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大拉子敎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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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종교/기독교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성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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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성 용정 지역에 있는 성당.
삼원봉 본당 터와 대랍자 본당 터는 1.5㎞를 사이에 두고 있다. 아랫 마을에 삼원봉 본당이 있었고, 윗 마을에 대랍자 본당이 있었던 자리다.
간도의 사도라 불렸던 김영렬[세례명: 요한]의 첫 선교지 호천포는 회경촌은 이주 한인이 주를 이루고 있었던 마을이다. 간도 지역의 복음은 호천포(湖泉浦)에서 용정(龍井)으로 가는 길에서 비롯하였다. 간도로 떠난 조선 이주민들은 용정으로 가는 길을 사도 바오로의 1차 전도 여행 여정에 비견한다. 그 길은 간도 전역으로 뻗어나가 공동체를 이루고 복음화 기틀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길목[불동(佛洞)]에 1898년 간도 교회 첫 공소 ‘대교동(大敎洞) 공소’가 세워졌고, 1909년 첫 본당 삼원봉(三元峰) 본당과 용정(龍井下市) 본당이 동시에 설립되었다. 복음의 씨앗이 뿌려진 선교지 호천포와 본당 삼원봉 본당, 그리고 삼원봉에서 이전한 대랍자(大拉子) 본당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
함경북도 종성에서 두만강을 건너면, 용정시 개산둔(開山屯)이다. 1860~1870년 ‘대흉년’에 조선 농민들은 두만강 모래톱을 개간하고, 이를 간토(墾土)라고 불렀다. 다시 그 이름이 간도(間島)라는 지명으로 굳어졌다. ‘간도의 사도’ 김영렬[세례자 요한, ?~1931]이 첫 선교를 시작한 호천포는 김영렬과 같은 성씨인 김해 김씨 집성촌이었다. 당시 원산 본당 주임 브레(A. Bret) 신부도 1898년 4월 12일자 서한에서 "이곳을 관할하던 관청은 호천포 이웃 개산둔에 있었고, 개산둔은 길림 장군 휘하 혼춘 부도통(副都統)이 다스렸다"고 하는 기록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김영렬은 친지들을 중심으로 30여 명에게 교리를 가르쳤고, 이 중 12명이 1897년 원산 본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북관(北關)[북간도] 12종도’로, 이들은 간도 각지로 퍼져 나가 공동체를 만들고 간도 교회의 초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