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靈星 信仰 |
|---|---|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신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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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서 농업신인 영성(靈星)을 모시는 신앙.
중국의 동북 지역과 한반도 북부 일대에 걸쳐 국가를 영위했던 고구려에서는 농경의 신인 영성을 모시고 제의를 거행했다. 영성에 대해 제사했다는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에 전하는데, 먼저 3세기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는 『삼국지(三國志)』에는 “궁전 짓기를 좋아하며 궁전 양측에 큰 건물을 지어 귀신에 제사지낸다. 또한 영성(靈星)·사직(社稷)에 제사지낸다. (중략) 왕의 종족(宗族)으로서 대가(大加)인 자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로 불린다. 연노부(涓奴部)는 본래의 국주(國主)였으므로 지금은 비록 왕이 되지 못하지만 그 적통(適統)을 이은 대인(大人)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자체의] 종묘(宗廟)를 세우고 영성과 사직에게 따로 제사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영성[농업신]이나 사직[토지신]이라는 명칭은 중국에서 온 것인데, 영성은 전한(前漢)대부터 송(宋)대까지 존재했던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 농업을 관장하는 신이었다. 영성의 신체는 별로서, 원래는 28수(宿) 중 동방 7수인 창룡성 전체로 여겨졌으나, 후대로 가면서 창룡성 중에서 특정화된다. 후한 무렵부터 창룡의 뿔에 해당하는 천전성(天田星)이란 설과 심장에 해당하는 대화성(大火星)이란 설이 대두되었다.
2000년대 이후 중국 학계에서는 고구려의 영성 신앙이 중국 예제의 영향으로 시작된 것이며, 나아가 고구려가 은상족(殷商族)이기 때문에 가지게 된 신앙이라는 주장을 통해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간주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런데 고구려 말기의 역사를 전하고 있는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고구려의 영성을 음사(淫祀)라고 하였다. 음사란 유교 예제에 맞지 않는 올바르지 못한 제사라는 의미이다. 이 시기 중국 왕조의 국가 제사에 포함된 영성을 음사라고 표현했다면, 고구려의 영성 신앙은 중국의 예제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고구려의 전통적인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중국의 그것과 유사한 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고, 그것은 고구려 영성 신앙의 성격도 영성이 가진 본래적 의미인 농경 신앙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영성 신앙은 농업신을 모시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종교체계이자 농경의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영성은 국가 제사의 대상으로, 그 주재자는 왕이었다. 농업신인 영성과의 교섭 창구가 왕이라면, 농경이 중요한 사회에서 왕의 권위는 그만큼 강화될 수 있다. 그런데 전왕족 연노부의 적통대인이 독자적인 영성제를 거행했다는 사실은 왕권이 귀족 세력을 제도적으로 완전히 제압하지 못한 현실을 반영한다. 그렇지만 연노부의 영성은 고대 국가의 발달과 함께 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 구조가 확립되면 사라질 운명이었다. 그 시점이 언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영성 신앙은 고구려 사회의 발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