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國生寺 |
|---|---|
| 분야 | 역사/근현대|종교/불교 |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불교 사찰 |
|---|---|
| 창건자 | 김희정 |
| 건립 시기/일시 | 1931년 |
| 최초 건립지 | 연길시 |
1931년 김희정이 연길에서 건립한 불교 사찰.
항일 정신을 고취하는 토양으로 국생사는 처음에는 민족 해방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발원하고 기도하는 도량으로 자리 잡았다. 1931년 조선 혁명당 중앙 집행위원장 겸 총사령관을 맡았던 현익철은 국생사에서 중생 구제의 발원을 하면서 「동성 한교 정세 일반(東省韓僑情勢一般)」과 「한중 민족 합작 의견서(中韓民族合作意見書)」를 제출하고 한중 연합 투쟁을 제의하였다. 현익철은 조선 혁명당의 대표로서 9개 독립운동 단체 연합으로 한국 광복 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고, 잡지·전단·표어 등을 발행·배포하면서 국생사에서 다짐한 항일 투쟁과 하화 중생의 발원을 실천에 옮기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후 이후 일본의 불교가 국생사를 주도하면서 조선인을 감시하고 일본에 예속 시키는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국생사에 주석하던 일본인 상야여인(上野興仁)의 활동이 주목된다. 상야여인은 조선과 만주 지역의 포교를 책임지고 있던 정토진종 대곡파의 승려로서 국생사의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총독부 관보에 의하면, 적어도 1934년에서 1936년까지 한국과 만주를 중심으로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는 조선인을 감시하는 역할에 앞장섰으며, 불교 정신으로 항일 감정을 순화시키고 내선일체(內鮮一體)을 가능하게 풍토를 조성하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상야여인의 의도는 간도의 용정 기록과 당시 불교계의 상황 기록, 『조선 불교』라는 잡지에 반영되어 있다. 의술을 활용하면서 포교하거나 조선인 신도의 기부를 받아 내선일체 관련 영화를 상영한 기록에서 당시의 역설적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