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의

한자 皁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정의

고구려의 관등명.

개설

조의는 고구려 초기의 10관등 중 제9 관등이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80년 7월에 관나(貫那)의 우태(優台) 미유(彌儒), 환나(桓那)의 우태 어지류(菸支留), 비류나(沸流那) 조의(皂衣) 양신(陽神) 등이 왕의 동생 수성(遂成)에게 형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것을 종용하는 기사가 나온다. 같은 책에는 차대왕(次大王) 20년 겨울 10월에 연나(椽那)의 조의 명림답부(明臨荅夫)가 백성이 견뎌내지 못한다며 왕을 시해했다는 기사가 나온다. 명림답부는 이 공으로 신대왕(新大王) 2년 정월에 최고위 관직인 국상(國相)에 올랐고 관등도 조의에서 패자(沛者)로 승급했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조에는 “그 나라에는 왕(王)이 있고,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雛加),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사자(使者), 조의(皁衣), 선인(先人)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3세기 중엽 당시 고구려에는 10개의 관등이 있었고 조의는 제9관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사서에는 또 “모든 대가(大加)들은 스스로 사자, 조의, 선인을 둘 수 있었는데, 그 명단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여야 한다. [대가의 사자·조의·선인은] 마치 중국의 경(卿)이나 대부(大夫)의 가신(家臣)과 같은 것으로, 회합(會合)할 때의 좌석 차례에선 왕가(王家)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열에 앉지 못한다”라고 나온다.

이와 같은 사료에 근거하여 조의에 대해서는 사령(使令)으로서 그 종속성을 강조하거나, 무사적 성격의 관이라 이해하는 경향이 강했다. 또 본래는 패자, 우태와 마찬가지로 나부(那部) 내의 하부 구성체인 개별 나(那) 세력의 수장, 그 중에서도 소규모의 세력에게 주어진 관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3세기까지는 중앙과 나부의 하부 관원으로 등장하는 조의가 원래는 세력 규모의 편차가 존재하였지만 본질적으로 나부 수장층을 편제하기 위한 관등으로 활용되었다고 본 것이다.

변천

조의는 3세기 말 이후 기사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아 패자, 우태 등과 함께 소멸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후기 분화된 형계(兄系) 관등 중 하나인 조의두대형(皁衣頭大兄)에 ‘조의’가 들어간다. 이로 보아 중앙집권체제 정립 후 곧바로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유지되다 이후 관제 개편을 겪으며 형계 관등 내로 흡수되어 그 명칭만 남은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후한서(後漢書)』
  • 『삼국지(三國志)』
  • 김철준,「고구려·신라의 관계조직의 성장과정」(『이병도박사화갑기념논총(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 『한국고대사회연구』, 지식산업사, 1975)
  • 武田幸男, 「高句麗官位制とその展開」(『朝鮮學報』86, 1978)
  • 이종욱, 「고구려 초기의 중앙정부 조직」(『동방학지』33, 1982)
  • 임기환, 「고구려 초기 관계조직의 성립과 운영」(『경희사학』19, 1995)
  • 여호규, 『고구려 초기 정치사 연구』(신서원, 2014)
  • 조영광, 『고구려 초기 사회 연구』(전남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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