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루 묘지

한자 牟頭婁 墓誌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하양어두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상세정보
성격 고분
재질 봉토분
출토|발굴 시기/일시 1935년
현 소장처 집안시 하해방촌(下解放村)
원소재지 집안시 하해방촌(下解放村)
정의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하해방촌(下解放村) 하해방 묘역(墓域) 남쪽 평원에 있는 고구려 시대 고분에 적혀 있는 묘지(墓誌).

개설

모두루묘(牟頭婁墓)는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 국내성이 있는 집안시의 동쪽인 하해방촌(下解放村)의 산기슭과 압록강 사이의 들판 가운데에 있다. 서쪽으로 하해방촌과 500m, 북쪽으로 집안(集安)-청석(靑石) 간 도로와 약 100m 떨어진 곳에 있다. 둘레 70m, 높이 4m 규모에 전실(前室)과 현실(玄室)로 이루어진 봉토석실분이다. 서쪽으로 10m도 되지 않는 곳에 똑같은 봉토석실분이 한 기 더 있다.

형태

모두루 묘지는 무덤의 전실 정면 상단에 검은 묵서로 적혀 있다. 첫째 줄과 둘째 줄에 걸쳐 “대사자모두루□□노객문□(大使者牟頭婁□□奴客文□)”란 글자가 적혀 있다. 여기서 □은 현재 읽을 수 없는 글자 부분을 표시한 것이다. 이 부분은 괘선(罫線)없이 유려한 예서체로 적혀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묘지의 제목, 즉 제기(題記)라 보고 있다.

묘지의 셋째 줄부터는 줄과 줄 사이에 송곳으로 홈을 판 다음 먹줄을 튀겨 선을 그려 넣은 괘선을 79개 치고 줄 마다 따로 열 개의 칸을 그린 다음, 칸마다 붓으로 한자씩 유려한 예서체로 모두 800여 자를 정서해 넣었다. 이 중 판독할 수 있는 글자는 약 350여 자 정도이다.

이 무덤을 모두루묘라 부르게 된 것은 1935년에 집안 지역을 조사한 일본 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지은 『통구(通溝)』상권에 모두루묘지명이 실리면서부터이다. 제기에 ‘대사자모두루’란 관등과 이름이 적혀 있고, 셋째 줄부터 문장이 시작되므로 이 무덤의 주인공을 모두루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중국학자 노간(勞幹)은 묘지명을 검토한 후 모두루는 관이 대사자이지만 노객(奴客)을 자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묘주(墓主)라 볼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묘지명에 대형(大兄) 염모(冉牟)의 죽음을 말하고 있고, 그를 기리는 내용이 나오므로, 이 무덤의 주인공은 염모(冉牟)이고 모두루는 그를 모시던 부하라고 보았다.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노간의 견해에 따라 이 무덤을 ‘염모묘(冉牟墓)’라 부르고 있다. 그래서 현재 중국 집안시에 있는 이 무덤으로 가는 길에 세워져 있는 표지판과 무덤 앞의 안내문에 모두 ‘염모묘’라고 적혀 있다.

한국 학계에서는 모두루 묘지의 전체 내용을 분석하여 모두루가 무덤의 주인공이고, 묘지에 집안의 이력과 모두루 자신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모두루 묘지는 내용상 크게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부분은 제1행과 2행으로 모두루 묘지의 제기이며, 두 번째 부분은 제3~10행으로 모두루 선조의 사적이 적혀 있다. 묘지에 의하면 모두루의 선조는 물의 신인 하백(河泊)의 손자이고 해와 달의 아들인 추모성왕(鄒牟聖王)[동명성왕]의 노객(奴客)으로서 추모성왕(鄒牟聖王)을 따라 북부여로부터 고구려 땅으로 내려왔고, 그 때문에 이 가문이 대대로 관은(官恩)을 입었다고 한다. 세 번째 부분은 제10행에서 제40행까지로 모두루의 조상인 대형(大兄) 염모(冉牟)의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염모는 모용선비(慕容鮮卑)가 북부여를 공격해 왔을 때 그것을 물리치는 공을 크게 세웠다.

네 번째 부분은 제40~44행으로 대형 염모가 수(壽)를 다하고 돌아가신 뒤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 덕으로 관은을 입어 성민(城民)과 곡민(谷民)을 다스렸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마지막 다섯째 부분에는 묘주(墓主)인 모두루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이 많지만 여기에는 모두루가 북부여수사(北夫餘守事)로 파견되어 근무를 하고 있는 도중에 광개토왕이 서거했는데, 그가 먼 곳에 있어 가보지 못한 것을 슬퍼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와 같은 전체 묘지명의 내용 구성을 볼 때, 비록 모두루 묘지가 일반적인 다른 묘지와 성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모두루의 가문 내력과 그의 행적에 대해 서술한 묘지명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의의와 평가

모두루 묘지는 5세기 고구려의 여러 면을 보여주는 당대 사료로서 대단히 높은 가치를 갖고 있다. 광개토왕비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신화의 ‘추모성왕’, ‘하백지손(河泊之孫)’, ‘일월지자(日月之子)’란 표현이 똑같이 적혀 있다. 또 모두루가 모셨던 광개토왕(廣開土王)을 국강상대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大開土地好太聖王), 대형 염모가 모셨던 고국원왕(故國原王)을 ‘(국)강상성태왕((國)岡上聖太王)’이라 적어놓았다. 이는 고국원왕대부터 이미 태왕이라는 극존칭의 왕호를 사용하고 있었으며, 고구려는 천손족이 세운 나라라는 건국신화가 5세기 당시 고구려인들에게 전반적으로 알려져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중급 귀족인 모두루도 선조 대부터 신성한 시조의 노객으로서 대대로 관리가 되었음을 자랑스럽게 묘지 첫머리에 기재할 만큼 고구려 왕의 초월적인 권위에 기대고 싶어하고, 노객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국왕에게 철저히 예속되고자 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광개토왕 대에 북부여 지역을 광역으로 묶어 최고위 지방관인 수사를 파견해 직접 통치했다는 것과 모두루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대부터 지역민들을 성민과 곡민으로 구분하여 파악했다는 것도 이 묘지명을 통해 알 수 있다.

요컨대 모두루 묘지는 5세기 당시 고구려의 국왕과 귀족의 관계, 고구려 건국신화의 정립과 확산, 태왕이자 신성족으로 숭앙되던 고구려 왕과 왕족의 위상, 지방관의 명칭과 지방통치제도의 발전 수준, 지방민의 편제방식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佐伯有淸,「牟頭婁塚とその墓誌」(『七支刀と廣開土王碑』, 吉川弘文館, 1977)
  • 武田幸男,「牟頭婁一族と高句麗王權」(『朝鮮學報』, 99·100合, 1981)
  • 田中俊明,「高句麗の金石文」(『朝鮮史硏究會論文集』18, 1981)
  • 허흥식 편, 『한국(韓國) 금석전문(金石全文)』(아세아문화사, 1984)
  • 李殿福 著 車勇杰·金仁經 譯, 『中國內의 高句麗 遺蹟』(학연문화사, 1994)
  • 박진석, 『중국경내(中國境內) 고구려유적(高句麗遺蹟) 연구(硏究)』(예하, 1995)
  • 김현숙, 『고구려 영역지배방식 연구』(모시는 사람들, 2005)
  • 정호섭,「고구려 벽화고분의 현황과 피장자(被葬者)에 대한 재검토」(『민족문화연구』4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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