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寶藏王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 유형 | 인물/왕족·호족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왕 |
|---|---|
| 성별 | 남 |
| 활동 시기/일시 | 642년 |
| 활동 시기/일시 | 643년 |
| 활동 시기/일시 | 644년 |
| 활동 시기/일시 | 668년 |
| 활동 시기/일시 | 677년 |
| 활동 시기/일시 | 681년 |
| 몰년 시기/일시 | 682년 |
고구려의 제28대 마지막 왕.
이름은 장(藏) 또는 보장(寶藏), 영류왕의 동생인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642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인 후 보장을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므로 보장왕은 실권을 장악한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정치를 펴는 데 한계가 있었다. 643년(보장왕 2)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의 도사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썼다. 이 때문에 불교 세력의 반발이 심하였고 승려 보덕(普德)은 650년 백제로 망명하였다.
초기에는 고구려와 당나라 모두 일종의 휴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백제와 왜국과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신라와는 죽령 이북의 영토을 놓고 적대 관계에 있었다. 신라는 고립에서 벗어나고 국제 질서에 대응하고자 더욱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으려 했고, 이는 당나라의 이해 관계 및 전략과도 맞아떨어졌다.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고구려는 644년부터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645년부터 실제 전투가 벌어져 668년 고구려의 평양성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보장왕은 포로가 되어 신하들과 함께 당나라로 잡혀갔다. 하지만 정치적인 목적으로 적국의 왕을 살려주는 당나라의 방침에 의해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司平大常伯員外同正))’ 이라는 직위에 임명되었다. 20여 만명에 달하는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의 내지로 끌려갔으나 많은 이들은 본토를 비롯하여 요서 지방에도 잔류하고 있었다. 불안감을 느낀 당나라 정부는 고구려 유민들의 움직임을 관리하고 일원화시킬 목적으로 보장왕을 677년에 요동 도독 조선군왕에 임명하였다. 다수의 고구려인을 대동해서 요서 지방에 닿은 보장왕은 오히려 말갈과 내통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에 사천성 공주(邛州)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곧 682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