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흥사

한자 雲興寺
분야 역사/근현대|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정의

1911년 3월 김본연, 최기남 등이 길림성 용정촌에 건립한 사찰.

건립 경위 및 변천

1911년 3월, 조선인 승려 김본연(金本然)이 용정촌에 와서 당시 부호였던 최기남(崔基南)의 협찬을 받고 유지들의 의연금을 함께 모아서 용정 시천교 교회당 남쪽에 운흥사(雲興寺) 건축 공사를 시작했다. 건축을 하던 도중에 승려 김본연이 훈춘 지방으로 옮겨가게 되자 최기남이 공사를 마무리 짓고 불상 3본을 앉힌 후 정식으로 포교를 하기 시작하였다.

운흥사에 향객이 흥성하던 때는 200여 호가 참배객으로 동참하였다고 한다. 1915년 범어사의 김구산이 참법 활동을 전개하여 운흥사에 주지로 모셔왔지만 경제적 여건이 따르지 못하여 이내 떠나게 되었다. 최기남마저 금강산 본당으로 떠나게 되어 운흥사는 승려조차 없는 텅 빈 절간이 되었다. 1944년 10월, 조선인 불교 신도가 4,578명에 달한 것으로 보면, 대비가 된다.

활동 사항

운흥사는 조선인의 반일 운동을 기초로 민족 교육의 발전을 포교의 수단으로 삼았다. 전통적인 포교 방법으로 진언(眞言) 외우는 것을 강조하고, 108배를 실천하도록 주문하였다. 1920년 일제는 용정촌의 항일 독립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이른바 경신년 토벌을 감행하여 무고한 조선족 군중들을 학살하였다. 특히 반일 운동의 앞장에 선 운흥사를 비롯하여 기독교·천주교·천도교가 주요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주요 문화재가 소실되고 신도들이 참살되어 세력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경신 참변’으로 연변 지방의 조선인 종교들은 1920년대로 들어서면서 점차 순수한 불교 의식에 전념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조선으로부터 살 길을 찾아 동북 지방으로 이주하는 농민들의 수도 급증하였고, 운흥사에는 108 참회 기도를 중심으로 법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

관련 문물

1920년 7월 승려 최승한이 과거에 사용하였던 구리 불상 하나를 발견하였다.

참고문헌
  • 고병철 외:『간도와 한인종교』, (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 2010)
  • 김춘선:『延邊地區朝鮮族社會的形成硏究』, (길림 인민출판사, 2001)
  • 최봉룡:『만주국의 종교정책과 재만 조선인 신종교의 대응』(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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