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발성

한자 輝發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휘남현(輝南縣)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성곽
양식 산성|토석 혼축
크기 내성 둘레 706m, 중성 둘레 1,313m, 외성 둘레 2,647m
현 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휘남현
원소재지 길림성 통화시 휘남현
정의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통화현(通化縣) 휘남현(輝南縣)에 있는 고구려 시대에 축조되어 명(明)·청대(淸代)까지 사용된 산성.

위치

휘발성휘남현에서 동북으로 17.5m 떨어진 황니하(黃泥河)와 휘발하(輝發河)가 합류하는 곳의 휘발산 꼭대기와 산 아래의 대지에 있다. 황니하는 산성의 남벽 밖을 지나 휘발하로 유입되고, 휘발하는 산성의 서벽, 북벽을 돌아 동북쪽으로 흘러간다. 산성의 세 면은 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은 넓은 하곡 평원을 향하고 있다.

형태

휘발성은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진 복곽식 성곽이다. 내성과 중성은 성의 남부 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 중 내성은 휘발산의 산정(山頂)에 자리잡고 있다. 중성은 휘발산 동측의 완만한 산기슭에 축조되었고 외성은 산 아래 평야에 조성되었다.

내성은 불규칙한 마름모꼴이고, 동남부는 자연적인 절벽을 성벽으로 이용하였으며 서북부는 산세에 따라 강자갈과 판축한 층을 나누어 성벽을 수축하였는데 둘레 길이는 706m이다.

내성 동남쪽에 인공으로 수축한 평대가 있고, 그 평대 위에 망대와 건축지가 있다. 평대는 둘레 길이 336.5m인데 휘발성의 가장 높은 부분인 휘발산 동남측 비교적 높은 산봉우리 상에 위치해 있다. 평대는 내성보다 4.80m 높다. 평대가 있는 곳은 일찍이 경작지로 이용되었다. 원래 지표상에 토기조각과 자기조각 등 유물이 흩어져 있었는데 지금은 많이 보이지 않는다. 현지 주민에 의하면 예전에는 벽돌과 기와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평대의 상황과 발견된 유물로 보아 건물유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중성의 성벽은 서북, 동남의 양 끝에만 산의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고, 그 위 대부분 지역은 평지 위에 축조하였는데 토석을 혼합하여 다져 쌓았고 둘레는 1,313m이다.

외성도 역시 대부분 평지에 축조되었고, 황토와 모래가 섞인 자갈로 다져 쌓았으며, 둘레는 2,647m이다. 휘발성이란 이름은 명대(明代) 호륜(扈倫) 4부(部)의 하나인 휘발부(輝發部)의 왕성(王城)이 이곳에 설치되었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의의와 평가

휘발성은 북류 송화강 지류인 휘발하 동안(東岸)에 있다. 이 지역은 압록강 중류 유역에서 전기 부여의 중심지인 길림(吉林) 지역으로 가는 교통로 상의 요충지이자 길림에서 휘발하-혼하(渾河)를 거쳐 요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곳이다. 발해 시기에는 발해 중심부와 당(唐)의 영주(營州)를 잇는 영주도가 이곳을 지나갔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와 고구려 유물의 출토로 인해 많은 연구자들이 고구려 성곽으로 분류하였다. 내성·중성·외성의 3중 복곽식 성곽은 시기적 선후가 있는데, 산 정상부의 내성에서만 고구려 시대의 기와와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에 내성만 고구려 시기 성곽이라며 ‘휘발성산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휘발성은 고구려 이후 요(遼), 금(金)을 거쳐 명·청대까지 계속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013년에 성벽을 절개, 조사하였는데 내성·외성의 성벽은 모두 한번 축조한 것이고, 중성 성벽만 두 차례 증축을 거쳤다는 것을 확인했다. 내성·중성·외성의 축조 순서를 명확히 밝히지는 못했지만, 이때 출토된 200여 점의 유물을 통해 성벽이 명대 중기 이후 축조되었음을 확인했다. 그러므로 현전하는 휘발성의 성벽은 명대에 조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고구려 연구회,『고구려 산성 연구』(학연 문화사, 1999)
  • 동북아 역사 재단 편,『고구려성』(동북아 역사 재단, 2010)
  • 양시은,『高句麗城 硏究』(진인진, 2016)
  • 여호규·강현숙·백종오·김종은·이경미·정동민, 『중국 소재 고구려 유적·유물Ⅹ 송화강-목단강-두만강 유역』( 동북아역사재단,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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