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朱蒙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 지역 | 길림성/요녕성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출생 시기/일시 | 기원전 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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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년 시기/일시 | 기원전 19년 |
| 성격 | 왕 |
| 성별 | 남 |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고대국가인 고구려의 건국 시조이자 왕.
주몽은 부여에서 압록강 중류 유역으로 내려와 기원전 37년에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했으며 고(高)로 성(姓)을 삼았다. 압록강 중류의 비류국을 병합하고, 행인국과 북옥저를 점령하는 등 국력을 키웠다. 재위 19년 9월 40세 되던 해에 서거하여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했다.
주몽(朱蒙)은 부여말로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뜻이다. 역사서에 추모(鄒牟)·상해(象解)·추몽(鄒蒙)·중모(中牟)·중모(仲牟)·도모(都牟)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음차하여 한자로 옮기면서 다른 글자로 적혀지게 되었을 뿐 동일한 이름이다. 이름 자체에서 알 수 있듯이 군사적 능력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어머니 유화부인(柳花夫人)과 함께 부여 궁궐에서 살았다. 부여의 금와왕(金蛙王)에게는 장자 대소(帶素)를 비롯하여 일곱 왕자가 있어 함께 어울려 놀았는데 모든 면에서 주몽이 가장 뛰어났다. 이에 왕위를 빼앗길까 두려워한 대소가 금와왕에게 주몽을 참소했고, 금와왕은 주몽에게 말 기르는 일을 맡겼다. 주몽은 수모를 참으며 준마를 골라 기르는 등 미래를 준비했다.
그 뒤 대소 등이 후환을 없애려 그를 죽이려 하자 오이(烏伊)·마리(摩離)·협부(陜父)와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압록강 중류유역[지금의 중국(中國)요령성(遼寧省) 환인(桓仁)]에 이르러 고구려를 세웠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주몽이 부여에서 내려와 졸본부여의 둘째 사위가 된 후 그 왕위를 계승했다고 나온다.
주몽은 즉위 후 얼마 뒤 비류수 상류에 있던 비류국의 송양왕(松讓王)을 만나 기량을 겨룬 후 그를 굴복시켰다. 그 다음해인 재위 2년에 송양왕이 나라를 들고 귀부해오자 그 땅을 다물도(多勿都)라 하고 그를 다물주로 삼았다.
재위 6년 11월에는 오이(烏伊)와 부분노(扶芬奴)를 시켜 태백산 동남쪽에 있는 행인국(荇人國)을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城邑)으로 삼았다. 재위 10년 11월에는 부위염(扶尉猒)을 시켜 북옥저(北沃沮)를 쳐 멸망시키고 성읍으로 만들었다. 재위 14년 8월에 유화부인이 죽자 금와왕이 후히 장례를 치러주었으므로 사신을 보내어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
재위 19년 4월 부인 예씨(禮氏)와 왕자 유리(類利)가 도망해 오니 태자로 삼았다. 그 해 9월 40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용산(龍山)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 하였다. 광개토왕비에는 주몽의 서거 장면을 “하늘이 황룡을 내려 보내 왕을 맞이함에 왕이 홀본동강에서 용의 머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갔다.(天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履龍首昇天)”고 묘사해 놓았다.
『삼국사기』에는 동명성왕 서거 후 용산(龍山)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또 대무신왕(大武神王) 3년 3월에 동명왕묘(東明王廟)를 세웠다는 기사가 나온다. 졸본에 시조묘가 있어 후대의 고구려왕들도 즉위 후 시조묘참배를 갔다는 기사도 나온다. 이 당시의 왕도였던 중국 요령성 환인 지역에 왕릉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현재 북한의 평양시 역포구역에는 동명왕릉으로 전해지는 왕릉급 무덤이 있는데, 평양 천도 후 옮겨진 능이라고 보기도 한다. 반면 부여 계통의 유물이 나온 환인(桓仁)의 망강루고분군(望江褸古墳群)에 주몽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보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