정월 13일 날 소를 잡았고 아랫마을인 오봉에서는 14일 날 돼지를 잡았다. 원래 두 마을은 한 마을에서 갈라져 나와 뿌리가 같은 마을이었는데 여러 가지 연유로 두 마을로 나뉘어 졌지만 친척이나 친구들이 많아서 한 마을 같이 지내고 있다. 15일에 안도현에서 있는 민속 경연 대회에 꼭 참석하라는 현의 독려로 이번 보름 행사도 같이 하기로 결정하였고, 14일에 음식을 장만하여 마을 잔치를 열었다.

15일 아침 강덕이 할머니는 새벽에 오곡밥을 짓고 나물 반찬을 해서 먼저 외양간에 있는 소에게 먹였다. 그것은 소가 어느 것을 먼저 먹는가에 따라서 그 해의 농사에 대비하는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집에서 담근 막걸리로 귀밝이술을 마시고 오곡밥을 든든히 먹은 후 대절한 버스에 올라 안도에서 거행되는 민속 공연에 참가한 후 마을로 되돌아 왔다. 민속 공연은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16개 팀이 벌리는 경연이었다.

저녁에는 폭죽을 터트리며 달집이 있는 마을의 공터로 주민들이 몰려들었고 농악장단과 춤사위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달이 뜨고 한 해의 풍년을 빌면서 달집을 태웠다. 달집을 태운 후 마을 지부 서기[촌장보다 윗자리에 있는 마을 행정의 책임자임. 정확한 명칭은 중국 공산당 신툰춘 지부 서기이다.]의 집에서 벌어진 뒤풀이를 하는 도중 안도현으로부터 1등을 축하한다는 전화를 받고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뒤풀이에는 빼주라고 부르는 중국 고량주도 등장하지만 이곳 강덕이 할머니가 담근 막걸리도 애용되었다. 예전에 이 마을에서는 막걸리는 여자들이 마시는 술이라고 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남녀 구분 없이 주민 모두가 애용하고 있다.

16일 아침 새마을의 주민은 경연 대회 때문에 연기한 지신밟기를 위해서 아랫마을인 오봉 마을로 이동하여 한해의 액을 모두 막아 달라는 김태호[1927년 생] 노인의 선소리에 발맞추어 지신을 밟고 떡을 치고 풍악을 즐기며 원래가 한 뿌리였던 두 마을의 화합을 다짐하였다.

종구쟁이의 구슬픈 선소리에 지나는 진남순 할머니의 상여

새마을에는 옛날부터 당집이 있었고 상여가 보관되어 있다. 초기의 상여는 전술한 바와 같이 1941년에 마련한 것이다. 그것들은 문화 대혁명 시절 구습 타파라는 명목으로 불태워졌고 문화 대혁명이 끝나고 다시 만들었다. 필자는 우연히 방문한 마을에서 당시 79세의 나이로 사망한 진남순 할머니의 장례 과정을 살펴보게 되었다.

망자의 소망은 고향의 남편 옆에 합장을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소망을 알고 있는 상주들은 눈물겨운 준비와 상주 친구들의 헌신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어머니가 원하는 장례를 치룰 수가 있게 되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망자가 사망하기 직전 자식들은 연길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퇴원시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안도 병원으로 옮겨서 임종을 맞이하였다. 그것은 망자가 사망한 지역을 벗어나서 장례를 치룰 수 없으며 도시에서는 화장해야만 하는 중국의 법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 후 상주의 친구들이 안도현 당국에 진정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장례 허가서를 발부 받아 작고한지 25년이 지난 남편의 무덤이 있는 새마을에서 장례를 치르게 되었다.

영구차가 마을에 도착하자 마을 노인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꽃상여에 종구쟁이의 선소리와 만장을 앞세우고 장례식이 거행되는 산소로 향하였다. 장성한 자식들과 손자들이 여럿 있고 80이 다된 나이에 복 노인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세상을 떠난 고인이었지만 종구쟁이의 목소리는 자못 구슬펐다.

어∼흥 어∼흥 어화 넘차 어∼흥

이제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가겠네

장성 같은 자식 두고 북망산천 웬 말이냐

어∼흥 어∼흥 어화 넘차 어∼흥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적절한 재담을 실어 산천을 울렸다. 오늘의 종구쟁이는 합천 출신의 권유세가 맡았다. 권유세는 고인과 한 고향 출신에 한마을에서 오랫동안 함께 살았기 때문에 고인의 가정사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권유세의 선소리 속에는 고인과 관련된 애틋한 이야기들이 들어 있었고 상주와 문상객들 모두 그 시절을 회상하는 듯 숙연해졌다. 그리고 쉬어가자거나 저승 가는 길에도 노자 돈이 필요하다고 망자의 목소리를 흉내 내어 상여를 멈추면 상여를 따라가는 백관과 상주들은 상여 앞 새끼줄에 지폐를 걸고 절을 했다. 당시 함께 동행 하였던 50대 후반의 용정 문화관이광평 관장은 평생 처음 보는 장례식이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고 그가 촬영한 영상물은 연길 방송에서 특집으로 방영되어 동북 3성 조선족들의 갈채를 받았다.

장례는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먼저 산신제를 지내고 하관을 한 뒤 맏아들이 취토(取土)를 하고 뒤를 이어 둘째와 며느리. 딸, 사위 손자, 친척과 친구들 순으로 취토를 마치고 평토제를 지낸 후 음복을 하고 봉분을 마무리 하는 등 모든 과정에서의 진행 방법은 한국의 전통 방법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축문이나 상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발전적 방향을 모색하는 새마을의 생일

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한 고향 출신으로 함께 이주하여 생사와 고락을 같이해 왔다. 새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정착한 3월 25일을 마을의 생일로 정하고 이 날에는 성대한 마을 잔치를 벌인다. 이 날 만큼은 외지로 나간 마을 출신 사람들도 모인다.

잔칫날의 제일 중요한 일은 마을의 이주사를 낭독하는 것이다. 그 속에는 그들이 살아왔던 고난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남긴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주 60주년의 행사를 기록해 놓은 비디오테이프를 보면 이주민 1세대 중 한 할머니는 “오늘이 시집갈 때보다 더 좋은 날이다”라며 기뻐하였고,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는 현실에서 어렵게 고생하다 먼저 간 친·인척들과 마을 주민들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좋은 세상 한번 살아보지도 못하고...” 라고 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노인들을 볼 수가 있었다.

해마다 3월 25일에 마을 생일을 갖고 있는 안도현 장흥의 새마을과 오봉 마을은 2000년 초 마을 회의를 열어 마을의 생일날마다 술추렴이나 하면서 지내는 것은 마을의 발전에 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발전적인 방향으로 마을 생일 행사를 변화시키자고 결의를 했다. 필자에게 2000년 3월 25일 마을 생일을 기해 ‘인간답게 사는 방법과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요청해 왔다. 돈 버는 법에 대해서 문외한이지만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그들이 산업 사회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와 인간답게 살아가는 방법 등 한국 사람들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 이후 마을에서는 마을의 생일날마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한 것을 추구하는 방편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마을을 지키려는 신툰촌의 사람들

2011년 1월, 2012년 7월에 다시 새마을을 찾았다. 마을은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많은 주민들은 출국을 하거나 도시로 떠났다. 마을을 지키던 노인들도 자식들이 정착해 있는 도시로 떠났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한 호의 한족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한 때 83호 225명이 살던 마을은 38호만이 남았다. 그래서 두 집을 한 집으로 변형시켜 넓게 쓰거나 여의치 않으면 그대로 비어두고 있는 실정이다. 통계에는 외국으로 나간 인구가 38명, 국내 각지로 흩어진 인구가 백 명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리고 중국 정부는 마을 위쪽에 댐을 건설할 계획을 가지고 있지만 마을 주민들은 댐 건설로 인한 마을의 이주를 반대하고 있으며 현재 마을의 지부 서기는 “마을은 없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살아있는 한 마을을 지키겠습니다.”라며 긍정적인 협상의 분위기를 전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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