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저희

한자 角抵戱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놀이/놀이
지역 길림성  
시대 고대/고대
상세정보
성격 민속놀이
노는시기 단옷날, 백중, 한가위
정의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의 고구려각저총 벽화 등에 보이는 전통 민속놀이.

개설

각저희(角抵戱)는 힘겨루기를 하는 씨름을 지칭하는 말로 한자어로는 각력(角力)과 상박(相撲) 등으로 불렸다. 집안 지역의 각저총·무용총·장천 1호분, 안악(安岳) 지역의 안악 3호분과 같은 고구려고분에 씨름하는 장면이 벽화로 그려져 있어 고구려에서 씨름이 행해졌음을 살필 수 있다.

내륙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씨름은 그 옛날 장례 때 치러졌던 중요 행사의 하나였다고 한다. 각저총과 같은 고구려고분에 씨름 장면이 그려져 있어 고구려에서도 씨름이 장의(葬儀) 행사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각저총의 경우, 널방 현실(玄室) 동남 벽에 씨름하는 두 역사(力士)와 심판하는 노인 사이 공간에 새 구름무늬가 나타나 있고, 화면 좌측에는 하늘과 땅을 잇는 솟대와 같은 신목(神木) 가지에 검은 새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 같은 회화 내용과 연관시켜 볼 때, 고구려고분에 그려진 씨름 장면은 현실 세계의 흥겨운 놀이나 체력 단련을 위한 운동이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을 타계로 보내기 위해 행해졌던 통과 의례의 한 과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씨름은 이후 체계화된 권술을 갖추게 되면서 종래의 장의 행사나 힘겨루기에서 벗어나 농촌 마을의 민속 놀이로, 한국의 전통적인 운동 경기로 오늘날까지 그 맥을 잇고 있다.

연원

두 사람이 힘을 겨루는 씨름과 같은 투기 운동은 인류의 출현과 때를 같이하며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맹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 다른 종족의 지배를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힘과 체력으로 싸워 이겨야만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씨름은 무기가 제작되기 전의 원시 사회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련의 수단으로 행해졌다.

씨름은 이후 단순한 힘겨루기에 그치지 않고 농경 사회의 중요한 제례 행사로 정착되었으며, 마을 단위의 대동 놀이 성격을 지녀 마을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는 데도 일조했다. 그런 까닭에 농사의 중요한 시기인 단오, 백중, 한가위 등에 씨름이 연행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씨름이 언제부터 행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고구려고분에 씨름도가 벽화로 그려진 것으로 보아 삼국 시대에 이미 씨름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사(高麗史)』를 통해, 조선 시대에는 『세종실록(世宗實錄)』·『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등에서 씨름과 관련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고려사』 권36에는 “충혜왕(忠惠王) 원년(1339)에 왕이 나랏일을 총신들에게 맡기고 매일 궁중에서 잡무에 종사하는 소동들과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가 없더라”고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에는 “두 사신이 목멱산(木覓山)[지금의 남산])에 올라 역사들에게 씨름을 시키라 하였고, 세종 13년(1431)에 왕이 경회루에 앉아 씨름을 하게 한 뒤 차등으로 상을 주었다”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동국세시기』 「5월 단오조」에 금산[지금의 김천] 지방에서 단옷날 수 천 명이 씨름을 구경했다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으며, 『무예도보통지』에는 현종(顯宗) 때 무예청(武藝廳)에서 각저를 무과 시험 종목에 포함시켰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같은 문헌 자료를 통해 고구려에서 치러졌던 씨름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도 성행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씨름이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놀이 방법

씨름은 샅바 이외에 별다른 도구가 필요 없는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 경기로 농사의 중요한 시기인 5월 5일 단옷날, 7월 15일 백중, 8월 15일 한가위에 수 백 명의 관중이 모여 있는 큰 마당에서 개최되었다.

씨름은 샅바나 띠를 넓적다리에 걸친 두 사람이 서로 부둥켜 잡고 힘과 재주를 부려 상대방을 먼저 넘어뜨리는 것으로 승부를 내는 운동이다. 씨름 기술로는 당기기, 들기, 밀기, 허리 돌리기, 다리 걸기 및 감기, 되치기 등이 있다.

특히 추석 명절인 한가위에는 경향(京鄕) 각처에 힘이 세고 체구가 큰 장사들이 모여 자기 고장과 자신의 명예를 걸고 우승을 거머쥐기 위해 씨름 경기에 참가하였고 씨름 장사들은 맞붙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 자신의 기술을 총동원하여 최대의 힘을 발휘했다.

최종 승자에게는 부상(副賞)으로 황소가 주어졌다. 황소를 주는 풍습은 씨름하는 사람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 농민이었다는 점과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농업을 천하의 근본[天下之大本]으로 여겼던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농사일을 부지런히 하라는 의미에서 황소를 시상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황

근대에 이르러서는 1912년에 서울단성사 극장에서 씨름 대회가 개최된 이후 흥행성을 띤 연례 행사로 극장에서 씨름 대회가 열렸다. 그 후 조선 씨름 협회가 생겨나고 1927년 전국적인 씨름 대회가 개최되는 등 조직적인 성격을 띠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1942년부터 열리지 못했다. 해방 후 1947년부터 씨름 대회가 다시 개최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1972년 씨름이 TV로 중계되면서 대중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본격 부상하였다.

그러나 그간 호황을 누리던 민속 씨름은 2000년대 이후 시대 변화와 함께 점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씨름이 단순한 오락적 가치를 지닌 다른 스포츠와 차별화된 민족적 스포츠로 거듭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
  • 『세종실록』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武藝圖譜通志』
  • 전호태, 『고분 벽화로 본 고구려 이야기』(풀빛, 2004)
  • 『한국 무예 신문』(2012년 4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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