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상

한자 國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관직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정의

고구려 전기의 최고 관직.

제정 경위 및 목적

국상은 신대왕 때 설치되었고 9대 고국천왕 때에 이르러 정착되었다. 나라의 중대사를 살펴보던 좌보(左輔)·우보(右輔)를 개편해 보완 설치한 것이었다.

담당 직무

국상은 제가 회의(諸加會議)의 의장으로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고구려 초기에는 주요한 국사를 논의하고 결의하던 중심체가 제가 회의였다. 국상은 제가 회의를 열어서 임금의 옹립과 폐위를 비롯한 대외적인 군사 문제, 국가 전체에 관계되는 범죄 처리 문제, 국사를 맡을 인물의 선정 등 중요한 국사를 평의(評議)하고 의결(議決)하는 권한을 가졌다. 국상이 설치되면서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동시에 왕권도 견제를 받았다. 즉 국상은 왕권과 귀족들 사이에서 균형자 역할을 담당하면서 관료 제도의 정착을 이끌어냈다.

관련 기록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6, 신대왕 2년 춘정월조에는 “명림답부(明臨答夫)를 국상으로 삼고 패자의 벼슬을 더하고 내외병마(內外兵馬)를 담당하고 아울러 양맥부락을 거느리게 하였다. 좌·우보를 바꾸어 국상(國相)으로 삼은 것은 이에서 비롯되었다.[拜荅夫爲國相 加爵爲沛者 令知內外兵馬 兼領梁貊部落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라고 하였다.

변천

국상의 임명 절차는 제가 회의에서 추천해 왕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왕권과 제가 세력 사이의 이해 관계에 부합되는 인물이 선출되었으며, 국상은 왕권과 제가 세력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미천왕 대에 이르러 왕권이 강화되면서 제가들의 권한은 축소되고 중앙 귀족으로 전환되어 갔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국상은 지위도 약해지고, 성격도 변화되었으며, 결국은 사라졌다. 최초의 국상은 신대왕 때 명재상으로 유명한 명림답부였으며, 고국천왕 때에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을파소(乙巴素)도 있었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노중국, 「고구려 국상고(上)-초기의 정치 체제와 관련하여-」(『한국학보』 제16집, 일지사, 1979)
  • 이종욱, 「고구려 초기의 좌·우보와 국상」(『전해종 박사 화갑 기념 사학 논총』, 일조각, 1979)
  • 김광수, 「고구려의 '국상'직」(『이원순 교수 정년 기념 역사학 논총』, 서울대 사대 역사과, 1991)
  • 금경숙, 「고구려 초기의 중앙 정치 구조; 제가 회의와 국상제를 중심으로」(『한국사 연구』 86, 한국사 연구회, 1994)
  • 여호규, 「고구려 초기의 제가 회의와 국상」(『한국 고대사 연구』13, 한국 고대사학회, 1998)
  • 금경숙, 「고구려의 제가 회의와 국상제 운영」(『강원 사학』 15·16, 강원 대학교 사학회,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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