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旬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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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부여|고대/삼국 시대/고구려 |
| 성격 | 장례풍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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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와 고구려에서 행해진 장례 풍속.
부여에서는 순장의 풍습이 있었다.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에는 사람을 죽여 순장 하는데 많을 때는 백 명이나 된다고 하며, 조금 뒷 시기의 사실을 전하는 『진서(晉書)』에는 살아 있는 사람을 순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나 『진서』가 『삼국지』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것임을 감안하면, 『진서』의 기록처럼 산 채로 묻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순장의 풍속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한편 국내성(國內城)에 도읍을 두고 있던 시기의 고구려에서도 순장의 흔적이 확인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248년(동천왕 22) 9월 동천왕이 죽었을 때 가까운 신하들이 자살하여 따라 죽으려고 하는 자가 많았다. 새 왕이 예(禮)가 아니라 하여 이를 금하였지만, 장례일에 이르러 무덤에 와서 스스로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의 경우처럼 죽은 자의 뒤를 이어 따라서 죽는 것은 순사라고 하며, 이것은 엄밀히 말하면 순장과는 구분되는 것이나, 그 맥락은 같은 데서 나온 것으로 이해된다.
순장은 일반적으로 지배층에 속하는 인물이 죽었을 때 첩·신하·종자(從者) 등을 함께 매장하는 것을 말하는데,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 행해진 풍습이었으며, 요동(遼東) 반도에 위치한 강상(崗上)·누상(樓上)의 청동기 시대 집단 돌덧널무덤들에서 구체적인 순장의 사례들이 확인되고 있다.
초기 고대 사회에는 영혼의 불멸을 믿어 장례를 후하게 하는 것이 하나의 공통된 풍습으로, 순장 풍습은 죽은 뒤에도 피장자(被葬者)의 평상시 생활이 재현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것이다. 지배층이 죽은 뒤에도 소유물을 계속 지배하고자 하는 욕구로 말미암아 무덤의 규모도 크고, 부장품도 많은 양을 함께 묻는 후장(厚葬)의 장례 풍속이 나타났으며, 순장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생산력의 증대에 따라 노동력의 가치에 대한 이해가 증진되면서 순장 풍습은 점차 폐지되었고, 사회의 발전에 따라 장례 풍속도 무덤의 규모를 줄이고 부장품도 최소화하는 박장(薄葬)으로 변모하였다. 고구려에서 순사하려는 것을 예가 아니라고 금하였다는 것은 부여에 비해 이미 한 단계 발전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