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薩水大捷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612년(영양왕 23년)에 고구려군이 평양성 북쪽 부근까지 침략했다가 후퇴하던 수(隋)의 군대를 살수(薩水)에서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싸움.
5세기는 중원의 남조와 북조, 북방의 유목왕조, 그리고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만주와 한반도지역의 네 세력이 절묘하게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나 589년(평원왕 31년)에 수나라가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면서 동아시아 질서는 재편이 불가피했다. 수는 통일 후 중국 중심의 일원적(一元的)인 국제질서 수립을 도모했다. 오랫동안 독자적인 천하를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는 그러한 수의 구상과 달리 기존의 국제적 위상을 유지하며 요해(遼海) 지역의 말갈과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고, 유목세력과의 교역도 지속하려고 했다.
수(隋)문제(文帝}는 처음에 고구려에 대해 유화책을 추진했고, 고구려도 수(隋)나라와 타협을 통해 종전의 세력권을 보장받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에 두 나라는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그러나 수(隋)문제는 고구려영양왕(嬰陽王)을 백제위덕왕(威德王), 신라진평왕(眞平王)과 동급으로 대우하며 이 두 나라에 대한 고구려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또 요서 북방의 거란(契丹), 해(奚), 습(霫), 말갈 등을 포섭하며 고구려를 압박했다. 이에 고구려는 외교관계 개선으로는 위기를 타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598년에 말갈병을 이끌고 요서 지역을 선제 공격했다. 그러자 수(隋)는 고구려 정벌에 나섰다. 수(隋)문제는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공격했으나 모두 대패했고, 홍수와 전염병으로 인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607년 8월 화친을 청하기 위해 돌궐로 간 고구려 사신이 유림(楡林)을 순행하고 계민가한(啓民可汗)을 찾아온 수(隋)양제(煬帝)와 마주쳤다. 복속을 맹세한 돌궐의 땅에서 적대관계였던 고구려 사신과 마주친 수(隋)양제(煬帝)와 군신들은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수(隋)나라로서는 말갈과 거란을 압박하고 돌궐과 연결하고 있는 고구려가 묵과할 수 없는 최후의 적이었다.
수양제는 전쟁 준비에 총력을 기울였다. 3,000리에 달하는 대운하를 완성하고, 선박 수만 척을 건조하였다. 배후를 안정시킬 목적으로 대만을 정벌하고 남해 무역을 활성화시켰으며, 토욕혼(吐谷渾)을 압박하고, 돌궐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한편, 말갈의 일부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는 등 다양한 시도를 펼쳤다. 고구려도 이미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국, 거란, 말갈 등을 끌어들이는 한편, 돌궐을 우호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609년 토욕혼을 복속시켜 서쪽의 후환을 없앤 수양제는 612년 정월 장문의 조서를 내리고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612년 수 양제가 육군 113만과 해군 4만을 직접 이끌고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다. 이 때 군량을 운반하는 수단은 배였으며, 군대를 출발시키는 데에도 40일이 소요되었다. 수 양제는 친정군을 거느리고 요하 도하 작전에 성공한 뒤 30만의 친정군으로 요동성을 집중공격했다.
요동성은 오늘날의 요양시에 있었던 평지성으로 북한 평안남도 순천시에 있는 벽화고분인 「요동성 총도」에 성의 그림이 그려 있다. 요동성에서는 공방전이 치열하게 계속됐다. 비루(飛樓), 성벽을 깨는 동(橦), 사다리인 운제(雲梯), 땅굴(地道) 등이 동원되었다. 어량대도(魚梁大道)라 해서 포대에 흙을 담아 수 백 만 개를 쌓았다. 높이가 성까지 이르고, 넓이가 30보나 되었다. 성벽보다 높은 차인 팔륜루차(八輪樓車)를 만들어 공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이 항복을 하지 않고 공방전이 계속되자, 수 양제는 전략을 수정하여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이 이끄는 30만 5천 명의 별동대를 파견하는 한편 내호아(來護兒)가 지휘하는 수군을 출발시켰다. 이는 황해를 건너 평양에 상륙한 뒤 우중문·우문술이 지휘하는 별동대와 협동 작전을 벌이기 위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수군 함대는 평양성 60리 밖에서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궤멸당했다.
우중문·우문술의 군대가 압록강 서쪽에 이르렀을 때 을지문덕 장군이 항복을 청한다며 수나라 군 진영으로 찾아왔다. 적군의 상황을 면밀하게 탐색한 을지문덕이 수나라 진영을 떠나자, 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은 우문술 등이 그 뒤를 추격했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가 굶주린 기색이 역력함을 보고 그들을 피곤케 하고자 매번 싸우면서 번번이 도주하였다. 우문술은 하루 중에 일곱 번을 싸워 모두 이겼으니 승리에 도취해 앞뒤 생각없이 고구려군의 유인술에 따라 계속 전진하여 내륙 깊숙이 들어갔다. 수나라 군은 마침내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도달해 산을 의지하여 진영을 만들었다.
이 무렵 고구려 병력 대부분은 평양에 집결하여 수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군은 본래 내호아의 수군과 합류하고자 하였지만 수군은 이미 격파되었으므로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이때 을지문덕이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항복한다고 하며, 우문술에게 퇴각할 구실을 만들어주는 척하면서 일대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수군은 고구려군에게 정신없이 쫓기며 퇴각했다.
그리고 쫓기던 수나라군과 추격하던 고구려군은 마침내 살수에 도달했다. 수나라 군사들이 우왕좌왕 급하게 살수를 건너고 있을 때 고구려군이 이들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수의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 등 수많은 장졸들을 죽이는 대대적인 전과를 올렸다. 이때 요동성까지 생존해서 돌아간 군사는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이 패배로 인하여 수양제는 요동성에서 철수하였으며, 전쟁은 고구려의 대승으로 끝이 났다. 이 전투를 살수대첩이라 한다.
요동성이 수나라 군대의 집요한 공격에도 함락되지 않은 것은 요동성민의 단결된 힘과 고구려의 성 중심 방어체계의 성과였다. 고구려군은 평양 일대에서 우중문(于仲文)·우문술(宇文述)의 군대와 내호아(來護兒)의 부대가 합류하지 못하도록 전략적,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을지문덕은 사서에 세계(世系)가 자세하지 않다고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전통적인 귀족은 아니었고, 신진귀족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을지문덕이 군사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전략전술을 수립하고, 수제국과의 전쟁을 자신의 계획대로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고구려 사회의 건전성과 개방성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