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특별한 이야기

국경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한자 國境을 뛰어넘는 사랑이야기. 樂浪 公主와 好童 王子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왕자 호동의 출신

『삼국사기(三國史記)』 고구려 본기에 전하는 호동 왕자의 출신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아버지는 고구려의 3대 대무신왕이고, 어머니는 갈사국왕[갈사왕(曷思王)]의 손녀(孫女)로서 대무신왕의 둘째 왕비라고 전한다.

대무신왕은 서기 4년에 출생하여 14년에 태자로 책봉되었고, 18년 10월에 부왕 유리왕이 죽자 14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대무신왕은 즉위 후 부여왕 대소(帶素)의 침공 위협을 받다가 21년 12월에 부여 정벌에 나섰고, 이듬해인 22년 2월에 대소왕을 죽이고 회군하였다.

대소왕의 사망으로 동부여금와왕(金蛙王)의 막내 아들이자 대소왕의 막내 동생이 4월에 부여를 떠나 갈사수(曷思水)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 1백여 명을 이끌고 압록곡에 이르렀는데 이때 사냥을 나온 해두국왕(海頭國王)을 죽이고 그 백성을 거느리고 갈사수에 와서 도읍하였던 것이다. 이가 갈사국왕이며, 그 손녀가 대무신왕과 혼인하여 그의 둘째 왕비가 되었다. 따라서 대무신왕이 갈사국왕의 손녀와 결혼한 시기는 22년 이후여야 한다.

그런데 뒤에서 살펴보는 바와 같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는 갈사국왕 손녀의 소생인 왕자 호동(好童)이 32년에 낙랑국왕(樂浪國王) 최리(崔理)의 딸과 결혼하는 것으로 전하고 있다. 즉 대무신왕과 갈사국왕 손녀가 22년에 결혼하여 바로 호동을 낳았다고 하더라도, 32년에는 호동의 나이 아직 10세가 되기 이전이라 낙랑국왕 딸과의 결혼을 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고구려 본기의 내용에 연대기 상의 문제가 적지 않고, 또한 설화적 요소가 풍부한 기사인 경우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물론 다른 가정을 생각할 수 있다. 즉 동부여가 멸망하기 이전 즉 갈사국왕이 부여를 떠나기 이전에 대무신왕이 부여와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금와왕 막내 아들의 손녀와 혼인 관계를 맺었고, 후일 그가 갈사국을 세움으로써 기록에 갈사왕의 손녀로 기록되었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정도 대무신왕의 즉위가 14세이기 때문에 쉽게 상정하기 곤란하다. 따라서 호동의 혈연적 가계는 인정해도 고구려 본기의 기록 그대로 그 출생 등 기년을 따르기는 어렵다.

호동 왕자와 낙랑 공주의 정략 혼인

32년(대무신왕 15년) 4월에 호동이 옥저(沃沮) 지역을 유람하다가 낙랑국의 왕 최리가 그를 보고서 묻기를 “북국신왕(北國神王)의 아들이 아니겠느냐?”하며 그를 데리고 가서 딸을 아내로 삼게 하였다. 그런데 이 낙랑에는 신이한 북과 뿔피리가 있어서 적의 군사가 침입하면 저절로 울었으므로 낙랑이 적의 군사를 격파할 수 있었다. 그후 호동고구려로 돌아가서 아내인 낙랑 공주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만약 너의 나라의 무기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뿔피리를 부수면 내가 예를 갖춰 맞이할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거절할 것이다”라고 전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낙랑 공주는 몰래 창고에 들어가 북을 찢고 뿔피리의 주둥이를 부수고 호동에게 알렸다. 소식을 들은 호동은 대무신왕으로 하여금 낙랑을 치게 하였다. 낙랑국왕 최리는 북과 뿔피리가 울리지 않았으므로 대비하지 않다가, 고구려 군사가 성 밑에 다다른 뒤에야 북과 뿔피리가 모두 부서진 것을 깨닫게 되었다. 최리는 자신의 딸의 소행인 줄 알고 마침내 딸을 죽이고는 나와서 항복하였다. 이와 다른 전승에는 낙랑을 멸하기 위해 대무신왕이 낙랑왕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인 뒤에 본국으로 보내어 무기를 부수게 하였다는 전승도 전하고 있다.

어쨌든 위와 같이 짧은 두 전승에는 고구려의 왕자 호동과 낙랑국의 공주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양자의 사랑을 비극으로 마무리하게 된 배경은 고구려가 낙랑국을 정복하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즉 호동은 낙랑 공주와의 결혼을 낙랑국이 갖고 있던 비장의 무기를 파괴하려는 정략적 목적으로 이용하였다.

그러나 낙랑 공주는 진정으로 호동 왕자를 사랑했던 듯하다.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조국과 남편의 나라 사이에서 고뇌하였을 낙랑 공주는 최종적으로 남편을 선택했고, 그래서 자명고를 칼로 찢었다. 아버지에게는 배신이었겠지만, 남편을 위해 내린 결정이니 이를 부도덕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낙랑 공주는 배신감에 분노한 아버지의 칼에 살해당했다.

그러면 호동 왕자는 어떠하였을까? 단지 아버지 대무신왕과 모국 고구려를 위해 정략 결혼을 한 것일까? 아니면 낙랑 공주를 진실로 사랑했지만, 나라의 이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내 낙랑 공주를 위험에 처하게 한 것일까? 호동 왕자가 얼마나 낙랑 공주의 죽음을 슬퍼했는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고구려 본기 기록은 낙랑 공주의 죽음과 더불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입을 닫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더욱 비극적이다.

낙랑국은 어디일까?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대무신왕대에는 고구려 전승 자료로 추정되는 낙랑(樂浪) 관련 기사가 다음 세 기사가 전해지고 있다. 첫째 기사는 앞서 살펴본 32년에 호동이 낙랑국을 공격하여 낙랑국최리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사이다. 둘째 기사는 37년에 고구려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사이다. 셋째 기사는 44년 9월에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바다를 건너 군사를 보내 낙랑을 정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군현(郡縣)으로 삼았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모두 한(漢)에 속하였다는 기사이다.

세 기사는 언뜻 내용상 서로 연결된 듯한 인상을 준다. 즉 첫째 기사에 의하면 32년에 호동의 혼인과 계책에 의해 고구려는 낙랑을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 그리고 둘째 기사에서는 다시 5년 뒤에 고구려가 낙랑을 멸망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이어서 셋째 기사에서는 후한이 44년에 군대를 보내어 다시 낙랑군을 재설치하였다는 내용이다. 위 세 기사는 내용상으로는 계기적으로 일어난 일련의 사건처럼 이해되기 때문에 별다른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다.

그런데 위 기사 중에서 둘째 기사는 그 출전이 신라측 전승으로 이해된다. 즉 『삼국사기』 「신라본기」 유리 이사금 14년(37년)조에는 “고구려와 무휼(無恤)[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망시키자, 그 나라 사람 5천명이 내항하므로 6부에 나누어 거주하게 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고구려 본기의 위 둘째 기사와 서로 통한다. 따라서 고구려 본기의 둘째 기사는 고구려 자체의 전승 기사가 아니라 신라측 전승 기사에 근거하여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편찬시에 추가된 기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음 셋째 기사는 25년에 시작된 낙랑군 내 토착 세력의 반란에 대해 후한이 군사적 조치를 취했음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된다. 낙랑군이 여전히 중국의 군현으로 유지되고 있는 정황을 고려하면, 첫째 기사에서 호동 왕자가 혼인을 한 낙랑국을 낙랑군과 동일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최리의 낙랑국은 평양 일대의 낙랑군과는 다른 국가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디일까? 호동이 '옥저(沃沮) 일대를 유람하다가' 최리와 만났음을 고려하면, 낙랑군의 동부도위(東部都尉)와 관련된 옥저 등 영동 7현(嶺東七縣) 세력으로 추정함이 타당하다. 그리고 「신라본기」의 초기 기사에 보이는 낙랑(樂浪)의 실체 역시 옥저 등 낙랑군의 영동 7현과 관련시켜 보면 무리가 없다. 그런 점에서 고구려 본기의 첫째 기사의 낙랑과 둘째 기사의 낙랑은 동일한 존재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이 두 기사는 고구려의 옥저 지역(낙랑, 영동 7현) 진출을 반영하는 기사라는 점에서 서로 통한다.

본래 동예·옥저 지역은 임둔군(臨屯郡)이 폐지된 이후에 낙랑군의 동부도위에 의해 관할되었다. 그러다가 기원 30년에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영동 7현은 낙랑군에 예속되었는데, 이때 각 읍락의 거수(渠帥)를 현후(縣侯)로 삼고,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현(縣)을 후국(侯國)으로 삼았다. 기원 25년 이후 낙랑군에서 독자 세력화를 추구하는 왕조(王調)의 반란이 일어났는데, 이를 계기로 동부도위의 세력 역시 독자화하면서 ‘낙랑국’으로 주변에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 첫째 기사에 나타나는 최리의 낙랑국은 ‘최(崔)’라는 중국계 성씨 및 ‘자명고각(自鳴鼓角)’이라는 기물의 존재에서 드러나듯, 당시 고구려와는 달리 한(漢) 문물의 세례를 일정 정도 받은 지역임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주변 지역에서 상대적으로 한(漢)의 문물과 접촉도가 높은 지역으로는 역시 낙랑군에 예속된 옥저 지역을 우선 꼽을 수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위 설화상의 낙랑국으로 봄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들 옥저 일대의 독자적 세력화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보면 중국 군현 세력의 배후 지원이 없어짐으로써 곧 군사적 공격이 용이해지는 상황이 된 셈이다. 설화적으로 표현되었지만 호동 설화에서 보이는 낙랑국(樂浪國)의 ‘자명고각(自鳴鼓角)’이라는 기물은 곧 중국 군현과 연관된 우수한 무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런 고각(鼓角)의 파괴는 곧 낙랑군과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이미 고구려는 배후 기지가 될 수 있는 옥저 지역으로의 진출에 주력하고 있었다. 30년(대무신왕 13년) 7월에는 매구곡인(買溝谷人) 상수(尙須)가 그의 형제와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로 와서 투항하였는데 그 위치는 동옥저 일대로 추정된다. 따라서 호동에 의한 낙랑국의 공격과 정복 기사는 마침내 고구려가 낙랑군의 통제력을 깨뜨리고 옥저 지역을 장악하였음을 보여주는 기사로 해석할 수 있다.

호동 왕자의 죽음

설화에서는 낙랑 공주만 죽고 호동 왕자는 살아 있었기 때문에 그 뒷이야기가 궁금해질 수 있다. 실제 『삼국사기』에는 혼자 남은 호동 왕자의 죽음, 즉 또 다른 비극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낙랑 공주가 죽고 낙랑국을 정복한 그 해 11월, 첫째 왕비는 호동을 시기하여 대무신왕에게 자신을 희롱할지 모른다고 거짓으로 참소하였다. 사실 호동은 얼굴 모습이 아름다워 일찍이 대무신왕이 호동(好童)이라 이름 짓고 사랑하였다. 더욱이 낙랑국을 정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니, 대무신왕이 호동을 더욱 사랑하여 태자의 지위를 차지하게 될지도 모를까 원비는 걱정하였다. 거듭되는 원비의 호소에 대무신왕이 의심을 하게 되었고, 결국 호동은 자결함으로써 자신의 억울함을 면할 수밖에 없었다.

호동과 원비의 충돌은 당시의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호동의 배후 정치 세력으로는 동부여 세력을 들 수 있다. 호동의 어머니가 동부여금와왕의 막내 아들인 갈사국왕의 손녀임을 이미 살펴보았다. 그리고 당시 고구려 내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죽은 후에 그의 사촌 동생이 1만여 주민을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봉하고 연나부(椽那部)에 거주케 하고 낙(絡)씨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사실 부여왕 종제가 거느린 1만여 인의 주민 집단은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따라서 이들 동부여 세력은 연나부를 구성하는 주요 세력이 되었으며, 고구려의 중앙 정계에서의 영향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 부여계 세력이 바로 호동을 지원하는 정치 세력이었다.

호동과 그의 어머니인 갈사왕의 손녀와 대립되는 정치 세력은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와 태자 해우(解憂)이다. 이들의 출신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지만, 일단 첫째 왕비의 지위를 차지한 것으로 보아 당시 유력한 기반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여왕의 종제가 고구려에 투항한 후 연나부에 안치된 것으로 보아, 호동의 배후 세력 역시 연나부일 것이다.

그렇다면 첫째 왕비의 지지 세력은 당시 가장 강력한 나부의 하나인 비류나부(沸流那部)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 실제 호동 왕자가 낙랑국을 멸망시키기 직전인 32년 3월에 비류부장의 3인의 횡포를 대무신왕이 견제한 사실이 있다. 어쩌면 이들 비류부장이 왕비와 연결되는 세력일 가능성이 있다. 『삼국지(三國志)』 고구려전에는 여러 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는 왕비족의 존재를 보여주고 있는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연나부가 바로 그 왕비족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치 세력의 모습은 바로 대무신왕대의 호동 왕자의 활동에서 엿볼 수 있다.

낙랑 공주와 호동 왕자,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버지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결국 두 사람의 거듭된 죽음으로 이 사랑 이야기는 더욱 큰 비극이 되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
  • 신채호,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단재신채호전집(丹齋申采浩全集) 상(上)』, 1979)
  • 김창룡, 『고구려문학을 찾아서』(박이정, 2002)
  • 한국 역대 인물 종합 정보 시스템(http://people.aks.ac.kr/index.aks)
  • 한국 역사 정보 통합 시스템(http://www.koreanhistory.or.kr/)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